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향상심
상혁은 콘테스트 진행에 앞서, 제출한 결과물의 퀄리티 차이에 의한 편중현상을 막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제출된 결과물이 어떤 것이든 상혁과 민준이 함께 알파버전까지는 완성 해 주는 것.
그리고 추가로 정리가 덜 된 아이디어의 경우 상혁이 원안자와 협력하여 완성된 형태의 기획서로 공개하는 과정을 추가했다.
기존에 제출된 기획서도 물론 상혁이 전부 다시 작성하는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제출된 게임은 각각 ‘컨셉아트’ ‘알파 빌드’ ‘아이디어 노트’ ‘기획서’ 등의 다양한 포맷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콘테스트에 공개된 게임 포맷은 전부 상혁이 작성한 기획서를 포함한 알파빌드가 들어간 결과물로 통일 되었다.
제출자나 팀 멤버 구성은 비공개인 상태로.
거기에 더해, 상혁은 제출 팀의 구성 멤버의 투표권한을 박탈함으로써 팀 규모를 키워서 발생하는 어뷰징을 막았다.
그러한 여러 가지 장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출된 작품을 보면 대략적으로 제출한 팀의 인적 구성을 예측할 수 있었는데, 각 멤버가 주력으로 하는 분야에 따라서 제출된 결과물의 퀄리티가 좋은 부분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서연이 그래픽팀의 원화가들과 함께 제출한 결과물은 게임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어떤 ‘분위기’의 컨셉 아트 모음이었다.
주로 ‘판타지 일러스트’하면 생각날 법한 느낌의 그림 모음이었지만, 그림 곳곳에 깊이가 느껴지는 다양한 오브젝트들이 포진되어 있어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험심이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의 월드를 표현한 결과물.
좋은 결과물이었지만 상혁이 보기엔 조금 아쉬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월드 오브 ○크래프트 보다 깊이가 약간 떨어져···.’
아무래도 원화가를 중심으로 뭉친 팀이다 보니 비주얼적인 깊이는 강조할 수 있었지만 설정 적인 깊이에서 약간 빈약한 느낌이 있었다.
차라리 지수를 데려다가 함께 팀을 꾸렸으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상혁은 다음 작품을 열었다.
성연은 사운드 파트의 다른 작업자들과 리듬게임 기획을 내놓았는데, 매력적인 오리지널 곡이 많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기존 리듬 게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시선을 끄는 기획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획이 있었지만, 상혁은 두 개의 기획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았다.
민준이 어드바이스 한 게 분명한 로봇 소재의 전략 시뮬레이션이 1개.
그리고 상혁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황당한 기획이 1개.
제안서 제목부터가 ‘직장에서 몰래 하기 좋은 게임’ 인 제안서에는, 대표자 이름에 놀랍게도 이제까지 제대로 기획회의에 참여한 적 없는 현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다른 PTW팀원들도 다들 게임을 좋아하지만, 현주는 적어도 상혁과 민준을 제외하면 게임을 좋아하는 마음은 자신이 팀원 중에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비록 서연처럼 그림을 잘 그리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성연처럼 작곡의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개발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순 없었지만, 그녀는 매번 회의 때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아이디어를 삼켜가며 속으로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상혁이 현주를 챙겨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팀 내에서 하는 일이 조금 애매한 경향이 있었어도, 상혁은 성과급부터 연봉까지 그녀에게 모든 부분을 다른 팀원들과 공평하게 적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대우를 받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같이 게임을 만들고 싶어.’
그러던 와중 찾아온 기회.
상혁의 제안으로 시작된 아이디어 콘테스트는 그녀가 그토록 꿈꿔왔던 바로 그 기회였다.
‘이런 거라면 기획서를 쓸 줄 몰라도 아이디어만 잘 정리해서 내면 어떻게 될지 몰라.’
잘 되지 않아도 좋았다.
그녀는 단지 상혁에게 자신도 게임을 이만큼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다.
애당초 상금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상혁이 한명, 한명 면접을 보며 심혈을 기울여 뽑은 PTW의 직원들은, 설사 그게 QA 인원이든 백 앤드 전문가든 전부 게임을 사랑하는 전문가들로 가득했으니까.
정말 천의 하나, 만의 하나라도 자신의 아이디어가 선정 된다면, 그녀는 상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자신은 지금 받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과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래도 됐으면 좋겠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게임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좋다고 칭찬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열심히 정리한 아이디어를 상혁에게 메일로 보냈다.
[내가 짠 아이디어인데, 어떤 거 같아?]
원래대로라면 상혁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건 반칙이지만, 그녀가 혹시나 해서 보낸 메일에 상혁은 바로 답변을 보냈다.
[RE: 잘 다듬으면 엄청나게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주변의 다른 직장인들에게 의견을 구해보세요.]
그날 이후로, 그녀는 다른 직원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했고, 몇몇 직원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그녀도 자신만의 ‘팀’을 꾸릴 수 있었다.
비록 구성원 중에는 게임 개발자가 없어 제대로 된 기획서도 작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현주는 나름 상혁의 기획서를 보며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열심히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갔고, 결국 마감이 되기 직전에 결과물을 제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어진 상혁의 호출.
부실에서 현주를 기다리고 있던 상혁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를 준비해 놓고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와 공개용 버전의 개발에 대한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설마 선생님이 팀을 꾸려서 아이디어를 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아이디어를요.”
“고마워···.”
현주가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상혁은 눈치 채지 못한 듯 그녀가 작성한 제안서를 들어보였다.
“뭣보다 메인 아이디어가 재미있네요. 직장에서 몰래 할 수 있도록, 메모장, 엑셀, 워드 등의 스킨을 변경하며 그래픽 없이 텍스트로만 진행되는 게임을 서비스한다. 이건 확실히 끌리는 아이디어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상혁이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게 나한텐 가장 기쁜 것 같아. 이제 1등 같은 건 상관없을지도?”
“무슨 소리에요. 여기까지 노력하셨는데 1등 하셔야지. 제가 그래서 부른 거기도 하고요.”
“어? 그게 무슨 의미야?”
“텍스트 기반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신 건 대단한데, 기본 베이스가 너무 게임 북 스타일이에요. 이대로 만들면 게임이라기보다는 선택지 달린 텍스트에 가깝겠죠. 뭐, 그것도 게임이라면 게임이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현주의 앞에 프린트를 내밀었다.
“이건 제가 선생님의 아이디어를 보고 원래 살리고 싶어 하시는 의도를 추정해서 다시 만든 기획서예요. 보시고 선생님 아이디어랑 의도가 다른 부분이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어? 직접 개입은 안 하는거 아니었어?”
“그렇게 하면 게임 기획에 익숙한 기획자나 알파 빌드 완성에 가까운 프로그래머가 너무 유리하죠. 애당초 공모전 자체가 아이디어를 대상으로 한 거니까, 아이디어만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기획자가 손을 좀 봐주는 게 좋겠죠. 마찬가지로 선생님 팀에는 프로그래머도 없으니 알파 빌드는 민준이 만들어 줄 거예요.”
“아···. 다른 팀도 해 주는 거야?”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며, 현주가 말하자 상혁이 답했다.
“네. 기획형태로 제출된 건 알파 빌드를, 시나리오 형태로 제출된 건 컨셉아트 랑 기획서랑 알파 빌드 지원하고 선생님처럼 아이디어로 제출한 경우는 나머지 다 손 봐서 나갈 겁니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제출물이 기획서/컨셉 아트/알파 빌드 이렇게 홈페이지에 게시해서 투표로 순위를 판단할 거예요.”
“아···. 전부 해주는 거구나···. 그게 공평하지. 맞아.”
상혁이 타준 커피를 홀짝이며, 그녀가 기획서를 넘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커피를 내려놓고는 기획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진지하게 내용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야구?’
원래 그녀가 냈던 아이디어 원안은, 일종의 게임북 형태의 텍스트 기반 어드벤처 게임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신은 숲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길을 헤매던 당신은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을 보고 고민합니다.
왼쪽 길은 사람이 아예 다니지 않은 듯 길에 풀이 무성하고 드리운 나무 그림자로 인해 음산한 기분이 듭니다.
오른쪽 길은 최근에도 사람이 지나간 듯 마차 자국과 잘 정돈된 길이 있지만 불어오는 바람에서 옅은 피 냄새가 느껴집니다.
여기서 당신은···.]
[1.왼쪽길로 간다]
[2.오른쪽 길로 간다]
현주가 만든 게임이 이런 느낌이었다면, 상혁이 보완한 형태의 게임은, 단순히 선택지를 넘어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의 느낌이 강했다.
그것도 그냥 시뮬레이션이 아닌, 스포츠 시뮬레이션.
[배트를 바꾸러 가면서, 평소에 휘두르던 배트보다 1온스정도 무거운 배트를 가져왔다.
상대 구위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아서 피쳐-
-좌투좌타, 선발투수-
-배트 크러셔, 직구 장인, 강철 멘탈-
-구속:S 제구:B 체력:B [status]-
다시 봐도 전형적인 직구 바보.
방금 배트가 부러질 뻔 한 것을 봤으니 손맛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이번 타석에서···
[공을 보낸다] [힘껏 휘두름]
[포인트를 노림] [고의 헛스윙]
···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스트-라이크!”
실수다.
노림수를 읽혔는지 존에서 공 3개는 빠지는 볼이 들어왔다.
내 뒤에 선 포수가 날 보고 실실 쪼개는 것이 느껴진다.]
“뭔가 엄청 소설 읽는 느낌인데.”
“맞아요. 정확하시네요.”
상혁이 만든 것은, 굳이 말하면 회귀 전에 유행하던 ‘스포츠 웹소설’을 게임으로 만든 느낌이었다.
상대의 스탯이나 게임 상황에 따라 미리 준비한 문장이 출력되고, 소설을 보는 기분으로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게 만든 것.
비록 텍스트가 출력 방식의 전부였지만, 상혁은 그 안에 아이템이나 스킬 등 다양한 시스템을 넣어 일반적인 스포츠 게임이 아닌, 특수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MLB를 정복하는 느낌의 판타지 스포츠 스타일의 텍스트 게임으로 현주의 아이디어를 개조했다.
“표현은 텍스트로 하게 되지만, 실제 내부는 완벽하게 돌아가는 야구 게임 시뮬이에요. 경기 분위기가 몰리면 팀원들이 실망하거나 관객들이 야유하는 묘사를 그래픽이 아니라 텍스트로 출력하고, 상성이 안 좋은 상대나 약점이 있는 상대에 대한 것도 텍스트로 출력하죠."
기획서를 짚으며 상혁은 설명을 이어 말했다.
"단순히 운에 맡겨서 선택지를 고르는 게 아니라, 상대의 능력치나 현재까지 몇 구를 던졌는가, 주자가 나가 있는가, 상대의 심리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선택지를 골라야 해요. 기본적으로는 야구를 모르는 사람도 소설 읽는 기분으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게임으로 잡고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원래는 단순하게 ‘메모장 스킨’이 있는 텍스트 어드벤처 스타일의 게임 아이디어를 가져온 현주는, 상혁이 고친 기획서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텍스트를 게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짰다면, 상혁은 아예 완성된 야구 게임에서 그래픽만 텍스트로 교체한다는 발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상혁이 회귀 전에 스포츠 웹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발상이긴 했지만, 그것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자신과 상혁의 게임에 대한 레벨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녀가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상혁이 개조한 버전이 완벽하게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난 좋아. 솔직히 상혁이 네가 고친 게 더 게임 같아. 솔직히 야구는 잘 몰라서 좀 그렇긴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상혁이 말했다.
“야구를 몰라도 야구에 빠질 만큼, 매력적인 게임이 될 테니까. 그리고 이건 하나의 예일 뿐이에요. 같은 시스템으로 축구 게임도 만들 수 있고, 판타지 게임도 만들 수 있겠죠. 전, 선생님이 가져온 아이디어의 확장성이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 이런 게임이 있다면, 회사에서 하루 종일 읽으면서 푹 빠지는 직장인이 생길 거라고 믿어요.”
“그럼 정말 멋질 거 같아. 돈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게 제출자의 역할. 그걸 성공시키는 건 책임자인 제 역할이겠죠. 선생님은 충분히 역할을 잘 하셨습니다. 꼭 1등 하길 마음속으로 빌게요.”
상혁이 웃으며 말하자, 현주가 얼굴을 붉히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상혁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상혁이 준 기획서를 품에 꼭 안고 부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 뒷모습을 보던 상혁이, 작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핵심 아이디어는 저게 제일 좋은 거 같긴 한데···. 다음은 민준이가 밀어주는 로봇물 차례인가···.”
상혁은 노트북을 펴고 제출된 알파 빌드를 플레이 했다.
중간마다 민준이 대놓고 이것저것 물어보기에 어렴풋이 뭔가 만들고 있구나 하고 짐작은 했지만, 제출된 결과물이 생각 이상이라 상혁은 내심 놀란 상태였다.
‘아이디어가 아니라 추구하는 중심 재미가 확실하게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제출자 이름이 민준의 부사수인 민솔이라는 것.
이제까지 회의에서 한 번도 자기주장을 한 적이 없는 민솔이 ‘만들고 싶은 게임’을 제출한 모습을 보며, 상혁은 이번 콘테스트를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두 번째 우승후보와 면담을 해볼까.”
마침 시간도 적당하게 다음 미팅으로 잡은 시간이었기에, 상혁은 홍차를 내린 뒤 민솔을 기다렸다.
팀 내에서 유일하게 커피를 마시지 않는 멤버가 민솔이라서.
그리고 잠시 후, 부실을 채우고 있던 기분 좋은 커피향이 그윽한 홍차향으로 변하기 시작할 즈음에, 방 저변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저 민솔인데요.”
“어. 들어와.”
상혁의 말을 들은 민솔이 방으로 들어왔다.
언제 나처럼 깨끗하지만 편해 보이는 츄리닝 복장에, 왜 저렇게 큰 안경을 쓰는지 이해가 안가는 거대한 뿔테 안경을 쓴 채로.
“잘 왔어. 민솔아.”
상혁이 홍차를 내밀며 말했다.
“그럼 이제 네가 제출한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