126. 크리에이터의 소망
포스트 아포칼립스, 그리고 FPS, RPG라는 3개의 소재를 가지고 게임을 만들 때, 만들 수 있는 형태는 어떤 것이 존재할까?
오랜 시간 동안 게임 개발자들은 여러 형태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유저에게 제시해왔다.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다룬 1988년의 ‘웨이스트 랜드’에서 ‘폴 아웃 시리즈’까지,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멸망 이후의 세계를 다루기도 하고, ‘데이즈 곤’이나 ‘디비전’처럼 질병으로 인해 국제 사회가 무너진 세계를 표현하기도 했던 것처럼.
그런 분위기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멸망하는 세계’를 다룰 것인가와 ‘멸망한 이후의 세계’를 다룰 것인가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조금 더 급박하고 현실에 가까운 느낌이라면, 후자는 판데믹 이후에 인류가 새로 구축한 사회를 다루는 만큼, 조금 더 황량하지만 안정감 있는 세계를 표현한다.
하린이 처음 의도했던 컨셉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지옥문:런던’이나 상혁이 그것을 보고 수정한 ‘디비전’은 둘 다 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판데믹이 일어난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 아닌, 붕괴 직후의 세계를 다루는 것.
그 거대한 재난 안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된다.
서연은 그것에 집중했다.
이전까지 PTW의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항상 세계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마리의 눈물에서 죽음의 운명을 벗어나 여왕의 자리에 올라 왕국을 지배하는 엔딩에서, 지금까지 고난을 함께한 가신들이 충심으로 플레이어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플레이어가 느끼는 감정을.
나이츠 어셈블에서 우연히 마법의 게임 북을 주운 소년이 친구들을 모아 거대한 악을 무너트리는 엔딩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플레이어가 친구들을 보며 느끼던 감정을.
포수가 회귀를 숨김에서 플레이어가 MLB시즌 전체를 씹어 먹으며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되었을 때의 감정을.
GOS에서 애니판의 주인공이 이루지 못한 밝은 미래를 게이머가 마침내 자기 손으로 쟁취했을 때, 자신을 따라 함께 한 로봇들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느끼는 감정을.
지금까지 PTW에서 나온 대부분의 게임은, 그런 식으로 언제나 게이머가 세계를 구하는 중심에 있는 게임들이었다.
이번에 상혁이 놓친 부분도 바로 그 부분이었고, 서연이 발견한 부분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상혁과 서연이 각자의 분야에서 넓게 보는 타입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지수나 민준은 깊게 보는 타입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상혁은, 기본적인 ‘컨셉 아이디어’를 잡은 이후에 바로 지수를 불러 구체적인 컨셉에 대해 회의했다.
비록 20살이 넘어가면서 이제는 자신이 중학생 때 했던 말을 들으면 몸을 비비꼬며 괴로워하는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중2병 설정에 대한 열정이나 소 동물 같은 왜소한 체구는 처음 가입했을 때와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수는, 상혁이 생각한데로 서연의 스케치를 보는 순간 크게 흥미를 느꼈다.
“FPS게임 컨셉 아트를 그리려고 하신 것 같은데, 연출은 거의 액션 영화 같은 느낌이네요?”
하린이 제안했던 초기 컨셉은 상혁의 손을 거쳐 ‘지옥문:런던’에서 ‘디비전’으로, 그리고 다시 ‘지옥문:런던’같은 느낌으로 회귀했다.
그러나 수정 과정을 거친 결과물은, 원래라면 망했어야할 컨셉을 완벽하게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되어 있었다.
지금 지수가 보고 있는 컨셉아트처럼.
“이거, 근데 장르가 정확히 뭐에요? 총든 거 보면 FPS나 TPS 같긴 한데, 플레이어 모션은 액션 게임 같은 느낌이네?”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거대한 촉수 괴물이 건물에서 뜯어낸 철근 박힌 바위를 플레이어들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진압 방패를 든 플레이어가 그 돌덩이를 몸으로 막고 있었다.
양손에 기관 단총을 든 유저의 총이 미친 듯이 불꽃을 뿜어내며 촉수를 견제하는 가운데, 오른쪽 위의 건물에서 창문을 뚫고 나온 여성 플레이어가 공중에서 촉수 괴물을 향해 형광 색으로 빛나는 군용 나이프를 내리찍은 모습은 지수가 알고 있는 어떤 게임과도 닮지 않은 모습이었다.
“의도는 ‘월드 오브 전쟁 크래프트’의 레이드를 현대 무기로 하는 느낌으로 만든 건데, 네가 보기엔 어때?”
“아, 그러니까 이해가 가네요. 이 방패든 근육 아저씨가 탱커고, 총든 아저씨가 원거리 딜러고, 칼 든 여군이 근접 딜러같은 느낌인거에요?”
“응. 조금 다르지만 비슷해.”
“그럼 각 캐릭터 능력도 다 다르겠네요?”
“그렇지.”
“흐음···. 그럼 캐릭터 설정을 다 따로 짜야하나?”
‘GOS’의 설정 대부분을 담당해서 짰던 PTW의 ‘컨셉 전문가’답게, 지수는 컨셉아트를 보자마자 상혁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거기 맞는 백스토리 구상을 시작했다.
이후에 서연이 컨셉아트의 최종본을 만들 때, 그림 안에서 각 캐릭터의 이야기나 배경이 좀 더 살아있는 느낌이 될 수 있도록.
지수는 상혁이 잡은 기획 초안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히 삭제하면서, 조금 더 유저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들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이 ‘귀살대’라는 건 뭐에요?”
“괴물을 잡는 특수 집단 같은 거.”
“그럼 그건 단순히 특수 훈련을 받는게 아니라, 괴물의 피를 먹어서 각성하는 걸로 바꾸죠? 원래는 괴물 피를 먹게 되면 십중팔구 폭주하면서 괴물이 되지만, 그 안에서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소수만이 ‘귀살대’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설정으로요.”
“그럼 주인공은 그 특수부대의 일원인건가?”
“아뇨, 그럼 오프닝에서 설명이 길어지니까, 주인공은 일반인으로 하죠. 원래는 귀살대에 주입하는 피는 100배로 희석된 피를 주입하는데, 주인공은 원액을 뒤집어쓰고도 폭주하지 않는 특이 체질인걸로.”
“오, 뭔가 있어 보인다.”
“근데 나머지 캐릭터도 다 같은 설정으로 하기는 좀 그런 게 문제네요.”
잠시 고민하던 상혁이 말했다.
“캐릭터 외형이나 성별은 유저가 결정하게 하고, 백 스토리는 똑같이 가되, 직업은 초반부 스토리를 통해서 결정하게 하자. 초반 스토리에서 유저의 선택에 따라 나중에 캐릭터 직업이 변경되는 거지.”
“처음에 캐릭터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플레이 하면서 직업을 고르는 거네요? 오, 좋다!”
그런 과정을 거쳐, 총 8장의 컨셉아트가 완성되었다.
괴물의 피를 주입받고 괴로워하는 요원들의 이미지.
죽음의 위기에서 건물 벽을 뚫고 나타나 주인공을 구해주는 ‘귀살대’의 이미지.
마치 마트처럼 수많은 무기가 놓여있는 진열대 앞에서 무기에 대한 설명을 듣는 주인공의 이미지.
피를 뒤집어쓰고 변이되어 주변인들을 습격하는 시민들의 이미지.
‘게이트’가 열리면서 안에서 나온 괴물들이 도시를 건물채로 붕괴 시키는 이미지.
‘각성’을 통해 괴력을 얻은 주인공이 날아오는 콘크리트 블록을 부서진 트럭을 던져 공중에서 막는 이미지.
그리고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귀살대’ 요원들을 촉수마다 꿰어 놓고 주인공 부대를 바라보는 괴물의 이미지.
눈을 감은 채 이마에 손가락을 짚고 염력으로 적이 뱉은 가시 덩어리들을 공중에 붙잡는 요원의 이미지.
미친 듯이 몰려오는 작은 괴물들의 파도를 뚫는 동료의 뒤에서, 보스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단검을 들고 걸어가는 요원의 이미지.
거대한 괴물의 시선을 3명의 플레이어가 붙잡고 있는 사이, 그렇게 우회로로 돌아 건물위에 도착한 유저가 건물 유리창을 뚫고 보스의 머리위로 도약하는 이미지.
게임 개발 과정에서의 컨셉아트는, 게임 플레이가 보여주는 핵심적인 재미를 미리 잡아보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개발 과정에서 언제든 ‘원래 구현하려 했던 재미’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리고 서연이 완성한 10장의 그림은, 세 사람이 생각한 ‘새로운 게임’의 재미를 전달하기에 너무나도 충실한 형태로 구현되어 있었다.
결과물을 받아든 하린이, 자신도 모르게 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
지난 주말, 하린이 서연의 합류를 거절했던 건, 딱히 하린이 상혁에게 반해있어서 그렇다던가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이 잡게 된 기회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직접 회사를 차리지 않는 이상은, 전문 개발자라도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만드는 기회를 잡는데 꽤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상혁이 회귀 전에 아예 기회조차도 잡지 못했던 것처럼.
이 바닥이 원래부터 능력도 중요하지만 운이나 라인도 꽤나 영향을 끼치는 바닥이니까.
상혁은 하린의 프로젝트 소개에서 자신의 회귀전 과거를 떠올렸고 그런 이유로 하린의 팀을 골랐다.
운영으로 입사한 하린이, 직접 계획을 잡고 시작한 프로젝트에 가진 엄청난 애착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절박함.
서연이나 상혁이야 어차피 PTW의 핵심 개발팀의 일원이고, 누구의 프로젝트가 1등을 하던 결국 개발과정에 참여하게 되겠지만 하린은 달랐으니까.
상혁의 생각대로, 이번 콘테스트의 기회를 놓치면 다음 콘테스트가 시작될 때까지 게임 개발엔 발도 붙일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아니면 몇 십번의 컨테스트를 참가하더라도 평생 게임 개발의 기회는 오지 않을 수도 있었고.
그래서 생긴 오해.
자신의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상혁이 있는 팀이니까 들어가고 싶다는 서연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순수하게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는 팀원들만 데리고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어.’
욕심이라고 하면 욕심이다.
자신이 가진 아이디어는, 그 많은 직원들 가운데 상혁만 관심을 보였을 정도로 마이너하고 정리도 되지 않은, 어찌 보면 허접하기 그지없는 물건이니까.
애당초 상혁이 아니었으면 팀 구성 자체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준비실에서 직접 구운 쿠키를 놓고 하염없이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애당초 운영팀 출신인 자신에게도 이런 기회를 주는 회사는 전 세계에 PTW말고는 없을 테니까.
그러던 와중에 마법처럼 회사 대표가 찾아오더니, 이번엔 회사의 대표 원화가가 컨셉아트를 그려왔다.
그것도 반박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자신이 생각하던 ‘아이디어’가 완성을 향해 달려가야 할 것 같은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하면서.
서연의 컨셉아트는, 하린이 도저히 트집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재미있어 보였다.
이걸 대체 이 장르에 생소한 사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인가 싶을 느낌이 그림 전체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개발자의 격.
이건 절대 그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고, 아마추어인 자신도 그림을 보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컨셉 아트 전체에서, 서연이 아이디어에 가진 애착이 느껴졌기 때문에.
‘이래서 PTW···.’
어째서 그들이 고등학생 시절부터 팬들에게 사랑받는 명작게임을 연속으로 만들 수 있었는지, 남들 다 죽었다고 하는 용자 로봇 장르를 선택해놓고 글로벌 히트게임을 만들 수 있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애당초 PTW의 초기멤버들 전부가, 상혁과 함께 ‘특정 컨셉의 재미를 극대화 하는 것’에 특화된 멤버들이었으니까.
장르의 생소함 따위는 껌처럼 씹어 먹을 수 있는 정예 개발 사단이, 상혁이 꿈꾸던
‘이상혁 사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팀에 그 ‘이상혁 사단’의 핵심 인물들이 들어오려 한다는 사실이, 하린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고 있었다.
‘진짜로 게임을 만들 수 있을까? 내 아이디어로?’
‘운영 파트에 있는 내가,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게임을 잘 만드는 개발자들을 데리고? 혹시 지금 꿈꾸고 있는 건가?’
생각에 잠긴 하린에게, 상혁이 추가타를 날렸다.
“아, 그리고 지수도 들어오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죠?”
“예?! 지수 씨도요?”
“게임이 마음에 든다고 하네요.”
“조조조좋아요! 그, 그런 이유라면, 저는 대환영이에요! 무려 저희 회사 네임드들께서, 제 게임이···.”
‘마음에 든다고.’ 라고 하려던 하린이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에 입을 다물자, 상혁이 웃으며 말했다.
“뭔가 네임드라고 하니까 유니크 몬스터가 된 기분이지만, 뭔 상관없겠죠. 그럼 지금 멤버는 기획에 저랑 지수, 그래픽 서연, 프로그래머 이범배. 그리고···.”
상혁이 하린을 보며 말했다.
“팀장. 이하린 씨.”
툭.
눈물이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자신을 ‘팀장’이라고 부르는 상혁의 목소리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애매한 희망을 확실한 감정으로 정리 시켜주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감정은, 게임 업계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감정이었다.
‘아, 나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이 업계에 들어온 거였구나.’
하린은 확신했다.
적어도 지금 컨테스트에 참여한 팀 가운데, 자신의 팀의 전력이 가장 강력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