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123화 (124/485)

123. 이론상 최강

워크패스트로 게시글을 검색하던 상혁의 눈에 게시물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FPS+RPG 장르를 혼합한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게시글.

그 글을 보고 상혁이 가장 먼저 떠올린 이름은, 먼저 제안을 받았던 민준과 마찬가지로 눈보라사 출신의 개발자인 발 로퍼가 만들어 게임 시장에 헬 게이트를 열었던 ‘지옥 문:런던’이었다.

‘이론상으로는 괜찮은데 결과물이 시궁창이었던 작품이었지.’

인기장르에 인기 장르를 얹겠다는 발상이 크게 나쁜 건 아니다.

실제로 FPS+RPG장르에서 ‘보들랜드’라는 걸출한 시리즈도 탄생했으니까.

이론상으로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눈보라 출신의 능력 있는 핵심 개발자.

최고 인기장르인 FPS와 RPG의 결합.

보는 이를 흥분하게 만드는, 인류멸망을 건 악마와의 처절한 싸움.

그리고 그 결과물은···.

좋은 컨셉을 가진 게임이 게임성으로 어디까지 말아먹을 수 있는지를 바닥까지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게이머들에게 아쉬움을 남겨준 작품이기도 했기에, 상혁은 게시글에 흥미를 느낀 것이었다.

‘잘 만들면 괜찮았을 작품인데 좀 아쉬웠지. 일단 어떤 내용인가 좀 볼까?’

본격적으로 헬게이트가 열리는 시기는 올해인 2007년 말쯤이었다.

지금은 작년의 공개 행사를 통해서 사람들의 기대감이 잔득 부풀어 있는 상황.

완전히 겹치는 컨셉이었다면, 상혁은 게시글을 닫고 다른 팀을 살펴볼 생각이었지만, 상혁이 연 게시글은 의외로 충실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괜찮네?’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미지의 존재와 싸운다는 컨셉은 비슷했지만, ‘지옥문:런던’이 RPG쪽에 치중한 느낌이었다면 하린이라는 직원이 올린 게시물은 조금 더 FPS에 비중을 둔 플레이를 희망하고 있었다.

물론 글 내용만 봐서는 게임 모습을 유추하기 힘들 정도로 부실한 기획안이었지만, 상혁은 그 안에서 하린이 가진 구체적인 재미에 대한 견적을 볼 수 있었다.

“잘 꾸미면 괜찮겠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상혁은, 게시물 끝에 있는 하린의 작업실 번호로 찾아갔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작은 티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되었다.

“요요요요기···. 차라도···.”

하린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를 대접하려 하자, 상혁이 찻잔을 바로 받아 자신의 앞에 놓았다.

그대로 두면 컵에 담긴 차가 죄다 바닥으로 쏟아질 기세였기에.

“고마워요.”

상혁이 웃자 하린은 심장이 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필사적으로 티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려 노력했다.

“히히-후. 히히-후.”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운영 팀 있을 때도 자주 봤었잖아요?”

“후우···. 일대일로 대화하는 건, 후우, 처음이라 서요.”

“그런가?”

상혁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애당초 상혁이 가진 능력 중 팀원들에게 가장 고평가 받는 능력이, 이렇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대의 긴장을 풀어주는 특유의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리고 상혁은, 하린이 어느 정도 긴장을 푼 것 같은 느낌을 받자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걸었다.

“이하린 씨. 맞죠? 운영 팀 소속 시니어급 직원. 입사는 작년 6월에 하셨고.”

“저에 대해 알고 계셨어요?”

“면접 때 제가 직접 뽑은 직원인데 기억 못할 리가 없죠.

운영 팀에 들어오는 곤란한 질문도 항상 정성들여 답변해주시는 타입이시고.”

“가, 감사합니다.”

“뭐, 지금은 인사평가 자리가 아니니까요. 게임 이야기를 하죠. 저는 하린 씨가 제안한 컨셉이 마음에 드는데요. 제가 팀에 들어가는 걸 허락해 주시겠어요?”

“저, 뭐 한 가지만···.”

“말씀하세요.”

“왜 저인가요?”

솔직히 자신은 있었다.

물론 다른 팀의 프로젝트에 비하면 허접하기 그지없을지 몰라도, 입사하고 나름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정말 열심히 어깨너머로 배운 기획력을 동원해서 만든 제안서니까.

단지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한 ‘거물’이 관심을 보인 이유가, 그녀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기획서도 다른 프로젝트에 비하면 엉망이고, 저는 게임 만들어본 적도 없는데요?”

“애당초 숙련된 기술을 강조할 거였으면 마스터급 직원이 팀을 꾸리게 했겠죠. 이번 콘테스트는 나머지 직원분들이 가진 ‘재미있는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를 보기 위해서 진행한 콘테스트에요. 그리고 저는, 하린 씨가 올린 제안서가 확실히 재미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기에 찾아온 겁니다.”

“제 기획안이요?”

사실 다른 직원에게도 몇 번 보여줬지만 한 번도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하린은 상혁이 내린 고평가에 속으로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이게 가능할까요?”

“예. 물론 손은 좀 많이 봐야할 것 같지만. 이론적으로는 괜찮아요.포스트 아포칼립스에 FPS랑 RPG를 결합한 장르잖아요? 전부 좋아하시는 거죠?”

“네?! 네! 좋아해요.”

“전부 재미있는 것들이니까요. 로망이 담겨 있고.”

“그. 그렇죠? 성공하겠죠? 지금 ‘지옥문:런던’도 엄청 기대작이잖아요!”

“아, 그건 망할 겁니다.”

“예?!”

“진짜로요. 농담이 아니라.”

“어떻게 아세요?”

“뭐 감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것도 물론 SF+FPS+RPG의 인기장르 조합이긴 하지만···.”

“하지만?”

“자장면도 맛있고 피자도 맛있지만 둘이 섞어먹는다고 맛있지는 않잖아요? 배합이 좀 잘못된 게임으로 나올 겁니다.”

단순히 인기 장르를 섞는다고 좋은 게임이 나오는 건 아니다. 각 요소가 잘 섞이도록, 재미있게 설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러자 하린은 자신이 혼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상혁에게 말했다.

“그, 그럼 제 것도···.”

“지금 기획 안 대로면 망하겠죠. 다른사람에게는 보여줘 봤어요?”

“네···. 다들 별로라고 하더라고요.”

“그건 하린씨가 강조해야하는 포인트를 아직 못 잡아서 그래요. 정말로 매력적이고 남이 봤을 때 손대고 싶은 부분을 강조해야, 제안서에 힘이 실리겠죠.”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게 만들겠습니다.”

상혁이 웃었다.

“멘토는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요.”

***

[MASTER 이상혁 : 소속 있음.]

그날 이후로, 워크 패스트에 등록되어있던 상혁의 프로필이 변경되면서, PTW내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펼쳐졌다.

애당초 CEO가 어느 특정 팀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투표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기에, 상혁이 이번 콘테스트에서는 팀원 목록 공개를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팀원들도 상혁이 그 많은 팀들 가운데 어떤 팀에 가입한 건지 궁금해 했지만, 상혁은 규정상 비밀이라며 민준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민준 역시 상혁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을 뿐이었다.

‘네가 그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고?’ 하는 표정으로.

그렇기에 상혁이 들어가는 팀에 따라 들어갈 생각이었던 서연과 지수는 그 후로 며칠간 상혁의 곁을 몰래 따라다니며 상혁을 감시했다.

어느 팀의 작업실에 들어가는지 확인하려고.

그러나 상혁은, 마치 팀에 소속되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일과시간엔 하루종일 자신의 자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 시간엔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애당초 모든 작업을 메신저로 처리하고 있었으니까.

-[HarinHarin]사장님. 혹시 오늘 팀 룸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

-[상혁]메신저로 보내세요. 그리고 사장님이 아니라 상혁 씨입니다. ‘팀.장.님.’-

-[HarinHarin]으어어.ㅠㅠ 그 팀장님 소리좀 안하시면 안 될까요? 너무 부담되는데··· ㅠㅠ-

-[상혁]안됩니다.-

-[HarinHarin]흐어어어 ㅠㅠㅠㅠㅠㅠㅠ-

-[상혁]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팀장님.-

-[HarinHarin]제가 잘못했어요!ㅠㅠ그만하세요.ㅠㅠㅠㅠㅠㅠㅠ흐어어어어ㅠㅠㅠ-

-파일 전송: ID:HarinHarin 님이 파일 [ 프로젝트 제안서_추가수정_수정2_파이널_마지막_한번만 더_진짜마지막.ppt ]파일을 전송했습니다.-

-[상혁] 어? 또 수정하셨어요? 예전 버전도 좋았는데요.-

-[HarinHarin] 뭔가 자꾸 욕심이 생겨서요.-

-[상혁]본인이 부족하다 생각하면 수정하는 게 맞긴 하죠. 다시 봐드려요?-

-[HarinHarin]부탁드리겠습니다.-

상혁은 이번에도 지난번 프로젝트처럼, 철저하게 가이드 역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하린이 표현하고자 하는 재미를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결과물을 본 사람이 조금 더 하린의 생각에 동조하기 편하게.

그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남기고 필요 없는 부분을 덜어내도록 돕는다.

이전에 GOS때 그랬던 것처럼.

원래대로라면 ‘헬게이트’와 비슷한 게임이 되었어야 할 기획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수정된 기획은, 상혁이 보기에 매우 마음에 드는 형태가 되어 있었다.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워크 패스트의 인력관리 항목을 열었다.

그리고는 아직 팀을 구성하지 않은 개발자 중에 이 장르에 관심 있어 할 만한 인원을 추려 하린에게 보냈다.

-[상혁] 좋네요. 이 정도면 충분히 진행 가능하겠어요. 지금 보내드린 목록에 있는 분들에게 팀 합류 제의를 하세요.-

-[HarinHarin]제가요? 사장···아니, 상혁씨가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상혁]말했지만 팀장은 하린씨에요. 팀장이 스카웃을 해야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제안서면 충분히 관심을 보일만한 사람들만 추렸으니까.-

-[HarinHarin]엑? 그걸 사장,아니 상혁씨가 어떻게 알고 계세요?-

-[상혁]우리 회사 면접 볼 때 제일 좋아하는 게임이나 만화는 왜 물어봤겠어요? 직원별로 좋아하는 장르나 컨셉에 대한 정보는 다 제가 따로 정리 해 놨죠.-

-[HarinHarin]전 직원을 다요?-

-[상혁]예. 그러니까 가서 권유 하세요. 힘내요 팀장님!-

-[HarinHarin]에···ㅠㅠ···알겠습니다. 처음에 누구부터 할까요?-

채팅을 보던 상혁이 씨익 웃으며 키보드를 타이핑 했다. 왠지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이름이라서.

-[상혁] 이범배 씨요.-

***

“수상해.”

서연이 턱에 손을 댄 채로 중얼거리자, 지수가 물었다.

“언니, 뭐가 수상해요?”

“상혁 오빠. 왜 자기가 들어간 팀을 말 해주지 않으려는 거지?”

“그거 규칙이 그래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었잖아요.”

“아니, 나한테도 숨기는 건 이상해. 생각해봐. 어느 팀에 들어갔건, 컨셉아트는 필요할 텐데, 상혁오빠가 원하는 컨셉을 제일 잘 뽑는 게 나란 말이지? 근데 나한테 권유를 안 한다? 이건 이상할 수밖에 없는 거야···.”

“가끔 보면 서연 언니는 엄청나게 자신감 과잉인 것 같···. 아으으···.”

지수가 서연의 말을 지적하자 서연은 지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조물거리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주물-주물-

“수상해···.”

“우으으···. 그냥 권유가 귀찮아서 소속 있음으로 해둔 거 아닐까요?”

“그런 거 치고는 가끔 작업하면서 헤실헤실 웃는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던 서연이, 갑자기 지수의 얼굴에서 손을 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거다!”

“에? 뭐요?”

“나 말고 다른 원화가를 찾은 게 틀림없어!”

“엑?! 상혁 오빠가요? 혁진 아저씨가 AD할 때 억지로 일본까지 보내면서 언니 AD시켜준걸 보면 상혁오빠는 언니 말고는 AD시킬 생각 없는 거 같은데?”

“오히려 그래서야. 그때도 처음에 내가 메카닉 디자인 못한다고 할줄 아는 혁진 씨한테 맡겼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 개발하는 것도 내가 못 그리는 장르인거지. 그래서 나한테 말 못하고 다른 원화가랑 바람난 게 분명해!”

씩씩대는 서연을 보며, 지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딱히 사귀는 것도 아닌데 바람은···. 아으으. 언니. 놔줘요···. 으으.”

서연에게 다시 붙잡혀 얼굴을 만지작거려지던 지수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서연은, 그런 지수의 말은 싹 무시한 채 말랑말랑한 지수의 볼을 주무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여자의 감이야. 분명 다른 원화가가 있는 거야. 그리고 100%이번엔 젊은 미소녀일거야.”

“아으엑?! 그건 왜요?”

“혁진 씨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나한테도 숨겼으니까!”

마침 오늘은 주말.

묘하게 일요일에도 회사에 나오던 상혁이 주말 출근을 안 하고 쉬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연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더 확신하게 해 주고 있었다.

“가자!”

“으···. 어디를요?”

“상혁오빠 찾으러!”

지수야 어차피 본 개발이 시작되면 알아서 업무 배정이 이루어질 것이기에 딱히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이것은 서연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기엔, 상혁이 만드는 게임의 컨셉 아트는 무조건 자신이 그려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가 되던 무조건 내가 더 잘 그리게 될 수 있는데,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AD자리를 순순히 내주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서연은 귀찮아하는 지수의 옷을 질질 끌며 천하대 미래관을 나섰다.

어차피 멀리 이동하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집도 직장 근처로 잡은 상혁이 갈만한 곳이라고 해봐야, 대학가 근처 가게일게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각 상혁은, 정확하게 서연의 예측대로 대학교 근처 카페에서 노트북을 펴고 하린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하린이 데려온 두 번째 팀원.

이범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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