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악당의 웃음
기껏 경쟁구도로 프로토타입을 공개하는 날에, 발표한 프로토타입의 때깔이 안 나온다는 것은 상혁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맵 용량 제한 때문에 모델링이나 이펙트 퀄리티를 올리는데 한계가 있었고, 상혁은 비싸게 구매한 외주 모델들의 퀄리티를 깎으면서도 맵 용량을 쥐똥만 하게 잡은 눈보라사를 속으로 욕했다.
‘쪼잔한 놈들!’
세상에 제일 강력한 힘이 인맥이라고 했던가.
제이크는 상혁이 퀄리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는 상혁에게 하나의 제안을 했고, 상혁은 제이크의 주선으로 바쁜 일정을 쪼개 캘리포니아로 향했고, 그곳에서 ‘전쟁크래프트’를 개발 중이던 핵심 개발자중 한명인 필 콜슨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만남에서, 신작 게임의 프로토 타입을 전쟁크래프트의 유즈맵으로 발표하겠다는 아이디어에 필 콜슨은 흥미를 보였고 결국 상혁이 보여준 저퀄리티 버전의 프로토타입을 플레이해본 콜슨은 이 게임을 위해 맵 용량 제한을 풀어줄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걸로 유저가 많이 유입된다면 전쟁크래프트의 판매량도 올라간다.’
뭣보다 게임 업계에서 보기 힘든 개발사간의 개발력 대결이란 이슈가 재미있어보였기에 필 콜슨은 상혁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잘만하면 이게 몇 십억 이상의 홍보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덕분에 상혁이 지금 팀원들에게 선보이는 유즈맵은 당시 존재하는 다른 유즈맵을 발라먹는 수준의 퀄리티로 구현되어 있었다.
물론 게임의 바탕이 되는 전쟁크래프트3의 스펙을 넘어 설수는 없는 없기에 그렇다고 ‘리그 오브 레전설’ 급의 그래픽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다른 게임처럼 보이기에는 충분한 상황.
팀원들은 의외의 상황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예상보다 훨씬 좋은 퀄리티의 그래픽에 만족하면서 플레이를 재개했다.
[플레이 하고 싶은 마스터의 포탈 앞에 서 주세요, 붉은 포탈은 캐릭터의 소개, 푸른 포탈은 선택입니다. 모든 플레이어가 푸른 포탈 앞에 위치하면 본 게임이 시작됩니다]
[당신이 선택한 마스터는 게으른 자-한넨입니다. 체력과 민첩이 높고 마력이 낮습니다. 버서커 계열 서번트와 상성이 좋습니다]
[시작 아이템:단검]
물론 아직 시기적으로 원본인 페○트의 체험판조차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상혁은 몇몇 고유명사를 제외한 캐릭터 이름이나 서번트의 스킬 등을 오리지널로 어레인지한 버전을 넣어놓았다.
그러나 그런 오리지널 요소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상혁이 만든 유즈맵은 철저하게 원본 페이트가 주는 재미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마스터마다 출신이나 가문에 따른 고유 스킬을 가지고 있다던가, 특정 캐릭터는 스킬을 쓰기 위해 보석이라는 아이템이 필요하다던가, 핵심 요소 중의 하나인 령주도 [엠블렘]이라는 이름으로 충실히 적용되어 있어 다른 마스터를 암살하기 위해 보냈던 서번트를 즉시 소환하거나 령주를 소모하는 특수 필살기 등을 사용하는 기믹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게임에 익숙해진 이후의 이야기.
애당초 이 게임은 페이트를 전혀 접해보지 않은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해야 했기에, 이 유즈맵이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낮은 접근 장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간단한 소개만 들은 채 맵에서 덩그러니 게임이 시작된다고 생각해보자.
유저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아이템을 모아야하나? 건물을 부술까? 적을 찾아야하나?
무엇하나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게이머가 자연스레 자신의 캐릭터 스킬에 대해 이해하고, 서번트 소환을 위한 성유물을 모으게 만들 것인가.
회귀전 민준이 플레이한 페이트 유즈맵은 철저하게 페이트 팬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그런 설명이 불필요했지만, 상혁이 만든 유즈맵에는 유저들이 쉽게 게임의 룰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반드시 필요했다.
‘복잡한 룰을 어떻게 쉽게 이해시킬 것인가. 그것도 유즈맵이란 제한된 시스템에서?’
민준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게임을 시작한 민준은, 포탈을 타고 게임이 시작되는 위치에서 상혁이 넣은 시스템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낯선 곳에 떨어진 초보들에게 가장 쉽게 룰을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
게임의 시작 위치에서 유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안녕? 나는 튜토리얼의 요정.”
그것은 민준이 아는 정보 전달 방식 가운데 가장 직설적이고 단순한 방법이었다.
“이제부터 너희는 서로를 죽여야해.”
팀원들을 모두 당황시킨 튜토리얼의 요정은 매우 직관적인 방식으로 룰에 대해 설명했다.
“여기 보이는 푸른색 검조각은 성유물이라고 해. 너희는 맵 곳곳에 있는 보물상자나 몬스터를 사냥해서 이걸 얻을 수 있어. 그리고 5분 안에 그걸 다 모으면 그 아이템에 맞는 영웅이 소환 될 거야. 아, 다 못 모아도 괜찮아, 모은만큼 확률이 올라가는 시스템이니까.”
복잡한 시스템을 엄청나게 단순하게 설명하는 튜토리얼의 요정 덕에, 팀원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초반 목적과 게임의 승리조건에 대해 익힐 수 있었다.
물론 각각의 캐릭터가 가진 능력치라던가, 상성, 스킬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쓰면서 익히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복잡한 룰을 이렇게 쉽게 전달하게 만든 상혁의 아이디어에는 감탄하며 팀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서번트를 소환하기 위한 성유물을 모으러 다녔다.
“상혁 오빠 설명을 들었을 때보다 복잡하지 않은 느낌인데요?”
서연이 옆에서 속삭이자 민준이 말했다.
“유즈맵이란 한계가 있으니까, 단순화 시키려고 엄청 덜어낸 거지. 아마 핵심만 빼놓고는 다 빼냈을걸?”
“그래도 재미는 있는 거 같아요. 그, 어떤 영웅을 뽑을 수 있을까 두근거린다고 해야 하나?”
“본게임은 서번트 소환이후가 되겠지만 1페이즈 자체는 되게 탄탄하게 잘 만들었네.”
상혁은 배○그라운드에서 유저가 느끼는 게임 플레이를 두 개의 페이즈로 해석했다.
맵을 뒤지며 아이템을 파밍하는 1페이즈와, 파밍된 아이템을 가지고 적과 싸우는 2페이즈.
기본적으로 맵에 낙하한 직후 유저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3레벨 방탄 헬멧이나 방탄복, 가방이나 자신이 선호하는 종류의 총기, 각종 악세서리와 탄약, 회복약등을 얻기를 기대하며 맵을 뒤진다.
그리고 즉석에서 새로 얻은 총기를 쓸지, 아니면 가지고 있는 총기를 쓸지를 고민하며 때로는 무기를 교체하고 때로는 버리기도 하며 자신만의 전투 계획을 세워나간다.
상혁이 만든 유즈맵의 1페이즈 역시 배틀로얄 장르의 초반부 플레이가 가지는 그러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었기에 팀원들은 여러 성유물을 들고 다니면서 파밍 상황에 따라 최종적으로 가지고 갈 성유물을 결정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단순히 등급 높은 성유물을 우선적으로 모으고 있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그런 식의 보물찾기 역시 나름의 재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1페이즈는 5분이란 시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빠르게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30초 후에 2페이즈가 시작됩니다]
화면 중앙에 안내문구가 뜨자, 더욱 바빠지는 손.
그리고 30초가 지나자, 팀원들은 화려한 마법진과 함께 자신의 캐릭터 주변에 소환된 영웅캐릭터를 보게 되었다.
“이게 서번트인가?”
“오, 플레이어보다 훨씬 세보인다.”
애당초 상태창에 나타나는 체력숫자부터 차원이 다른 영웅캐릭터의 등장에 팀원들이 술렁이고 있을 때, 화면에 텍스트가 나타났다.
[2페이즈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1분마다 맵 구역이 하나씩 붕괴됩니다. 붕괴 지역에 있으면 데미지를 크게 받을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이 부분도 배그에서 따온 건가?’
민준은 속으로 생각하며 전략을 세웠다.
기본적으로 이 게임은 서번트가 죽어도 마스터가 살아있으면 게임오버가 되지 않는다.
반면에 마스터가 죽으면 서번트가 있어도 게임 오버가 되기 때문에 서번트를 소환한 시점부터는 마스터를 지키는 플레이가 요구되고 있었다.
유즈맵이라는 플랫폼에 맞춰서, 적절하게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채울 것은 채워넣은 상혁의 시스템 디자인에 감탄하면서, 민준은 계속 게임을 플레이했다.
그러나 ‘원작을 알고 있기에’ 우승을 예상했던 민준과는 다르게, 테스트 플레이의 최종 우승자는 팀에서 가장 게임을 못하는 서연이었고, 민준은 아직도 자신이 진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분노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신을 눕힌 가증스러운 존재.
분명 ‘페○트’가 아닌, 명백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게임에서 가져온 듯한 모델링을 가진 그 영웅은, 머리위에 ‘티확찢’이라는 짜증나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야이 씨 여기 왜 저놈이 나와!”
“오리지널 챔프 넣다가 아이디어가 떨어졌어. 혹시 꼬우심?”
‘리그 오브 레전설’에서 떨친 악명 그대로, 근접캐릭인 민준의 영웅에게 실명 다트를 무지하게 쏘아대며 교묘하게 자신이 깔아놓은 독버섯을 밟게 한 서연이 최종 승리하자, 민준은 기뻐하는 서연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방금 건 무효야! 다시해!”
“아니 오빠 이건 그냥 테스트 플레이···.”
“다시해!”
“네···.”
좋은 게임플레이란 게임을 하면서 유저도 모르게 게임 시스템을 익히게 만드는 것이다.
상혁은 철저하게 플레이를 하는 유저가 조금씩 게임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디자인했고 그 덕에 연소긍로 4판 정도를 플레이한 팀원들은 대략적인 게임 플레이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플레이한 내부 테스트의 평가 결과는···.
“엄청 재밌다.”
“이거 유즈맵 뜨면 압살하겠는데?”
“전에 설명만 들었을 때는 한없이 복잡해보였는데 엄청 깔끔해진 느낌이야.”
애당초 캐릭터 모델링부터 배경 오브젝트까지 싹 갈아엎었기에 플레이하는 내내 ‘전쟁 크래프트3’가 아닌 완전히 다른 게임을 플레이하는 느낌이었다는 게 가장 큰 평가였다.
그 외에는 ‘배우기 쉽다’ ‘좋은 영웅을 파밍하려고 준비하는 단계가 재미있다’ ‘랜덤으로 나온 영웅을 조작하면서 전투 계획을 세우는게 재미있었다.’ 정도의 평가가 있었다.
최종적인 평가는 이정도면 충분히 유즈맵 시장을 평정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
유즈맵에 익숙한 민준 역시 아직 2003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Defense of the Ancients(DOTA)유즈맵도 발매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충분히 경쟁력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단 지금 평가점수로는 50점 정도일까?”
“엑?! 그렇게 재미있게 해놓고 겨우 50점이요?”
정작 자신이 이길 때까지 4판이나 연속 플레이를 해놓고 점수를 50점밖에 나오지 않는 것에 서연이 의아해하자, 민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난 이게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을 대충 알 것 같거든. 그럼 지금보다 2배 이상 재미있을 것 같으니 50점이라는 거야.”
민준이 이야기한 ‘완성’은 여기에 ‘페○트’의 캐릭터가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서연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상혁을 바라보았고, 유일하게 민준이 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던 상혁은 그런 서연을 보며 그 말을 해석해주었다.
“그냥 지금 시점에서는 100점이라고 해석하면 돼.”
“아항···. 뭔가 민준 오빠는 가끔 말을 너무 어렵게 한다니까?
어찌됐건 다음 주 공개 때는 압살이라는 거죠?”
“그런 거지.”
상혁이 웃었다.
유즈맵으로 포맷을 변경하면서, 강제로 덜어내야 했던 원작의 많은 요소들이, 지금은 오히려 게임의 이해를 쉽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제이크의 소개로 맵 용량제한까지 풀게 된 이상, 남은 건 공개 행사에서 원준이 가져올 프로토타입을 박살내는 것 뿐.
‘진짜 상상도 못하겠지.’
애당초 해봐야 컨셉 기획, 아니면 거의 베이스만 잡힌 프로토타입만 공개 가능한 시점에서 무려 플레이 가능한 버전을 공개한다는 건 확실한 강점이 된다.
상대방이 아무리 먼저 개발한 기간이 있더라도, 정상적인 플레이가 가능한 버전을 가져오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공개행사가 기대되네. 흐흐흐흐”
“오빠 웃는 게 악당 같아요.”
“악당? 뭐 하지 뭐. 악당. 그거 뭐 별거 있나. 으하하하하하하!!”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는 상혁의 모습은, 마치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마왕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