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104화 (105/485)

104. 소신과 설득

상혁은 그 후로도 며칠간, 지수와 함께 플레이 시나리오 작성 작업에 몰두했다.

가급적이면 지수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도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언젠가 지수가 자신이 떠올린 굉장한 아이디어들을 게임으로 기획하는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물론 그것은 그런 과정에 익숙한 상혁 본인이 직접 기획을 하는 것보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상혁은 이런 일련의 과정으로 성장할 지수가 나중에 자신이 게임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마치 지금은 거의 상혁의 또 다른 수족처럼 상혁이 원하는 것 이상의 결과물을 쭉쭉 뽑아내고 있는 서연같이.

하지만 아직 지수는 겨우 고등학생 나이가 된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설정도 잘 짜고, 스토리도 잘 잡고, 대사도 잘 쓰지만 게임 기획에 있어서는 부족한 면이 많은 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다르게 쭉쭉 성장하고 있는 지수의 모습은 상혁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수와 협력 작업에 들어간 지 일주일.

지수는 키보드 위에 올라간 가느다란 손가락을 덜덜 떨며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다, 다했다!”

“후우···. 수고했어. 지수야.”

“으···.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물론 상혁과 함께 한 시간이 재미가 없거나 지루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어린 지수에게 체력적으로 힘든 작업인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의 전체적인 윤곽을 머릿속으로 재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엄청나게 뇌를 혹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으···. 정말 10년은 늙은 것 같아···.”

“어? 그래?”

갑자기 뒤에 서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상혁이 허리를 푹 꺾어 지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지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개미 눈곱만큼도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데?”

“으아아! 오빠! 갑자기 얼굴 들이대지 마요!”

지수가 급하게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옆구리를 의자에 부딪친 상혁이 바닥에 엎어져 끅끅대는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힘겹게 일어나 지수를 보더니 웃으며 이야기했다.

“장난이었어.”

“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요!”

“내 얼굴이 그렇게 무서웠나?”

상혁이 말하자 지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본인이 보는 앞에서 ‘잘생겨서요.’ 라고 하는 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에.

그래서 지수는 상혁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모니터를 상혁의 방향으로 살짝 꺾으며 상혁에게 물었다.

“어떤 거 같아요?”

말을 돌리는 지수를 향해 피식 웃어보 인 상혁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물론 다시 읽어볼 필요는 없었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전부 상혁이 뒤에서 보고 있었으니까.

“좋아. 이제 게임의 전체 윤곽에 대해서, 그리고 이 게임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대해서 확실히 감을 잡은 느낌이 드네.”

“꺄호! 인정받았다!”

“좋냐?”

“좋죠. 그 소리 듣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는데.”

“난 그 일주일동안 밀려있을 업무 처리할 생각하면 골이 아픈데···.”

상혁이 웃으며 이야기하자, 지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혁이 회사에서 가장 바쁜 사람중 1명이라는 것은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런 상혁이 무려 일주일이나 자신 때문에 다른 업무를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 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더 확실히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기획팀이나 아트 팀에서 올라오는 안건을 방향성도 잘 모르고 척척 승인을 해버리니까 게임이 중구난방이 되어버리잖아. 리드 기획자면 딱 마음속에 자신이 생각하는 게임에 대한 그림이 있어야지.”

평소와 다르게 상혁이 위로하는  대신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하자 지수는 고개를 더 푹 숙였다.

그러자 자신의 조그만 머리에 상혁의 손이 포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일을 맡기면서 좀 더 신경을 써야했는데.”

“제가 부족하지 않았으면 신경 쓸 일도 없었을 텐데요···.”

지수가 말하자 상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부족하다고 하는 게 아냐. 아직 ‘덜’ 배웠다고 하는 거지. 넌 한창 배우고 있는 기획자잖아.”

그렇게 말하며 상혁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지수는 웃으며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지수의 기분이 가벼워졌다고 판단한 상혁은 몸을 돌려 부실 밖으로 향했다.

“작성한 플레이 시나리오는 민솔이한테 보여줘. 최초 아이디어 제안자가 민솔이니까. 아마 좋아하겠지만, 혹시라도 기획에서 잡은 플레이 시나리오와 민솔이 구현하고 싶어 하는 느낌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건 다시 조정해야 할 거야.”

“그걸 제가 임의로 조정해도 되요?”

“지금의 너라면 괜찮아.”

상혁이 말했다.

“지금 네 안에는 확실하게 이 게임이 가야할 방향이 서 있으니까. 그것만 양보 안하면 그 과정으로 가는 길이 어떤 길이든 잘 판단할 수 있을 거야.”

***

‘꼴깍.’

조용한 부실에, 지수가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와 민솔이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뭔가를 이야기할 때 중간에도 다양한 리액션을 보여주는 상혁과 다르게, 민솔은 어딘가 민준과 닮은꼴로 차분하고 얌전하게 읽어 나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지수가 넘긴 플레이 시나리오의 양이 무려 50페이지.

A4용지에 10p크기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으니 거의 소설책이나 다름없는 분량이었다.

그러나 그 긴 텍스트를 읽어 나가는 민솔의 눈에는 한 점의 지루함도 없었다.

마치 내용에 빠져드는 것처럼, 민솔은 플레이 시나리오를 읽으며 완성된 게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긴 검토가 끝났을 때, 민솔은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언제 숨을 멈췄지?’

깊게 심호흡을 한 민솔이 지수에게 플레이 시나리오를 넘겨주자, 지수가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요? 언니?”

“흠···. 좋아.”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용자로봇 팬이라면 반해버릴 만한 내용이야.”

민솔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부분은, 이것이 ‘어른’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봐도 멋지고, 어른들이 봐도 멋진, 유치함과 로망의 절묘한 경계선을 잡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때, 잘 보여주지 않는 미소까지 지으며 완성된 게임을 상상하던 민솔이, 뭔가 알아차린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지수에게 물었다.

“근데 지금까지 개발한 거랑 좀 차이가 있네. 그건 괜찮다고 하셔?”

사실 상혁이 바쁠 때 지수가 개발팀에서 아이디어를 받아 작업을 진행했던 상당 부분이 플레이시나리오에서 삭제되어있었기 때문에, 민솔의 걱정은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민솔이 제안한 아이디어도 상당 수 있었고.

자신이야 이쪽 방향이 더 좋아 보이니까 괜찮지만, 누군가는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아이디어가 묻히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건 기획 쪽 판단 미스로 갈아엎게 되는 거니까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한 다음 다시 개발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 개발자들이 납득하려나?”

“그건 괜찮을 거라고 하시던데요?”

“어? 왜?”

민솔이 묻자 지수가 웃으며 말했다.

“상혁 오빠가 아마도 플레이 시나리오를 보면 민솔 언니가 그런 질문을 할 거라고 하셨었어요.”

“어? 그럼 내가 질문하면 어떻게 말하라고 하셨는데?”

놀란 눈으로 민솔이 묻자 지수가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마 다른 작업자도 플레이 시나리오를 보면 지금 민솔 언니와 같은 기분이 될 거라고요.”

지수의 말을 들은 민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단순히 주어진 작업을 하는 개발자라면 재작업에 반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아는 1팀 직원들은 대부분 좋아할 것 같은 개발 방향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냈던 아이디어가 묻히는 결과가 되더라도, 결과적으로 멋진 게임이 될 것 같은 기운이 팡팡 터져 나오는 기획이었기 때문에.

“그래. 아마 상혁 오빠 말이 맞을 거야. 다들 좋아할 거 같거든. 지금 바로 1팀 소집해서 회의하자. 이거 변경사항 다 적용하려면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을 테니까.”

“네. 그럼 저는 이거 인원수 큼 복사해놓을게요.”

“그럼 나는 팀원들 모아놓을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민솔이 지수에게 물었다.

“아 참, 상혁 오빠는?”

“오빠요?”

“상혁 오빠도 있는 편이 좋지 않아?”

“아, 이 정도면 제가 충분히 설득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시면서 2팀 작업 보러 가셨어요.”

가뜩이나 2팀에 비해 쟁쟁한 경력자들이 모여 있는 1팀이다. 거기에 혁진처럼 고집 있는 개발자의 수도 보통이 아니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작업량을 갈아 엎어야한다’는 통보를 하는 역할을 아직 어린 지수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민솔은 상혁의 판단이 옳다고 느꼈다.

“응. 상혁 오빠 말대로. 지금 그 기획이면 다들 좋아 할 거야.”

아마 그럴 것이다.

상혁이 이제까지 했던 판단들은, 비록 듣는 순간에는 왜 그런지 이해가 가지 않아도 끝에 가면 항상 좋은 결과를 이끌어오곤 했으니까.

그리고 정작 그 시각 상혁은, 일주일 만에 복귀한 2팀에서 혁찬을 필두로 한 스크립터 팀의 맹 공세를 받고 있었다.

“아니, 프로야구가 소재인 게임이니까 MLB든 KBO든 라이센스는 필수라니까요?”

단체로 몰려와서 상혁을 압박하는 직원들이 꺼낸 주제는, 상혁을 계속 고민하게 만들던 ‘프로야구 라이센스 계약’에 대한 문제였다.

***

“다시 말하지만, 라이센스는 넣지 않을 생각입니다.”

상혁이 말하자,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혁찬이 물었다.

“아니, 유저가 좋아할 거라는 이유로 아예 애니메이션까지 새로 만들면서 IP를 띄우시던 분이, 어째서 라이센스가 엄청나게 중요한 스포츠 물에서 반대로 라이센스를 안 따고 오리지널 캐릭터를 쓰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같은 이유야. 이전에 만들었던 배틀로얄 같은 경우는 라이센스를 따서 IP를 적용하는 편이 유저에게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고, 이번 거는 실제 프로야구 선수들이 등장하는 게 안 좋다고 생각해서 안 된다고 하는 거지.”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실제 장민철 같은 투수하고 배터리를 짜는 기분을 느끼고 싶을 거라고요.”

장민철.

한화 이글스의 영구결번이자 1990년대를 대표하던 선발투수.

혁찬의 말에 상혁은 ‘왜 류혁진이 아니지?’라고 생각하다 올해가 아직 2005년임을 떠올렸다.

“우선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리 게임은 국내 리그 씹어 먹던 포수가 회귀해서 메이저에 도전하는 내용이야. 근데 이미 씹어 먹던 포수가 왜 국내 리그에 다시 도전해? 이미 트레이닝캠프부터 마이너 리그까지 전부 MLB에 맞춰서 작업되어있으니까 그 부분을 새로 잡자는 건 무리지.”

“그럼 국내 리그는 아니더라도 MLB 라이센스 정도는 가능하잖아요. 돈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닐 거고,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나머지 멤버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MLB 라이센스 따서 넣는 편이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상혁이 묻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상혁은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자리로 가 민준을 호출했다.

“불렀어?”

잠시 후 언제나처럼 후줄근한 복장으로 나타난 민준이 다크서클이 가득한 눈으로 상혁에게 묻자, 상혁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민준에게 말했다.

“어. 잠깐 부탁하나 해도 될까?”

“뭔데?”

“지금 우리 게임 선수 엔트리 변경 기능 구현 되어 있나?”

“그거 적용은 한참 뒤잖아. 일단 지금은 바꾸려면 DB에서 수동으로 바꿔야 돼.”

“그래? 적용하려면 오래 걸려?”

“바꿀 테이블은 준비 되어 있어?”

“어.”

“그래도 좀 걸려. 지금은 DB 하나에서 관리하거든. 네가 원하는 건 클라이언트에서 개별적으로 선수 엔트리 관리하는 거 아냐?”

“롤백하면 되니까 그냥 지금 있는 거에 덮어씌우는 정도만 해줘.”

“그럼 지금 테스트 계정 전체에 적용될 텐데?”

“괜찮아.”

“그럼 15분 정도 걸려.”

“그럼 부탁 좀 할게.”

상혁이 말하자 민준이 피곤한 눈으로 모여 있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혹시 라이센스 문제 때문에 그래?”

오래전 민준은 상혁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상혁의 설명을 듣고 라이센스 적용을 포기 했었고.

“그냥 설명을 해주지 그래?”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체험하는 게 빠를 것 같아서.”

“하긴,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르니까 직접 겪는 게 더 빠를 수도 있겠네. 알았어. 2시간만 기다려.”

“아깐 15분이라며.”

“어차피 DB 건들 거면 전에 말했던 엔트리 개별 적용 건 밑 작업도 해두려고.”

그렇게 말한 민준은 상혁에게 변경할 엔트리 목록을 메일로 보내달라고 이야기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상혁은, 2시간 후에 실제 2005년 미국 MLB 선수 목록으로 선수 이름과 데이터가 변경될 것이라 말해주며 테스트 한 후에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한 뒤 팀원들을 돌려보냈다.

혁찬은 미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부실을 나섰다.

안 그래도 재미있는 게임인데, 거기에 실제 선수들의 이름까지 등장하면 절대 재미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물론 MLB의 비싼 라이센스 비를 감당하려면 회사가 꽤나 큰 비용을 지출하게 되겠지만, 어찌됐건 더 재미있는 방향이라면 상혁이 거절할 리가 없을 것이다.

회사에 여유자금이 없는 상황에서도 도박처럼 100억에 가까운 돈을 라이센스 IP띄우는데 쓰는 사람이었으니까.

‘이건 무조건 우리가 옳다. 스포츠 물에서 라이센스를 안 딴 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부실을 나서는 혁찬.

상혁은 그런 기획팀의 뒷모습을 보며 쓴 웃음을 짓고는, 현주를 불러 밀린 결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민준은 자신이 말한 대로 정확히 2시간 후에 엔트리가 변경되었다는 메일을 상혁에게 보냈다.

상혁은 아까 자신을 찾아온 팀원들을 포함하여 현재 테스트에 참하하고 있는 모든 계정에 공지를 띄웠다.

[테스트를 위하여 당분간 오리지널 캐릭터였던 기존 선수 이름 및 능력치를 MLB 2005시즌 데이터로 변경합니다.

실제 선수들이 나오는 버전이니 비교해보고 의견을 게시판에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로그인 하자마자 공지가 뜰 것이다.

상혁은 느긋한 기분으로 피드백을 기다리며, 다시 밀린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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