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그걸 버린다니 당치도 않다!
구로의 한 게임 개발사.
스타트업다운 깔끔한 인테리어로 구성된 사무실 안에서, 원준이 짜증나는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모니터, 거기엔 ‘전쟁크래프트3’의 유즈맵 매칭 화면이 떠 있었고, 새로 고침을 누를 때마다 수많은 방들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원준에게 깊은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었다.
-배.틀.로.얄 초보만 7인 선착-
-배틀로얄 쌉고수방. 초보 강퇴-
-배틀로얄 빠르게 한 겜 ㄱㄱ-
-2페이즈 전 pk금지 배틀로얄 퀵방-
-아까 배틀로얄 같이 하신 분들 들어오세요. 비번동일-
상혁이 계획한대로, 아직 전설의 유즈맵 ‘Defense of the Ancients(이하 DOTA)’가 발매되기 전 빈자리를 찌른 배틀로얄 유즈맵은 매우 빠른 속도로 전쟁 크래프트의 유즈맵 판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제는 유즈맵 방의 80%가 배틀로얄 방으로 도배될 정도.
거기에 상혁이 배포한 공식 맵 외에 개조맵까지 성행하면서 현재 전쟁크래프트3의 매칭 화면은 말 그대로 ‘배틀로얄 광풍’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원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런 젠장!”
원준이 들고 있는 마우스를 바닥에 내리치며 소리쳤다.
플레이? 당연히 해 보았다.
쉽게 플레이에 접근 가능하면서 숙달될수록 게임의 깊이가 느껴지는 특유의 게임 디자인 때문에 원준도 플레이하면서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마치 게임이 시간을 뛰어넘어 미래에서 온 것 같다.’
준표가 마리의 눈물을 플레이할 때 느꼈던 감정과 같은 느낌을, 원준은 ‘배틀로얄’을 플레이하며 느끼고 있었다.
마치 중간 고리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공룡 화석을 보는 느낌.
완성된 게임을 보고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게임의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 원준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또 그거 보는 거야?”
형민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다가와 묻자, 원준은 허리를 펴며 한숨을 쉬었다.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잖아요.”
“그냥 우리 할 일에만 집중하자고. 그쪽하고 우리는 장르부터 달라. 우린 MMO고 그쪽은 MO 게임이지. 우린 부분유료화고 그쪽은 패키지 게임이야. 그쪽 유저가 늘어난다고 우리 쪽 유저가 줄지는 않을 거라고.”
“다음 공개 때도 패배하는 이미지가 잡히면 우리 게임은 타 장르에 발려버린 이상한 게임이 될 거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래서 지금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거잖아?”
형민의 말에 원준은 고개를 들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VC에서 투자를 받은 이후로 급격하게 늘린 신규 인력들이 말 그대로 정신없이 일하는 모습이 원준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음 대결은 니 말대로 100% ‘완성도’를 겨루는 대결이 되겠지. 그럼 유즈맵 따위를 만드느라 인력과 시간을 소모한 저쪽보다는, 처음부터 한 게임만 집중적으로 개발한 우리가 훨씬 유리하지 않겠어?”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고마워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그래. 자신을 가지라고, 뭣보다 이번에 힘줘서 만든 직업 스킬들은 진짜 다른 게임하고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만큼 멋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형민이 가슴을 탕탕 두드리자, 원준이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에요. 적어도 지난번에 나왔던 유즈맵 캐릭터보다는, 저희 스킬이나 액션이 훨씬 멋지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무려 통상적인 연봉보다 30%이상을 높게 주면서 불러온 초 고급 인력들을 모델러와 애니메이터로 고용하면서, 현재 원준이 개발 중인 게임의 퀄리티는 비약적으로 올라가 있었다.
적어도 상혁이 이전의 시연때 보여준 유즈맵 정도의 퍼포먼스는 가볍게 압살할 정도로.
원준은 ‘전쟁크래프트3’를 끄고 모델링 툴을 열어 오늘 받은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재생하면서, 다음에야말로 자신의 승리가 확실할 거라 확신했다.
‘질 이유가 전혀 없다.’
한편 비슷한 시기 상혁이 소집한 PTW팀원들은 다 같이 모여 우포테이블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데모를 감상하고 있었다.
물론 현재 일본에 가 있는 지수와 서연은 미리 상혁이 보내준 데모를 감상한 상태로 원격으로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그리고 상혁이 영상의 시연을 마치자, 팀원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영상의 퀄리티를 떠나서, 상혁이 저걸로 뭘 하려는 건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상혁아?”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나마 팀에서 나이가 좀 있는 편인 성연이었다.
“혹시 저거 진짜로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지?”
“맞는데요?”
“저거 얼마 들었어?”
잠시 고민하던 상혁은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1억이요.”
“뭐?! 1분 30초짜리 만드는데 1억이라고?”
“원래 한번에 2쿨 짜리 만드는 것보다 데모가 시간 단위 당 단가가 더 비싸요. 이 작업을 위해서 아예 셋팅을 새로 해야 하니까. 자동차도 컨셉트카가 제작비가 더 비싸잖아요.”
“뭐, 근데 퀄리티 진짜 좋긴 하네···. 저걸 애니로 만들고 싶은 거야?”
“솔직히 저건 대놓고 맥시멈 퍼포먼스를 보여 달라고 요청해서 만든 거니 애니 전체를 저 퀄리티로 힘줘서 만드는 건 무리죠. 본편은 전투씬만 힘 빡세게 주고 일반 신은 좀 깎아서 들어갈 거예요.”
“그래서, 최종 가격은?”
“화 당 3억원. 24화 78억.”
상혁의 말에 성연이 들고 있던 펜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치···칠십 팔억? 제정신이야?
그 정도면 나이츠 어셈블로 번 돈을 다 밀어 넣어야 할 텐데?”
성연의 말에 상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X-BOX판에서 번 수익만 말하면 그렇죠. 지금까지 중2병 배틀러랑 코넥트 개발하면서 쓴돈, 그리고 이번에 배틀로얄 유즈맵 만들면서 쓴 돈도 상당하니까요. 사실 그거랑 지금 연봉, 외주비 나가는 거 계산하면 저흰 몇 년 후엔 파산이에요.”
“그런데?”
“PC판 수익이 제법 괜찮게 나왔거든요. 기존에 체험판으로 ORPG하던 유저들이 대거 이동해서, 꽤 높은 수준의 잉여 자금이 확보됐어요. PC판은 X-BOX기기 라이센스비용도 안내거든요. 그리고 크로스 플랫폼 지원이라 서버는 X-BOX LIVE서버를 훔쳐 쓰고 있죠. 물론 그래도 저 금액이 절대 작은 건 아니에요. 통상적인 애니메이션 제작비의 2배가 넘는 금액이니까.”
“게다가 우리 IP도 아니고 남의 IP지. 그런데도 굳이 밀어붙이는 이유가 있겠지? 난 있으리라 믿는다.”
‘그냥 덕질하는 건데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상혁은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를 내놓아야했다.
“우선,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단지 저희 PTW하나만의 성공을 전제로 하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원작 게임 개발사인 타이프-문, 그리고 애니 제작사인 우포테이블, 마지막으로 저희. 이렇게 3 회사가 함께 역사에 남을 작품을 같이 히트시킨 다는 개념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요. 이를 위해서 자금력에 여유가 있는 저희 쪽에서 퀄리티 향상을 위해 투자를 하는 거고요.”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을까? 이거 망하면 회사 기둥뿌리가 흔들릴 정도의 투자를 굳이 해야 하나 싶어서···.”
“저희 쪽 게임은 자금을 투자해도 퀄리티 업에 제한이 있는 장르에요. 여기서 더 올리면 컴퓨터 사양의 한계에 걸리겠죠. 그렇다고 마냥 최신형 컴퓨터에서만 돌아가게 할 수도 없어요. 보급형 컴퓨터에서도 원활하게 게임플레이가 가능해야하니까. 그럼, 저희 게임의 완성까지 필요한 자금 외에 남는 자금이 발생하죠. 저희는 지금 쓰는 것 이상으로 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걸 타 회사에 투자하는 거다?”
“그쪽 IP가 힘을 받으면 저희쪽 게임도 가치가 올라가니까요.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돈 넣은 만큼 퀄리티가 올라가는 분야기도 하고요.”
“그럼 그냥 우리가 오리지널로 진행하면 안돼? 자체 캐릭터 만들고, 우리가 보유한 IP로 뭔가 해내는 게 더 이득 아닐까?”
성연의 지적은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개인의 이기심 보다는,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 팀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이야기임을 상혁도 잘 알기에,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성연의 질문에 답변했다.
“사람마다 잘하는 게 있고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죠.
저희 팀에 톨킨이 없는데, 갑자기 반지의 제왕 같은 오리지널 IP를 만들 수 있겠어요?”
“···그건 어렵겠지.”
“그쵸. 저희에게 부족한 부분을 타이프-문에서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겁니다. IP의 생산이요. 물론 저희 팀도 강점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부족한 점도 있죠. 그래서 이번 협업을 통해서 모두가 함께 성장하기를 바라는 거고요. 저는 지금 일본에 파견 나가 있는 지수나 서연이 그쪽에서 뭔가를 얻어올 수 있다면, 지금 써야하는 돈이 50억이든 70억이든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건 언젠가 나중에 저희한테 1조, 2조의 값어치로 돌아올 테니까요.”
저 멀리 일본에서 상혁의 이야기를 원격회의로 듣고 있던 지수와 서연은 입을 다물고 상혁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매일 장난만 치고 웃음만 흘리던 상혁이 자신들을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같은 회의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성연도, 상혁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제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여러분의 성장입니다. 확실하게 시장성을 안고 있는 글로벌 IP에서, 저희 팀원들 모두가 각각 자신의 역할을 하며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거죠. 그걸 위해서 2억엔이나 지불하면서 일본의 동인 팀과 협약을 진행하고, 8억엔 가까운 돈을 들여서 극장판 퀄리티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성연 형은 거기서 OST 작업에 참여하게 되겠죠. 향후 십년 이상 명작으로 회자될 애니메이션의 OST 작곡가로서요.”
상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정적에 싸여있는 회의실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자, 그럼 이제 여기 쓰일 8억엔이 아깝다고 생각하시는 분?”
상혁이 물었지만 회의실은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럼 다들 동의하는 걸로 알아도 되죠?”
상혁이 묻자 팀원들 전원이 ‘네’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상혁은 다시 씨익 웃으며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아, 조만간에 지수와 서연이는 한국 한번 와야 돼요. 둘 다 졸업식은 해야 하니까.”
“맞다, 지수 학교 문제는 어떻게 하기로 한 거야?”
“고교 입학 패스하고 검정고시만 통과하면 바로 천하대 입학하는 걸로 부모님하고 이야기 해놨어요.”
“헐···.”
“본인도 고교 진학을 원하지 않고 성적도 좋은 편이 아니라서 부모님도 천하대 입학 조건을 거니까 바로 승낙하시더라고요.”
“바로 승낙한 게 아니라 니가 가서 말발로 구워삶은 거 아냐?”
“뭐 그게 그거죠. 그리고 서연이는 올해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천하대 게임 제작과로 입학할거고요.”
“좋아. 팀이 이제 점점 기반이 잡혀가네.”
성연이 웃으며 말하자 상혁도 미소 지었다.
상혁은 그 이후에도 파견 나가 있는 지수와 서연의 적응 여부 등 여러 이슈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고는 회의를 마무리 했다.
이제 본격적인 준비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기 때문에.
상혁이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만년필로 사인해가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어느새 상혁의 곁으로 다가온 민준이 상혁의 팔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바쁘냐?”
“어. 이제 내부 결정도 났으니 우포테이블측이 랑도 이야기해야 하고 일본 가서 서연이랑 지수도 데려와야지. 겸사겸사 애니 제작 관련해서 타케우지 씨랑 계약도 진행하고.”
“앞으로 말고, 지금 당장 바쁘냐고.”
민준의 말에 상혁은 서류와 만년필을 손에 쥔 채 민준을 보며 말했다.
“어? 아니. 바빠도 니가 부르는 거면 없는 시간이라도 쪼개서 내야지. 뭔데?”
“요즘 진행하는 거 다 좋은데, 니가 중요한 걸 하나 잊고 있는 거 같아서 말이야.”
“뭐?”
“페○트 원작은 19금이잖아. 그거 어떻게 정식 유통할건데?”
순간 상혁의 손에서 서류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 너 혹시 설마···.”
“아, X발. ‘탕 속의 고기’를 까먹고 있었다.”
원작의 19금 장면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를 말하는 상혁을 보며, 민준이 소리 질렀다.
“아오, 그걸 까먹으면 어떡해!”
“아니 그거 원작 2부 이후로 계속 양지로만 냈던 거라 까먹고 있었어!”
“그럼 이제 어쩔 건데?”
민준의 질문에 상혁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가서 전연령판도 만들어달라고 빌어야지.”
“그냥 처음부터 전연령판으로 내달라고 하는 건?”
“그건 안 돼.”
상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원작 팬으로써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작에 마력충전 설정으로 나온 19금 동인지가 몇 개인데. 이건 무조건 사수해야한다.’
묘하게 이런 부분에서는 철저하게 원작을 중시하는 상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