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Just do it
상혁이 도쿄에 다시 방문한 것은 회의가 있고 일주일 정도 후의 일이었다.
그동안 애니 제작사나 타이프-문 측과 법적 서류도 각각 준비해야했고, 상혁도 개발 업무로 바빴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머지 팀원들이나 새로 뽑은 직원들에 대해서는 느긋한 페이스로 개발 하도록 이야기 해 놓은 상혁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개발 외적인 일 때문에 시간을 많이 쏟고 있었다.
‘전문 CEO라도 하나 뽑던가 해야지.’
속으로 투덜대는 상혁의 곁에는, 이번에도 억지로 끌려나온 민준이 있었다.
“지금은 피곤하지도 않은데 왜 끌고 가냐?”
라는 민준의 질문에 상혁은 저쪽이 영혼의 콤비니 이쪽도 영혼의 콤비가 가야한다는 이상한 이유를 대며 오기 싫다는 민준을 억지로 끌고 왔다.
그러나 싫어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민준은 상혁이 홀로 느끼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이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결국 일본으로 향하는 상혁의 뒤를 따라 온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4사람이지만 이전의 만남과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나슈의 허리를 붙잡고 뒤쪽에 바짝 붙어있는 지수의 모습이 그러했는데, 상혁이 그 모습을 보고 약간의 질투를 느낄 정도로 친해진 모습이었다.
“야, 넌 원래 우리 직원이잖아. 왜 남의 회사 직원 뒤에 숨어있냐?”
“남의 회사 직원이 아니다! 스승님이다!”
“시끄럽고 이쪽으로 오라고. 너 데리고 한국 가서 졸업식 가야하니까.”
“으아앙! 싫다. 스승님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아아!~~.”
“이리 와 이 배신자 녀석!”
결국 상혁이 지수의 허리를 붙잡고 강제로 떼어내고 나서야, 상혁은 정상적인 회의 진행을 할 수 있었다.
회의 장소 저편에 훌쩍이는 지수를 서연이가 달래고 있는 상태로.
그렇게 조금은 어수선하면서 재미있는 분위기에서 시작된 회의는, 모두의 관심사가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합의점을 찾아내며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의 어떤 리소스든, 저희 쪽에서 게임에 삽입할 수 있다는 거군요?”
“필요하시다면 원작전용으로 오프닝을 편집해서 제공해드리죠.”
“대신 이쪽에서는 원작 캐릭터에 맞는 성우라던가 애니용으로 각색된 시나리오를 제공하는 조건으로요?”
“맞습니다. 제작비는 전액 저희 쪽에서 댈 거고요.”
“다시 이야기하는 거지만 정말로 지금 조건으로 괜찮으시겠어요? 독점 IP이용권도 이정도로 조건이 후하지는 않을 텐데요.”
“저는 이 IP로 타케우지씨가 나중에 더 멋진 게임을 만드실거라고 믿습니다. 원작 팬으로써, 단지 앞으로 무한히 확장될 페○트의 캐릭터를 저희가 빌려 쓸 수 있는걸로 만족합니다.”
“저희로써는 거절할 이유가 없네요.”
그렇게 기존에 구두로 협약되어있던 부분에 대한 협의가 진행되며, 서로 법적 서류에 대한 날인을 마친 뒤, 회의의 아젠다는 본격적인 추가 요구사항에 대한 부분으로 넘어갔다.
“저희는 원작 초기 발매 시부터 성우 더빙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어차피 애니메이션도 동시 제작하려면 성우진은 필요할거고요.”
“그것도 좋습니다. 다만 원작쪽이 시나리오나 대사가 더 방대하니 원작쪽의 더빙 비용에 대한건 저희쪽에서 부담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애니메이션 더빙 부분의 비용을 지불하는 걸로 합의하시죠. 다음 안건은 조금 곤란하실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만···.”
곤란한 듯 이야기를 꺼내자 타케우지는 순간적으로 ‘다행이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풀었지만 상혁은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상혁이 알고 있기로, 이쪽에서 ‘곤란한 부탁’을 꺼냈을 때 상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경우는, 오직 상대도 ‘곤란한 부탁’에 해당하는 안건을 가져온 경우 외에는 없었다.
상혁은 굳이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은 채, 먼저 자신이 부탁할 안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저희 쪽에서 부탁드릴 건 지금 19금으로 개발 중이신 원작을 전연령판도 동시발매 해 주십사 하는 겁니다.”
“전 연령 판을요?”
타케우지가 물었다.
애당초 비쥬얼 노블 이라는 장르 시장 자체가 전 연령으로 성공하기 힘든 시장이기에, 상혁의 이야기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원작에서 선정적이어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에 대체 씬을 넣고 전 연령 유저가 즐길 수 있는 버전을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곤란한 부탁치고는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요. 판매량은 확실히 알기 어렵긴 하지만, 제작 자체라면 무리가 가는 볼륨은 아닐 겁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해주신 것을 감안하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죠.”
그렇게 말한 타케우지는 잠시 입을 다물고는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마치 이야기하기 힘든 것을 이야기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나슈가 타케우지의 옆구리를 찔렀고, 타케우지는 한숨을 쉬고는 상혁에게 자신이 가져온 ‘곤란한 부탁’에 대해 털어놓았다.
“사실 저희 측에서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체험판이지만 원작을 해보고 시스템에 매력을 느꼈다고 하신 상혁 씨니 이야기할 수 있는 거지만, 지금 상혁 씨가 만들고 있는 게임의 지향점이 저희가 만들고 있는 원작의 지향점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듭니다.”
“흠···. 그렇겠죠. 원작은 배틀로얄이라기 보다는 넓은 맵에서 며칠 동안 숨바꼭질을 하는 느낌이고, 저희가 만든 유즈맵은 캐릭터만 빌려 쓸 뿐 서번트 배틀을 하는 느낌이 강할 테니까요.”
“거기까지 파악하셨습니까?”
타케우지가 감탄하자 상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말했잖습니까. 원작의 팬이라고.”
“그럼 왜 원작하고 거리가 있는 시스템을 굳이 채용했는지 물어도 될까요.”
“그건 원작이 배틀로얄에 맞는 컨셉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전투 자체는 배틀로얄의 빠른 템포에 어울리지 않아서입니다.”
상혁은 자신이 파악한 원작의 전투 느낌과, 어째서 자신이 유즈맵에서 그러한 형태로 어레인지를 한 것인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타케우지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합리적인 설계에 기반을 둔, 해당 타겟 유저가 가장 즐거워할 수 있는 형태의 게임을 고심해서 만든 것 같은 그런 느낌의 기획이었다.
“유즈맵에서 본편으로 가면 그런 식의 업그레이드까지 생각하고 계신 거군요.”
“필요하시면 기획서를 보내드리죠. 번역은 지수에게 시키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한 타케우지는, 옆에 있는 오랜 친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유가 저렇다면 이쪽에서 무리해서 요구할 수는 없어. 아무리 원작하고 거리가 있다하더라도 말이지.”
그러자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나슈가 입을 열어 상혁에게 말했다.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주로 대화를 주도하던 타케우지 대신 나슈가 입을 열자 상혁은 내심 놀라며 물었다.
“뭐가 다른가요?”
“성배전쟁은 단순히 서번트의 성능차를 가리는 대결의 장이 아닙니다. 마스터와 서번트가 쌓아온 유대감, 그리고 상대에 대한 파악, 함정을 파고 계략을 짜며, 때로는 도망가고 때로는 타인과 손을 잡는 모든 과정의 집합체죠. 욕심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만약 제 캐릭터가 다른 게임에 등장하는 거라면, 원작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유대감을 유저도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슈는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했다.
“혹시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모드를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상혁도 물론 나슈와 타케우지가 만든 페○트 원작의 팬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애당초 그 어마어마한 비용을 써가면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던가 하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테니.
그러나 아무리 원작의 팬이라 하더라도, 게임 장르에 맞지 않는 원작의 재미를 재현해달라는 나슈의 요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부탁임에 틀림없었다.
애당초 원작의 경우는 맵 제한도 없고 시간제한도 없이 도시크기의 넓은 맵에서 하염없이 서번트와 시간을 보내며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싸우는 게임이었다.
그것도 압축된 시간이 아니라 실제 시간을.
게임 한판 하는데 자는 시간을 포함해서 일주일을 꼬박 써야한다면, 누가 그 게임을 하겠는가.
옆에서 듣고 있던 민준 역시 지금 나슈가 하는 요구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저건 반지의 제왕 영화를 풀 볼륨으로 만들어달라고 하는 꼴인데.’
만약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내용을 실시간으로 표현하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x월 x일. 오늘은 하루 종일 걸었다.’
‘x월 x일. 오늘은 하루 종일 걸었다.’
‘x월 x일. 오늘은 하루 종일 걸었다.’
그리고 그 제안이 무리인 것을 알고 있는 민준과 마찬가지로, 제안을 하고 있는 나슈 역시 그 안에서 유저가 하루 종일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무언가의 시스템을 채워 넣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원작에서도 그런 지루한 부분들은 스킵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어쩌면···.’
원작은 정해진 텍스트에서 선택지 외에는 다른 행동 방법이 없는 비쥬얼 노블이었다.
그러나 상혁이 만든 유즈맵은 그런 장르의 한계를 넘어, 마스터가 서번트를 소환했을 때의 두근거림, 클래스가 결정되고 나온 서번트와 함께 순간적으로 전투 계획을 짜는 등의 플레이가 충실하게 재현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혁의 유즈맵을 플레이하며, 나슈는 ‘이거보다 조금 더 원작에 가까운 게임을 해보고 싶다’라는 욕망을 품게 되었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실제와 가깝게 체험해보고 싶다는 욕망.
실제로 서번트와 마스터가 힘을 합치고 마스터끼리 팀을 맺거나 맵을 탐색하고 서번트와의 유대감을 쌓는 경험을 게임으로 플레이 할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매우 즐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런 게임이 있으면 해보고 싶다.’ 라는, 순수하게 자신이 만든 세계를 사랑하는 유저의 입장에서, 나슈의 목소리는 상혁이 그런 게임을 만들어주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전에 회의하실 때 지수의 옆에 있어서 저도 내용을 들었습니다. 나중에 지수에게 무슨 내용이었는지 물어보긴 했지만요. 그때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죠. 서로 각자의 강점이 다르며, 저희 쪽에는 IP를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상혁 씨의 게임을 보며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PTW에는 게임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요.”
“그래서, 원작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비쥬얼 노블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 똑같이 느낄 수 있게 해달라는 거군요?”
“예.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냥 단순히 제 욕심일수도 있죠. 하지만, 만약에 이게 가능한 팀이 있다면, 저는 그게 PTW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슈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입을 다물었자, 타케우지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상혁에게 말했다.
“저도 나슈와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물어보기나 해보자’ 정도의 안건이었습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저도 그 게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절대 강제적인 건 아닙니다. 지금 만들고 계신 게임으로도 원작 서번트나 마스터의 매력은 충분히 전달된다고 생각하니까요. 만약 불가능하다고 하셔도 지금의 계약은 계속 유지 할 겁니다.”
상혁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마치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민준은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 상혁을 바라보며 속으로 소리 질렀다.
‘설마 받을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니가 원작의 팬이라도, 이런 건 받으면 안 돼···.’
그러나 민준의 불길한 예감이 마치 복선이라도 된 것처럼, 고민하던 상혁이 고개를 들었을 때, 상혁의 표정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했을 때의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재밌겠네요. 원작 느낌을 그대로 살린 배틀로얄을 만들어달라고 하시는 거죠?”
‘야이 미친놈아. 그건 안 돼!’
민준이 다시 속으로 외쳤지만, 텔레파시를 할 수 없는 상혁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상혁이 활짝 웃으며 나슈에게 말하는 목소리만이, 카페에 힘차게 울려 퍼질 뿐 이었다.
“까짓 거 한번 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