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Hit and Run
‘김빠지는 소개가 되던 어쩌던 이 무대는 무조건 소화해야한다.’
원준은 이를 악물며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청중들을 보며 숨을 삼켰다.
‘뭐부터 해야 하지?’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진 느낌.
당당하게 무대에 나가 상혁의 게임을 칭찬하며 그러나 자신의 게임이 더 대단하다고 말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기에, 원준은 그토록 연습했던 간단한 농담조차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편한 의자에 앉아 음료를 홀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상혁을 보며,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여야했다.
“저기, 강원준 씨?”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원준은 필사적으로 감정을 가라앉히며,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난 프로다.’
겨우 감정 상태나 원했던 계획이 일그러졌다는 이유로 이 무대를 망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뒤에는 자신을 믿고 게임을 함께 개발해온 팀원들이 있었으니까.
이 위기를 넘어 어떻게든 사태를 마무리 하는 것이 기획자로서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며, 원준은 깊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자신의 게임 소개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원준은 영상으로 소개를 시작한 상혁과는 다르게 설명을 먼저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2000년대 들어서 급속히 보급된 초고속 인터넷의 영향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MMORPG시장의 통계를 그래프로 보여주면서, 원준은 이것이 한국 게임계가 나아가야할 이상향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포지셔닝 그래프로 화면을 넘긴 뒤 현재 잘 나가는 게임들의 포지션을 설명하며 자신이 만들려는 게임의 시장성을 어필했다.
서연은 그런 원준의 PT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상혁에게 물었다.
“오빠, 포지셔닝이 뭐에요?”
“특정 기준을 가지고 브랜드나 제품의 위치를 판단하는 거야. 주로 마케팅 쪽에서 쓰는 말인데, 쉽게 예를 들면 A화장품은 사용자의 나이가 많고 가격이 비싸, B화장품은 사용자의 나이가 많고 가격이 싸, C화장품은 사용자 나이가 적고 가격이 싸. 그럼 비어있는 쪽은 어디지?”
“나이가 적고 가격이 비싼 거요?”
“맞아. 그런 식으로 젊은 이미지를 어필하면서 고급화 전략을 취해가기 위해서 각 제품들의 위치를 특정 기준으로 나열 하는걸 ‘포지셔닝’이라고 하는 거야.”
“오, 뭔가 전문적이네요? 오빠는 저런 거 안 해요?”
“저건 비슷한 카테고리의 상품 중에서 판매 포지션을 잡을 때 쓰는 거야. 우린 장르 자체가 다르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혁의 시선은 원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무대 위의 원준은, 마침 시장성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자신이 만들려는 게임의 장르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갑갑하겠지. 장내 분위기의 변화는 본인이 가장 체감하고 있을 테니까.’
그때, 상혁의 곁에 있던 민준이 말했다.
“저거 완전 디아볼로 임모털 발표할 때 와이엇 창 표정 같은데.”
“님들 폰 없찐 걔?”
“응.”
“그 정도는 아니지. 그때 분위기는 실망을 넘어서 거의 분노 수준이었고, 지금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수준이잖아.”
“청중 말고 본인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말이야.
후순위로 시작해서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면서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그림을 그렸을 텐데, 상혁이 너의 악마적인 퍼포먼스 때문에 괴로워하는 표정이잖아.”
“뭐 그럼 자기도 대단한 거 하나 내놓던가. 먼저 개발한 분량이 있으면서 말 안하고 슥 내놓은 본인 잘못이지.”
상혁이 내놓은 ‘새로운 게임 장르’와 ‘지금 당장 플레이 가능’이라는 카드에 비해 원준이 내놓은 카드는 평범했다.
물론 그렇다고 못 만든 건 아니었지만, 적당히 퀄리티 좋은 느낌의 트레일러에 적당히 잘 만든 느낌의 게임 화면.
원래대로라면 ‘스타트업 치고는 굉장한 퀄리티’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겠지만 문제는 바로 앞에 발표를 한 PTW 역시 같은 스타트업 입장이라는 것.
때문에 원준이 내 놓은 게임 소개는 거의 기자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딱히 새로울 게 없는 평범한 MMORPG.
물론 이것은 개발력 대결이 ‘독창성’보다는 ‘퀄리티’의 대결이 되리라고 멋대로 혼자 착각한 원준의 문제였다.
상혁은 먼저 시연을 하면서 그 판을 바꿨을 뿐이고.
그래도 대부분의 기자들은 자리에 남아 원준의 설명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어찌되었건 이것은 개발력 ‘배틀’이었으니까.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두 게임에 대한 소개를 모두 실어야했다.
원준은 그런 기자들의 행동을 보며 그나마 아직 자신의 설명에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하고 목소리에 힘을 실어 더 힘차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판타지 특유의 클래스 소개와, 모양은 멋지지만 그냥 ‘보스인가보다’라는 느낌 외에 별 느낌 없는 몬스터 몇 마리의 소개, 다른 게임에 다 있는 길드전이나 공성전 같은 시스템의 소개를 열정적으로 어필하는 원준의 모습은, PTW의 팀원들 눈에는 슬픈 광대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열정적이면서도 슬픈 모습을 보며, 서연이 중얼거렸다.
“나 하나 결심했어요.”
“뭐?”
“난 무슨 일이 되던 간에 상혁오빠랑 적이 되는 일은 하지 않을래.”
“당연하지. 넌 내 팀원인데. 만약에 다른 회사에서 널 스카웃하면, 난 그 회사 신작이 뭔지 알아내서 무조건 그거보다 비슷하면서 재밌는 게임을 같은 날에 출시해서 회사 망하게 만들 거다!”
“헉. 어떻게 그런 말을! 이런 악당! 악마!”
“악마라니! 대마왕이라고 불러라! 넌 영원히 내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으하하하하하!”
“둘 다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어. PT 다 끝난 거 같으니까.”
민준의 말대로, 원준의 PT가 끝났는지 청중들이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박수소리는 확연하게 상혁이 게임을 발표할 때보다는 힘이 없는 느낌이었다.
“누가 보면 내가 돈 주고 기자 부른 줄 알겠네.”
“그럼 오늘 대결은 우리의 승리인거에요?”
“뭐, 그렇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상혁은 힘없이 무대를 내려가는 원준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작게 애도를 표했다.
앞으로도 계속 쳐 발릴 상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
“빌어먹을 자식!”
어떻게든 소개를 끝내고 복도로 나온 원준이 벽을 발로 차면서 화를 내자, 형민이 어깨를 잡으며 원준을 말렸다.
“그냥 일방적으로 진건 아니잖아. 마지막에 반격도 제대로 했고. 그 상황에서 그 정도로 발표한 것도 잘 한 거야.”
“저런 방식을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베타 버전을 유즈맵으로 낸대요?”
“전에 잡지에서 봤는데 원래 똘끼 충만한 놈이었어. 아마 내기 받아들인 시점에서 계획 다 잡아놓고 함정을 파둔 거겠지.”
“젠장, 무조건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반적으로 3개월 정도 개발했을 때 나올만한 결과물과 싸울 거라고 생각했던 원준은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끝까지 잘 했다. 준비한건 다 보여줬으니 거기에 만족하자고.”
“그랬으면 다행이고요. 근데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에요.”
“앞?”
“다음 공개가 3개월이면, 이미 완성된 툴에 컨텐츠만 얹는 저쪽이 훨씬 빠른 개발이 가능하죠. 저희는 아직 대부분의 시스템이 기획 상으로만 존재하니까요. 구현해봐야 한두 가지 기능을 만드는 게 전부일 텐데, 그래 가지고는 다음 공개 때도 밀리고 말겁니다.”
“흠···. 다음 시연을 늦춰달라고 하는 건?”
“상대도 그걸 잘 알 텐데 우리 조건을 받아들일지 모르겠네요.
지금 보니까 어린놈이 아주 속에 아나콘다가 100마리는 들은 것 같습니다.”
“일단 이야기해보자. 결과물을 보면 저쪽도 절대 쉽게 만든 건 아냐. 아마 외주비를 엄청나게 썼겠지. 돈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조금 템포를 늦추자는 제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게 분명해.”
“그럼 한번 제안해보죠. 다음 공개는 6개월 후에 하자고. 그 6개월 안에, 어떻게든 상대를 누를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그래. 원준이 넌 가능할거야. 내가 아는 기획자 중에 제일 뛰어난 기획자니까.”
그렇게 말하며, 형민은 비틀거리는 원준을 데리고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지금은 어찌됐던, 약속한 일정을 모두 소화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행사장에서 2부로 준비된 기자회견에서, 여유로운 상혁과는 다르게 원준은 질문을 소화하는 것 조차 힘든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오늘 행사에서 상혁에게 밀린 것도 있었지만, 기자회견이 끝나면 명백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공개 시기 연장을 상혁에게 부탁해야한다는 것도 있었다.
‘괜히 싸움을 걸었나.’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마음의 부담을 느끼던 원준은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가운데 자신의 패인을 다시 떠올렸다.
솔직히 3개월이란 기간 안에 어설픈 프로토타입 대신 유즈맵이란 결과물을 가져온 것에 대해서는 원준 조차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엔 내가 이긴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원준은, 상혁이 보여준 시연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공개 영상에서 상혁이 보여준 거의 완성에 가까운 유즈맵의 형태.
유즈맵이라는 범위 안에서 구현 가능한 최대한의 퍼포먼스를 뽑아낸 것 같은···.
‘그게 강점이자 약점이 아닐까?’
게임 자체를 통째로 개발중인 자신과 뭘 만들던 원본 게임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유즈맵을 가져온 상혁.
만일 상혁이 공개기간 조정에만 동의한다면, 원준은 다음 행사에는 확실히 상혁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개시간 조정만 받아준다면···.’
그래서 원준은, 기자회견이 끝나는 순간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자신의 제안을 상혁이 받아주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하늘에 빌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상혁은 원준의 부탁을 쿨하게 받아줌으로써 원준을 다시 놀라게 만들었다.
상혁은, 랜덤 박스 판매를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나, 공개 시점을 3개월 후로 잡아달라고 원준이 부탁했을 때처럼, 정말 아무 악의도 없는 표정으로 그 제안을 시원하게 수락했다.
“저희도 3개월은 좀 빡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번 유즈맵은 그것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나온 아이디어였고요. 필요하면 아예 다음 공개일정은 서로가 자신 있게 내놓을만한 결과물이 나온 시점으로 잡는 건 어떨까요?”
아예 상대측에서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상혁의 말을 들은 원준은, 오늘 당했던 일까지 싸그리 잊어버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 감사합니다! 솔직히 외신 기자들도 3개월마다 한국에 와야한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공짜로 여행 온다고 겁나 좋아하던데···.’
상혁은 굳이 그 말을 하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원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 덕에 원준은 상혁이 내민 손을 잡으며 ‘다음엔 지지 않을 겁니다.’ 같은 말을 내뱉으며 쿨하게 헤어질 수 있었다.
원준의 입장에서는 두 번째 기회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원준은 이번에야말로 상혁을 눌러주겠다고 이를 갈며 강하게 다짐했다.
‘네가 유즈맵의 한계에 갇혀있는 동안, 내 개발력을 총 동원해서 널 눌러주지.’
그렇게 다음 행사 때 상혁이 지을 표정을 상상하며, 원준은 팀원들에게 돌아가고 있을 무렵, 팀원과 합류한 상혁은 원준이 예상한 것과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원준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
“자, 이제 유즈맵은 잘 써먹으니 버린다.”
상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엑?! 그렇게 힘들게 만든 건데요?”
서연이 놀라며 말하자 상혁이 설명을 시작했다.
“애당초 유즈맵 자체가 배틀로얄 장르에 유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만든 일종의 미끼야. 미끼는 미끼에서 역할이 끝나는 거지. 게임의 베이스는 이미 완성되었으니, 나머지는 캐릭터 업데이트 정도인데, 그 정도는 굳이 빡세게 안해도 충분히 지금 확보한 유즈맵 개발자 2명이서 업데이트 할 수 있어. 지금은 그게 급한 게 아니니까, 제일 시급한 문제를 처리하러 가야해.”
“시급한 문제요?”
“겉으로 보기엔 우리 유즈맵이 완성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아냐. 저건 아직 핵심적인 부분이 빠져있거든.”
“핵심적인 부분?”
“어,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 손에 없지. 그래서 그걸 확보하러 가야해. 내 예상대로 진행이 잘 되면, 우리 게임은 지금보다 20배는 재미있어질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상혁이 품안에서 꺼낸 것은,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이었다.
“난 오늘부터 민준이 데리고 일본으로 간다. 나스 키오코와 타케우지 타카시를 만나러.”
상혁이 말한 ‘현재 부족한 것’
그것은 애당초 이 기획을 짜게 만든 세계 굴지의 캐릭터 IP, ‘페○트’의 라이센스를 확보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