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취중진담
상혁은 여전히 자신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서연을 옆에 앉혀놓고,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잔에 소주를 따라 한잔 마셨다.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민솔이 한숨을 쉬고는 상혁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서연이 신규 프로젝트 AD자리를 빼앗겨서 많이 힘들어 했다는 것.
그리고 다시 AD자리를 찾기 위해서 혼자 열심히 메카디자인을 공부했지만, 곧 벽에 부딪혀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있었다는 것도.
“그래서 소주 반병 먹고 뻗었다고?”
“더 놀라운걸 알려드려요? 그거 거의 다 제가 먹은 거예요.”
“그럼 한잔 먹고 뻗었다고?”
민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잠깐만, 너 어디가?”
“집에 가야죠.”
“야, 얘는 어쩌고?!”
“사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아, 그리고 가기 전에···.”
그렇게 말한 민솔은 서연을 흔들어 깨우더니 귀에 대고 뭐라고 작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잠에서 깬 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민솔아!”
“그럼 잘해봐~”
“···정말 가 버렸네.”
떠나는 민솔을 보며 상혁이 말했다.
그리고는 눈앞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는 서연을 보며 이야기했다.
“술은 좀 깼냐?”
“···네···.”
“서운하면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오빠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아니 말을 하라는 거지 비난을 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그리고 충분히 섭섭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맞아요. 너무해. 다 오빠 잘못이야!”
“진짜?”
“아뇨. 죄송합니다. 건방졌어요.”
“아냐, 그냥 솔직히 말해.”
상혁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자 서연이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어 이야기 했다.
중간 중간 혀가 꼬부라져 알아듣기 힘들긴 했지만, 서연의 이야기는 결국 ‘왜 자신을 빼고 새 게임을 만드느냐’였다.
상혁이 최대한 달래면서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엔 상혁의 소주잔까지 뺏어서 술을 입에 넣으며 토로 할 정도로, 충격이 매우 큰 것 같았다.
“내가! 옵빠랑! 얼마나! 오래 했는데! 어뜨케 그럴 슈가 있!어!요?!”
“···소리 지르려면 뭘 오래했는지 말하라고! 옆에서 오해하잖아!”
“어?! 내가! 순진한 중학생때부터! 옵빠랑!어?! 내가 얼마나! 그때부터 힘들게 오빠랑 같이! 이거도 하고! 저거도 하고! 했는데!”
“으아아! 오해에요! 같이 게임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변에서 술 먹고 있던 대학생들이 마치 서연의 고함을 듣고 마치 범죄자를 바라보듯 상혁을 바라보자, 상혁은 미친 듯이 변명하며 서연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서연은 그런 상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계속 소리치며 상혁을 비난했다.
“나뉸 내가 튝별해서 상혁 오빠가 나랑 함께 하려꼬 하는 거라고 생각했뉸데! 오빠는 그냥 그림만 잘 그리면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거죠! 내가 매일 열마나 연습했는데!
여 보여요? 어?”
서연이 작고 하얀손을 내밀었다.
거기엔 한눈에 보기에도 확연히 보이는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여 있었다.
“이 쪼꼬만 손에 구든살이 박힐 때까지 열씨미 했뉸데! 옵빠는! 나랑 같이 만들 슈 있는 게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면서! 왜 딴 게임 만든다고 하는 거예요! 이해가 안가!”
물론 알코올의 취기 때문이라고 해도 이 정도까지 섭섭해 할 줄은 몰랐던 상혁은 서연의 이야기를 듣고 당황하며 서연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서연은 상혁이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폭풍처럼 섭섭하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그대로 엎어져 다시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나뿐놈···. 퓨우···.”
상혁은 병바닥에 얕게 남은 소주를 바라보았다.
소주 한 병에 7잔반이라고 하던가. 상혁이 왔을 때 반이 조금 넘게 남아있었고 여기 와서 두 잔을 마셨으니 서연은 추가로 두 잔을 먹었을 것이다.
한잔만 먹어도 뻗을 정도로 취하는 아이가 3잔이나 먹을 정도로 섭섭해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상혁은 잔에 남은 소주를 털어 넣고는 한 번에 마셨다.
“계산이요.”
그리고는 서연을 업고 집으로 향했다.
***
“돼지고기를 사 오랬더니 마리채로 가져왔네.”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준은, 상혁이 서연을 업은 채 온 것을 보고는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시끄러워.”
“김치찌개는?”
“아, 끓여준다고! 좀 도우라고!”
상혁이 말하자 민준은 마지못해 상혁의 등에 업혀있는 서연의 신발을 벗겼다.
잠시 후, 상혁이 주로 철야할 때 자고 가는 손님방의 침대에 서연을 눕히고나오자, 민준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어디가?”
“너랑 철야하려고 온 건데, 방에 손님이 왔잖아. 그러니까 돌아가야지.
if 철야값이 true일 때 자고 가는 게 옵션이었으니 false났으면 집에 가야지.”
“야 이 씨, 그럼 나랑 서연이랑 둘만 남잖아. 네가 있으니까 데리고 온 건데, 네가 가면 어떡해 이 프로그래머 대가리야!”
“그럼 난 어디서 자라고?”
“내방에서 자 인마! 난 거실에서 잘 테니까!”
“김치찌개는?”
“끓여준다고! 들어가서 기다려!”
민준은 자기 말대로 상혁에게 기어이 김치찌개를 얻어먹었다.
정육점이 문을 닫은 시간이었기에 집에 있는 참치를 넣어서 끓이긴 했지만, 워낙 손맛이 좋은 상혁이라 민준은 웃으며 상혁이 차린 밥을 맛있게 먹었다.
“어쩔 거야?”
“내일 해장국 끓여 먹이고 집에 보내고 하루 쉬라 해야지.”
“아니, 그걸 물은 게 아닌데.”
민준은 저녁을 먹으며 상혁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었기에 대충 상황이 어떻게 굴러간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물은 건 AD문제를 어떻게 할 거냐는 거야. 서연이가 메카닉 디자인이 혁진 씨에 비해서 밀리는 건 사실이잖아. 물론 네가 끓이는 해장국이 더럽게 맛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거 가지고 이 문제는 해결 안 될 걸?”
민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상혁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차라리 적당히 하나 프로젝트를 더 하는 건 어때?”
민준이 말했다.
“마리의 눈물 후속 작이라던가, 리마스터를 해도 되고, 아니면 확장팩도 괜찮지.”
“자기 때문에 굳이 프로젝트를 하나 늘리는 건 서연이가 바라지 않을 걸?”
“엄청 신경써주네?”
“팀원이니까.”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일단 내일 이야기를 해 봐야겠지.”
‘우선은 피곤하니까 잘 거야.’ 라고 말하며, 상혁은 거실의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렇게 맞이한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는 편인 상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허리 아파···.’
몸을 이리 저리 돌리며 우두둑 소리가 나게 허리를 핀 상혁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주방으로 가 북어국을 끓였다.
그리고는 그릇에 북어국을 담아 식탁에 놓고 서연을 재워둔 방에 들어갔다.
“아직 자냐?”
거기엔 마치 거대한 애벌레처럼 이불을 돌돌 만 채로 침대위에 누워있는 서연이 있었다.
“아침 먹어.”
“···.”
“움찔하는 거 다 봤으니까 나와서 밥이나 먹어. 어제 술 마시고 뭐라 한건 잊고.”
“···머리 아파···.”
“그래. 원래 술 마시면 머리 아픈 거야. 정상이니까 해장이나 하렴.”
서연이 마지못해 걸어 나오자, 반대편 문이 열리며 민준도 부스스한 머리로 걸어 나왔다.
“아침밥···.”
“알았으니까 둘 다 가서 세수부터 해!”
그렇게 상혁이 두 사람을 닦달한 뒤, 잠시 후 굉장히 어색한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그 어색함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헉! 이거 진짜 맛있다!”
“훗. 쟤가 음식 좀 하지.”
“저는 상혁 오빠 칭찬한 건데 왜 민준 오빠가 뿌듯해 해요? 그리고 왜 둘이 같이 살아요?”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가끔 철야할 때 얘가 내 집 와서 자는 거야.”
“그렇지. 밥도 얻어먹을 겸.”
어제 일 때문에 조금 거북한 마음이 있었던 서연은 금세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고등학생 때부터 늘 함께하던 두 사람이 함께였기에.
“이러고 있으니까 고등학생 때 생각나네요. 자주 부실에서 점심 같이 먹었는데.”
“충격적인거 말해줄까? 그때 내가 먹던 도시락 전부 상혁이가 싸준 거다?”
“헐! 진짜요?”
“그게 계약 조건이었으니까. 민준이를 프로그래머로 쓰는 조건이.”
“하긴 민준 오빠 실력이 괴물이긴 하죠···.”
그렇게 말하던 서연이 ‘나랑은 다르게···’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작은 어깨가 떨리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제의 그 격한 감정이 떠올라서.
“노력했는데···.”
서연이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은, 단지 ‘노력’이라는 두 글자로 표현하기엔 한참 부족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것과, 아예 그리던 그림체를 게임 장르에 맞춰서 뜯어 고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그래도 서연은 묵묵히 불평한번 하지 않고 상혁의 곁에서 그 모든 것들을 해 내었다.
매일 밤을 새며 바로크 시대 의상에 대해 공부하거나, 온갖 책을 뒤져가며 갑옷 그리는 법을 연습하거나 하면서.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메카닉’이란 벽은 너무나 컸다.
선을 쓰는 방법도, 포인트를 주는 방법도 인간과 기계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철판에 뚫린 구멍이 좋은 거라고? 어째서?’
‘관절 사이로 힐끗 보이는 피스톤이 왜 좋은 거야? 안 보이는 게 더 튼튼한 거 아냐?’
그러나 그런 문제들보다 그녀를 괴롭히던 것은, 도저히 로봇의 합체나 변신 같은 동작 원리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눈길도 주지 않았던 변신로봇을 잔뜩 사와서 합체 분해하면서 공부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어떻게 구현되는 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그런 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설계의 원리까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든 그릴 수 있다고, 무엇이든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에게, 그런 벽은 생소하고 큰 벽이었고, 그녀는 결국 배움에 대한 스트레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서연은 자신의 안에서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느꼈다.
자신 대신 신작의 AD를 맡은 남자가, 상혁의 곁에서 그림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능력 부족으로 저 자리에 설 수 없는 자신이 서러워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넘치는 감정이 눈물이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서연은 어느새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자신의 눈물을 깨닫고 양 손으로 눈을 훔쳤다.
그러자 눈가에서 느껴지는 꺼끌꺼끌한 느낌에 더욱 눈물이 차올랐다.
‘이 굳은살이 누구 때문에 박혔는데!’
조용히 서연이 우는 모습을 바라보던 상혁은, 서연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서연에게 말했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냥함을 담아서.
“서연아.”
“흐흑···. 네···.”
뭐라고 해야 할까.
미안하다는 말을 서연이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상혁에 대한 원망 보다는 상혁의 옆에서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자신의 능력 부족에 대한 억울 함이 더 컸을 것이기에.
결국 상혁은, 그런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다른 말을 건넸다.
옆에서 누군가 들었다면, 분명 ‘미친 건가?’라는 반응을 했을 만한 말을.
“너 바보야?”
“흐흐흑···. 네?”
역시나 뜬금 없는 상혁의 질문에 서연이 놀라서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혁은 그런 서연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왜 벌써 포기해?”
“오···오빠?”
“네가 얼마 전에 나한테 말했지? 그게 메카닉 디자인이 되더라도, 절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고. 그건 거짓말이었어?”
상혁의 입에서 나온 상냥한 위로가 아닌, 매몰찬 비난을 들은 서연의 안구에 다시 눈물이 차 올랐다.
“나도···. 잘 하고 싶은데···.”
“그럼 잘 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쉽냐고요!”
결국 서연이 폭발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걸 어떡하란 말이에요! 사람들이 저걸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디자인을 할 수 있겠어요!? 난 못한다고요!”
“넌 할 수 있어!”
“오빠가 뭘 알아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요?!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왜 그 고생을 하면서 노력했는지도 모르면서!”
“그건 몰라도 하나는 아니까 이야기 하는 거라고!”
“그게 뭔데요!”
“니 재능이 압도적이라는 거!”
상혁을 보며 고함을 지르던 서연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상혁은 그런 서연에게 계속 큰 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진즉에 이야기 했어야 할, 하지만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AD의 재능이란 게 단순히 그림 잘 그리는 건줄 알아? 천만에! 그게 AD의 재능이라면 램브란트나 고흐도 AD의 재능이 있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고! AD의 진짜 재능이란 건, 필요한 디자인을 필요할 때 뽑는 능력이고 넌 그 재능을 타고 났어!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항상 내가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생각해서 내 예상보다 좋은 결과물을 가져오고, 자기 그림체를 포기하고 새로 공부하면서까지 게임 자체를 이해하고 게임에 맞는 아트웍을 뽑아내는 재능! 그게 네 재능이라고! 그리고 그건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원화가보다 네가 더 뛰어나!”
살짝 언성을 높혔던 상혁은 이윽고 조용히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 나도 네가 그런 노력을 하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너한테 AD를 안 맡긴 거야.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절대적으로 믿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난 네가 마음만 먹으면 두 달! 딱 두 달 안에 지금 AD인 혁진씨보다 서연이 네가 더 내 마음에 드는 메카닉 디자인을 뽑을 수 있다고 절대적으로 믿고 있어. 혁진 씨가 지금 그리는 건,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이지 우리 게임을 위해서 그린 그림이 아니니까!”
상혁의 이야기를 들은 서연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멈춰있었다.
그러나 서연이 상혁에게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서연의 옆에서 조용히 두사람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나도 밥 같이 먹고 있는데···.”
말을 건 것은 그가 여기 있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민준의 목소리였다.
“아···. 오빠, 미안해요.”
서연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채 급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서연을 따라 상혁이 자리에 앉자, 서연이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상혁에게 물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자 상혁대신 민준이 서연의 질문에 답했다.
“어. 쟤는 그럴걸. 우리 팀에서 재능의 순위로 따지면 제일 능력치가 높은 게 너라고, 나한테 몇 번 이야기 했었으니까.”
“진짜요?”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겠니. 심지어 내 코딩 재능보다 네 AD로써의 재능이 더 크다고 하던 놈인데.”
민준의 말에 서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민준의 괴물같은 실력을 서연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민준의 말을 듣고 잠시 기뻐하는 마음을 갖던 서연은, 다시 현실을 돌이켜 보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두 달은 무리에요. 저한테 그 정도 재능은 없어요···.”
“내가 봐도 두 달은 무린데···.”
“그럼, 두 사람 나랑 내기 할래?”
상혁이 묻자 서연은 등골이 싸늘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바로 손사레를 쳤다.
“오빠랑은 내기 안 해요!”
“너랑은 내기 안 해!”
두 사람 다 상혁에게 내기를 건 원준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알기에, 내기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격한 반발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상혁은 조금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볼을 긁으며, 서연을 향해 말했다.
“좋아. 그럼 내기는 그만두고 도전이라고 하자. 나랑 같이 두 달 정도 메카닉 디자인 공부를 하고, 두 달 후에 혁진 씨랑 주인공 로봇 디자인으로 승부를 보는 걸로.”
“저, 자신 없는데···.”
“내가 있어.”
상혁이 웃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뭐 한다고 했을 때 안 된 적 있었냐? 날 믿어. 널 믿는 널 믿지 말고 널 믿는 날 믿으라고.”
“너 임마 그거 그렌라···.”
“쉿.”
민준이 뭐라 하려는 것을 막은 상혁이 서연을 보자, 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해볼게요.”
“그래. 그래야 우리 AD지.”
“그래도 두달은 진짜 무리일 것 같은데···. 제가 오빠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진짜 무리 같아서···.”
“당연히 지금 상태로는 무리지.”
그렇게 말한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었다.
“어디에 전화 거세요?”
“스승님 찾으러.”
잠시 후, 상혁이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군지 밝혀졌다.
-아, 모시모시? 나츠 씨? 접니다. 이상혁. 오랜만이에요.-
지난 번 타이프-문과의 협업 이후로 다이나믹한 일이 없어 지루해하던 나츠는 휴대폰에 상혁의 번호가 뜨자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상혁이 연관된 일이면, 대개 상상을 초월하는 재미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물론 거기에는 매번 뭔가 부탁할 때마다 푸짐하게 찔러주는 상혁의 커미션도 적잖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아, 상혁 씨! 무슨 일이세요? 또 뭔가 준비하시나요?-
-예. 부탁드릴게 하나 있어서요.-
-말씀만 하세요.-
-혹시 번다이쪽이랑 컨텍 가능할까요?-
-번다이면···프라모델 회사 번다이 말씀하시는거에요?-
-예. 그쪽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아마 가능할거에요. 그쪽에 직접 아는 사람은 없지만, 제가 예전에 번프레스토 쪽하고 일한 적이 있어서요.
그런데, 최종적으로 누굴 만나고 싶으신 건데요?-
-가토키 하지메 씨요.-
상혁이 만나고 싶다고 한 사람.
그 사람은 번다이에서도 수많은 메카디자인을 하며 VER.KA 라는 독립 디자인 레이블까지 가지고 있는 전설의 메카 디자이너.
가토키 하지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