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이심전심
현주가 갑자기 찾아와 잡일이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상혁도 놀랐지만, 상혁은 곧 현주를 ‘인사 담당’ 이라는 명목으로 팀에 합류시켰다.
물론 정규적으로 직원을 뽑거나 해고하는 구조의 팀이 아니었기에 PTW에서의 인사담당은 그냥 ‘팀 내 분위기 관리’ 정도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합류를 반대하는 팀원은 아무도 없었기에, 상혁은 곧 정식적으로 법인의 설립을 추진했다.
어찌됐건 팀원들 월급은 나가야 했으니까.
계속 주먹구구식으로 필요한 만큼 빼 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법인 설립에 관련한 절차는 현주가 별도로 공부를 해 왔기에 법인 설립에 크게 문제되는 부분은 없었다.
게다가 현주는 지수가 중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지수가 정상적으로 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도록 취직 인허가증까지 발급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자잘한 업무들을 해결해주게 되자 상혁은 크게 부담을 덜 수 있었고 법인 설립이라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도 이전처럼 지수와 기획업무에 집중 할 수 있었다.
사실 대학교 입학 이후 상혁이 가장 기뻐하는 부분은, 이제 더 이상 강제로 고등학교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학교에서 준비해준 기숙사에서 눈을 뜨면 부실로 가서 바로 작업을 할 수 있었고, 애당초 입학 조건에 학점 이수 조건이 없었기에 하루의 100%를 풀로 작업에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수업을 마치고 저녁에만 작업이 가능해서 미친 듯이 작업 페이스를 올릴 수밖에 없었던 상혁이나 민준에게는 엄청나게 큰 변화였다.
다만 지수가 아직 중학생이기에 지수와 협업하는 파트는 중학교 수업이 끝난 이후에 할 수 있었다.
서연도 마찬가지로 아직 고등학생이었기에 수업이 끝나면 부실로 왔고, 지금은 아예 수업이 끝날 때 쯤에 현주가 차로 두 사람을 픽업하러 가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여유시간의 확보는 개발속도의 향상을 의미했기에 상혁은 선문고 게임부에서 일할 때보다 더 빠른 페이스로 선행기획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일단 언젠가 처리는 해야겠지만 병역 의무도 미뤄진 마당이고, 지수도 자신의 의도대로 훌륭한 중2병 기획자로 성장하고 있었기에 상혁은 매일 매일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상혁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과 지수를 제외한 팀원들이, 법인 설립에 앞서 상혁을 빼고 열심히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
“다들 생각해봤어요?”
상혁이 외부 일정으로 인해 부실을 비운 사이, 회의를 소집한 민준이 팀원들을 돌아보며 말하자, 팀원들은 다들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게, 민준이 이야기를 꺼낸 직후 지금까지 수회의 토의를 거듭하며 논의한 결론이 지금 나오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거의 부실에 붙어있는 상혁 때문에 회의진행이 어려웠겠지만, 상혁은 최근 갑자기 외부 미팅이 있다며 자리를 자주 비우고 있었고 그 덕에 민준은 상혁이 부실을 비울 때마다 팀원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을 비장하게 만든 지금 회의의 아젠다는, 바로 곧 법인이 될 PTW의 지분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법인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5000만원 이상의 금액이 투자금으로 들어간다.
사실 그 금액을 조달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마리의 눈물과 나이츠 어셈블의 판매 수익으로 PTW가 보유하고 있는 자금이 100억이 넘었기 때문에.
심지어 나이츠 어셈블의 수익 중 상당한 금액이 D&D의 판권을 가진 WOC(Wizards of the Coast)에 지불되었음에도 그 정도의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투자금이 클수록 세금도 커지는 문제 때문에 상혁은 유보금을 모두 집어넣는 대신 투자금으로 10억 정도를 예치하고 나머지 금액을 멤버들에게 N분 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분 역시 N분해서 가지는 것으로.
민준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멤버들을 모아 지적한 부분은, 바로 그 후자의 부분이었다.
다 같이 고생했으니 다 같이 수익금을 나눠야 한다는 상혁의 생각은 민준도 일부 동의하고 있었지만, 지분은 다른 문제다.
쉽게 생각해보면 고생한 멤버들끼리 똑같이 나누는 게 공평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향후 팀의 운영 과정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예로 지수의 문제만 해도 그러했다.
멤버가 늘었으니 수익금 분배에 참여 시킬 것인가?
초기 멤버와 후기 멤버의 차이는 어떻게 할것인가?
차기작은 다 같이 고생했는데 법인 설립 시점 때문에 누군가는 지분을 20%가까이 들고 있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안가지고 있다면 지분이 없는 사람의 상실감은 무엇으로 보전해줄 것인가?
그러한 문제들 때문에, 민준은 모든 멤버가 각각 지분의 5%정도만을 가지고 상혁이 나머지를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민준은 상혁이 약속했던 만큼의 지분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팀원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매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상혁이 모은 이 똘기 넘치는 팀원들은 오히려 ‘지분은 상혁이가 100%가져가는 게 좋다.’ 라고 말해서 말을 꺼낸 당사자인 민준을 벙찌게 만들었다.
“잘 생각해야 돼요. 이거 나중엔 수백 수천억이 될 수도 있는 문제라고요?”
“그리고 수백만 원이 될 수도 있지. 상혁이 만드는 게임을 봐. 난 아직도 나이츠 어셈블이 성공한 게 믿기지가 않는 사람이야. 물론 이번에야 잘 풀려서 거금이 들어오긴 했지만, 앞으로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잖아? 상혁이 만들려고 하는 게임은 대부분 우리 상식보다, 좋게 말하면 파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도박적인 기획이 많으니까.”
그렇게 성연은 말을 이었다.
“언젠가 상혁이 실패했을 때 부담이 되지 않게 상혁이 지분을 다 가지고 있는 게 맞는 거 같아.”
성연이 말을 마치자, 옆에서 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상혁오빠를 안 믿었으면 그때 학교에서 수익금을 전부 상혁오빠한테 안 맡겼겠죠.”
서연의 말대로, 나이츠 어셈블의 경우 라이센스비를 포함하여 이것저것 개발비가 꽤 많이 들어간 편이었고 그 금액의 대부분은 원래 팀원들이 마리의 눈물로 받아야했던 수익금에서 충당되었다.
팀원들은 그에 대해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고 다들 상혁이 말하는 것처럼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다면 거기에 돈을 써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민준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스타트업 멤버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얘네가 이상한건가?’
잠시 생각하던 민준은, 사실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웃음을 지었다.
여기 모인 멤버가, 정확히는 상혁이 모은 이 멤버들이 생각하는 게 다들 비슷한 것 같아서.
적어도 여기에는, 민준이 보기에 돈을 벌기위해서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인원은 한명도 없었다.
그렇게 민준은 팀원들의 전폭적인 동의하에 모든 지분을 상혁이 가지고 있는 형태로 법인 설립을 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옆에서 볼 때는 다들 멍청하다고 볼 수 있는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애당초 IPO(기업공개)를 할 것도 아니고, 수백 수천명이 일하게 될 대기업을 만들 것도 아니었기에, 지분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건 멤버들이 받을 수 있는 지분을 포기하고 상혁에게 넘긴다는 것은 매우 큰 결정이다.
그렇기에 멤버들은,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상혁이 매우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상혁에게 줄 수 있는 선물 중에 가장 큰 의미가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당사자인 상혁은,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민준이 이야기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어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수준으로 받아들이며 팀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사, 상혁아···. 너 지금 민준이가 한 게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지?”
“뭐, 이번에 법인 설립하는 거 지분 제가 다 가지고 있으라는 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우리가 널 전적으로 믿는다는 의미인데.”
“어? 그런 건가? 그럼 땡큐요.”
사실 상혁 입장에서 지분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팀원들이 지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신이 만들려고 하는 게임을 못 만들게 막을 것이 아니라면, 딱히 어찌되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보는 아니었기에 민준이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상혁이 생각하기에는 민준이 한 배려는 크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거 논의할 시간에 코딩 한줄이라도 더 해주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뿐.
“요새 며칠 계속 나 빼고 쑥덕거리더니 그거 얘기 한 거예요? 어휴, 그럴 시간 있으면 게임이나 만들 어요 게임이나. 우리가 무슨 삼성 전략기획실입니까? 게임 제작자지? 자, 해산! 가서 일해요 일! 일 없으면 게임을 해! 만화책이라도 보던가!”
그렇게 말한 상혁은 다시 기획서 작성에 들어갔고, 팀원들은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상혁이 앉은 자리를 바라보다가 민준을 바라보았다.
마치 ‘저런 미친놈을 사장으로 둬도 괜찮을까?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거 아니야?’ 라고 물어보는 표정으로.
그리고 민준은, 그런 팀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사실, 반쯤은 예상한 반응이었다.
애당초 상혁은 게임 제작 말고는 다른 일에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러나 민준은 자신이 밀어부친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대한민국 게임업계에 한명 정도는, 저런 미친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가 있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작 팀원들을 그렇게 경악시킨 당사자인 상혁은, 민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건 관심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건, 지수와 함께 기획한 ‘중2병 배틀러’의 기획을 빠르게 완성하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이번의 지분사건은 상혁을 역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게임을 만들어야하는 팀원들이 자신의 진도가 늦어져서 쓸데없는데 신경 쓰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빨리 개발을 시작해야해.’
물론 휴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반대로 휴식은 사람을 느슨하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상혁은 최대한 빠르게 팀이 개발 궤도에 들어서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금 하는 기획 작업을 더 빠르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민준이 밀어붙인 대로 법인이 설립된 지 일주일쯤 지난봄에, 상혁은 드디어 지수와 함께 만든 기획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다 됐드아아아아!!”
“됐드아아아아!!”
상혁이 소리를 지르며 만세를 부르자 옆에서 지수가 함께 만세를 하며 상혁의 말을 따라했다.
그러자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던 팀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며, 시선이 상혁이 있는 기획파트 쪽으로 확 몰렸다.
특히나 이번 게임의 경우는 상혁이 지수의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과정에 집중하느라 중간에 팀 회의를 하지 않았기에, 팀원들이 느끼는 기대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상혁은 초기 기획을 잡고 나면 팀원들과 함께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이번엔 이례적으로 초기 기획에 엄청난 시간을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반짝이는 팀원들 앞에, 상혁은 책상에 쿵 소리가 날정도의 두꺼운 기획서 뭉치를 내려놓았다.
“이번엔 좀 양이 많아요.”
라고 미소를 지으며.
이미 상혁과 함께 작업하며 기획 내용을 전부 외우다시피 한 지수는 자신이 상혁과 만든 첫 기획을 본 팀원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무려 ‘마리의 눈물’과 ‘나이츠 어셈블’이라는 걸출한 게임의 메인 기획자가 자신과 함께 만들어준 기획이니까.
당연히 다들 뜨거운 반응을 보일 거라고.
대학교 부실로 옮기면서 새로 마련한 초대형 모니터에 상혁이 PPT를 띄워놓고 게임의 소개를 할때도, 지수는 이 PT가 끝나는 순간 팀원들이 기립박수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혁의 설명이 끝난 후 팀원들이 보여준 반응은 지수의 예상처럼 열렬한 기립박수가 아니었다.
지수는 마치 민트초코를 먹고 이게 치약인지 초코인지 곰곰이 머릿속으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여주는 팀원들을 보며 순식간에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혹시 자기가 뭔가를 잘못해서 이런 반응이 나온 게 아닌가 하고.
사실 중2병 배틀러는 지수가 가진 망상의 결정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상혁이 온전히 뽑아내어 게임의 형태로 만든 것이 지금의 기획이었기에 그녀는 그녀 스스로도 이 게임이 ‘일반인’이 보기에 거북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상혁이 끊임없이 재미있다고, 괜찮다고 다독여주었기에 잠깐 자신감을 가진 것뿐이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오버했을지도···.’
그때, 지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아.”
손의 주인은 이 기획이 재미있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다독이던 존재, 상혁이었다.
“그, 그치만 다들 표정이···.”
“어? 그건 지수 니 잘못이 아니야. 내가 그렇게 만든 거지.”
그렇게 말하며, 상혁이 싱긋 미소지었다.
“나이츠 어셈블 만들 때도 저랬거든.”
“정말요?”
“어. 갑자기 D&D 소재로 게임을 만들자니 뭔소 리냐고 엄청 반박 당했지.”
“몰랐어요···. 그럼 이제 어떻 하죠? 다들 고민하고 있는 거 같은데.”
“뭘 어쩌긴 어째.”
상혁이 말했다.
“저 똥맛 카레를 먹은 표정을 한 인간들이 네가 원하는 대로 기립박수를 치게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