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리스펙트(Respect)
-인류가 역사라 부르는 기록의 시간을 거슬러, ‘신화’라 부르는 이야기가 현실로 존재하던 시대를 넘어, 의식을 가진 자들이 막연하게 ‘태초’라 부르게 된 시간의 오래된 기억 속에서, ‘천족’과 ‘마족’이 오랜 전쟁을 펼치고 있었다.-
“허미 쉽펄!”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노트의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탁 소리가 나게 노트를 힘껏 닫아버렸다.
그건 딱히 상혁의 잘못이 아닌 게 업계에서 오래 일한 기획자의 PTSD를 일으키는 두 단어 ‘천족’ 과 ‘마족’이 페이지에 적혀있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반사적으로 노트를 닫아버린 상혁은 잠시 후 심호흡을 하고는 노트를 다시 폈다.
그리고 제발 이 노트의 내용이 자신이 상상하는 그 내용이 아니기만을 빌며 뒷내용을 읽어나갔다.
-천족의 영웅 아말키우스는-
‘탁’
-제국력 2044년-
‘탁’
중간에 몸을 베베 꼬기도 하고, 자기도 모르게 노트를 닫기도 했지만 상혁은 몸 안에 남아있는 항마력을 영혼까지 끌어 모아 힘들게 노트를 읽어나갔다.
그리고 상혁이 노트를 접고 한숨을 쉬는 간격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할 무렵, 상혁은 어느새 거부감 없이 노트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몇 개 너무 진부한 설정을 제외하면 괜찮은데?’
기본적으로 노트에 적혀있는 것은, 지수의 망상이 결집되어있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었다.
노트 페이지 하나하나마다 세계의 배경이 되는 스토리와 함께 깨알같은 글씨로 설정에 대한 주석들이 달려있는 내용을 읽으며, 상혁은 이것과 비슷한 느낌의 설정을 읽었던 느낌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 워함마. 워함마 40K읽을 때랑 느낌이 비슷하네.’
1987년 영국에서 발매되어 실제 그 게임 유저보다 설정을 더 좋아하는 유저가 더 많은 것으로 유명한 보드게임인 워함마는 쌓여있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깊이 있는 설정으로 유명했다.
물론 그 깊이 있는 설정들은 수많은 프로 제작자들이 여러 버전을 내면서 갈고 닦아진 것이다.
비록 지수가 적은 이 노트의 설정은 그 정도의 강렬한 인상은 없었지만, 나름 어설프게나마 비슷한 흉내를 낼 정도는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중2병이 설정만 파면 이 정도까지 나오는 구나···.”
어느새 상혁은 오글거림보다 감탄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읽고 있던 상혁의 손이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거기엔 지수가 ‘렐릭’이라 명명한 무기들에 대한 설정과, 무기를 사용한 기술의 모션이라던지 이펙트나 효과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물론 그 수준은 이미 프로 원화가라고 할 수 있는 서연의 그림과 비교가 부끄러운 수준이었지만, 단순하게 기획 컨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고 좋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혁은 페이지를 넘기며, 지수가 자신과 ‘아머드 코아’를 할 때 외치던 해괴한 기술명이 무슨 기준으로 사용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자기가 생각한 기술이랑 무언가 모션이라던가 이펙트가 비슷하면 해당 기술명을 갖다 붙인 모양이었다.
상혁은 노트의 내용을 끝까지 다 읽고는 페이지를 덮었다.
처음엔 호기심에서, 그리고 나중엔 내용에 이끌려서 끝까지 모두 읽은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지수가 수없는 밤을 이불킥 하게 만들 흑역사 덩어리인 그 노트를 원래 자리인 바닥에 얌전히 내려놓고는, 쇼파에 앉아 조용히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중2병이네.”
사실, 재미있는 팀원이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조건만 놓고 보면 지수는 이미 합격하고도 넘치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귀여운 외모에 리액션도 좋아서 며칠 사이에 벌써 팀내 마스코트 같은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제작팀의 일원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상혁은 지수를 팀원으로 받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분위기 메이커는 게임 제작에 간접적으로 도움은 될지 몰라도 직접적인 도움은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수가 실수로 놓고 간 노트를 본 상혁은, 어쩌면 자신이 지수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당초 그게 실제로는 아예 쓸 수 없는 가상의 언어이거나 아니면 시대에서 밀려 완전히 사장된 언어라 하더라도, 웬만한 끈기나 집착 없이 라틴어와 꿰냐 같은 중2병스러운 언어를 익히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그런 집착은, 어쩌면 이 노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찾고 있던 4번째 조각이 지수일지도 모르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혁은 노트를 바닥에 둔채 집으로 향했다.
***
“너 오늘도 갈 거야?”
지수가 다니고 있는 양화중학교 2학년 교실에서, 지수의 동급생이 지수를 보며 물었다.
그녀와 지수는 동급생이긴 하지만 친구라고는 할 수 없는 관계였다.
애당초 그녀는 소위 ‘잘나가는’ 그룹의 일원이었고 지수는 매일 교실 구석에서 만화책이나 읽는 ‘이상한 애’ 였으니까.
“···.”
지수는 대답하지 않고 가방을 싸던 손을 계속 놀렸다.
자신에게 묻는 동급생의 말투에서 조롱과 비웃음의 감정이 느껴져서 였다.
물론 다른 친구들처럼 대놓고 ‘돌아이’ 라던가 ‘이상한 년’ 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상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 밑에 경멸의 감정이 깔려있다면 그것은 절대 좋은 기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는 지수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꼈는지, 조금 목소리의 톤을 올리며 다시 말했다.
“간다고 거기서 받아줄 것도 아닐 텐데?”
지수는 대답하지 않고 가방을 등에 매고는 교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비웃음이 실린 시선을 뒤로 하고 선문고로 향했다.
시간낭비.
지수는 그 단어를 싫어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취미 자체가 그 시간낭비의 결정판일지도 모르기에.
단지 멋지다는 이유로 바티칸 말고는 아무데서도 안 쓰는 라틴어를 공부하고, ‘반지제왕’에 나오는 꿰냐를 익히는 것은 남들이 보기엔 시간낭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솔직히 그걸 공부한 자신도 자신이 살면서 그게 앞으로 쓰일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뭐? 내가 좋으면 되는 거 아냐?’
지수가 보기엔 담배피는 고등학생 오빠들이랑 데이트나 하러다니고 노래방이나 찾아다니는 게 훨씬 시간낭비였다.
적어도 자신은, 남이 ‘넌 뭘 할 수 있어?’ 라고 물었을 때 간지 나게 ‘꿰냐를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물론 현실은 냉혹하기에 그녀가 그 말을 했음에도 PTW의 팀장이라는 상혁은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부실에서 쫒아냈다.
물론 지수는 당돌하게 찾아가 ‘나를 팀원으로 받아라아아아앗!’하고 소리치러 갔을 때 팀에서 그녀를 바로 받아 주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쩌면···.’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리고 그 ‘어쩌면’이라는 단어는 매번 그녀를 매혹하면서 동시에 좌절시키는 단어였다.
‘어쩌면’ 룬문자를 배우면 마법을 쓸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톨킨이 만든 꿰냐에 특별한 힘이 있을지도 몰라.
마치 탱탱볼에 새겨진 불꽃마크에 손가락을 대는 유치원생의 마음으로, 그녀는 간절히, 그리고 끊임없이 어쩌면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고 매달렸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도, ‘어쩌면’ 자신의 재능을 팀원 중 누군가가 발굴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선문고 게임부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물론 게임은 좋아하면서도 게임제작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룬문자로 마법을 쓰게 되는 것만큼이나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어쩌겠는가. 그 과정 자체가 즐거운 것을.
룬문자를 배웠는데 마법을 못 쓴다고 화가 난다면 그건 바보스런 생각이다.
남이 못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리고 거절당하면서도 추운 겨울에 복도에서 몇시간을 서있으면서 겨우 들어가게 된 게임부의 모습은, 그녀에게는 마치 꿈만 같은 광경 같았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게임을 만든 개발자들, 아니 언니 오빠들이 마치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멋진 방에서 웃고, 떠들고, 논다.
비록 꼽사리라도 그 언저리에서 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수에게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비록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재능이란 게 낡은 노트에 자기만의 망상을 끄적이는 게 전부이다 하더라도, 그녀는 지금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었다.
적어도 게임부 안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보고 경멸이나 비웃음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없었으니까.
‘오늘도 재미있게 놀아야지.’
언제나 상냥한 언니 오빠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지수는 힘차게 게임부 부실의 문을 열었다.
“하하하! 이 몸 등장!”
평소같으면 서연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며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그리고 민준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슥 한번 쳐다보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릴 것이고.
상혁은 쇼파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다가 슬쩍 옆으로 비켜 자신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줄 것이다.
그게 최근 그녀를 맞이하는 게임부의 분위기였으니까.
그러나 오늘의 분위기는 그녀가 기대하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평소와 다르게 뭔가 진지한 느낌. 그리고 자유롭게 흝어져 자기 할 일을 하던 모습과 다르게 회의용 책상에 모여 앉은 모습이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서였을까.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으···. 혹시 바쁜데 방해한 거면 미안했다···. 이 몸은 이만 퇴장을···.”
“쫄았는데 억지로 컨셉잡지 말고 여기 와서 앉아.”
지수는 마치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팀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회의 중 인거 아니었어요?”
조심스레 지수가 묻자 상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난 니가 쫄았을때만 존댓말하는게 참 좋더라.”
“크흑···. 닝겐 따위가···.”
“시끄럽고, 방금 전까지 너에 대해서 회의를 하던 중이었어.”
“나? 이 몸? 이 몸이 뭔가 잘못했었나?”
지수는 곰곰이 자신이 뭔가 잘못했는가를 떠올렸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자 그런 지수의 표정을 보던 상혁이 씨익 웃으며 노트 한권을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그···그건?!?”
지수는 재빨리 노트를 낚아채고는 가슴에 껴안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같은 반 동급생이, 자신의 노트를 읽고 보였던 반응을···.
‘너 이런 거 쓰니?’
아주 찰나의 순간, 지수는 ‘어쩌면.’이라는 기대를 품었었다.
어쩌면 친구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줄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도 멋지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그러나 그런 지수에게 돌아온 것은 마치 망상에 빠진, 이상한 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어떡하지?
지수의 호흡이 가빠지며 안색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귀여운 여동생처럼 대해주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두려워서.
자신의 망상 노트를 본 언니 오빠들이 자신을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게 두려워서.
그러나 그런 지수에게 날아온 것은, 예전에 동급생이 보여주었던 싸늘한 시선이 아니라, 허공에서 날아온 상혁의 날카로운 꿀밤이었다.
‘딱!’
“아얏!”
“얌마 정신차려! 왜 갑자기 흥분하고 그러냐?”
“하지만 오빠가 이걸 읽었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상혁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웃음의 표정이 아니라,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겨우 그 정도가지고 부끄럽다고 생각하다니 가소롭구나. 나는 코믹월드 가서 여장도 한 적이 있는데.”
“엑?! 진짜요?”
“어 진짜야. 어휴···. 흉물스러웠지···.”
지수의 질문에 민준이 고개를 저으며 기억을 지우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약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상혁을 보았다.
그리고 상혁이 여장한 모습을 상상하려는데···.
‘딱!’
“아얏! 왜 때려요!”
“상상하지마라.”
“헐! 어떻게 알았지?”
“너는 얼굴에 다 보여 임마.”
지수는 상혁의 과한 리액션으로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덕에 그것이 상혁의 배려인 것도 눈치 챌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괜시리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수는 조심스레 상혁에게 물었다.
“저···. 이상하지 않아요?”
“어? 이상해. 완전 이상하지.”
상혁은 솔직하게 감상을 털어놓았다.
이상한 걸 이상하지 않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상혁은 자신의 말에 지수가 상처를 입기 전에, 재빨리 나머지 말을 뱉어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좋은 거 아냐?”
“예?”
“넌 게임이 만들고 싶다고 했잖아.”
“아···. 네···.”
“게임이 뭔데? 세상에서 가장 잉여스럽게 시간을 날리는 방법이 게임 아냐? 운동이 되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낚시는 생선이라도 먹을수 있지 이건 먹을 것도 안 나오잖아.”
“그···그건 그런데···.”
게임 개발자가 게임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본 지수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리자, 상혁은 웃으며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들이 괜히 게이머를 오타쿠나 너드라고 부르는 게 아니지. 우린 원래 별종인 인간들이라고. 전쟁 게임을 봐. 남들은 가슴 아프고 끔찍한 게 전쟁이라고 하는데 우린 그걸 리얼하게 못 만들어서 난리인 인종이잖아. 남에 눈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게 우리한텐 재능이고 멋짐이지.”
상혁을 바라보는 지수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 상혁은, 그런 지수를 보며 그녀가 태어나서 가장 듣고 싶었던 한마디를 해 주었다.
“그리고 넌 게임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멋진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거고.”
설정을 만드는 재능.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사랑하고 그것에 살을 붙이는 재능.
상혁이 지수의 망상노트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재능이었다.
“흐···흐흑···.흐아아앙!!”
상혁의 말을 들은 지수는 고개를 숙이고는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고, 상혁은 그런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자신이 지수의 밝은 면만을 보고 너무 쉽게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고.
겨우 중학생이, 팀원도 아니면서 고집스럽게 찾아와 태연한척 자리를 잡고 뻔뻔하게 어울려 노는게, 절대 편할리 없었다.
언젠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까, 혹은 자신을 끝까지 받아주지 않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들은 중학생인 지수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심적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히끅거리며 울던 지수의 등을 두드리던 상혁은 그녀가 울음을 그치자 조용히 휴지를 들어 지수의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니가 처음 왔을 때, 내가 했던 질문 기억해? 혹시 게임 제작 관련해서 할 줄 아는 게 있냐고 물었던 거.”
“히끅···. 네.”
“그때 너는 기획도 할 줄 모르고, 프로그래밍도 할 줄 모르고, 그림도 못 그린다고 했었지.”
“···.”
“내가 그때 한 가지 질문을 못한 거 같아. 그래서 지금 다시 질문하고 싶어.”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혁이 물었다.
“혹시 기획할 줄 알아?”
“···.아뇨···.”
“프로그래밍은?”
“···못해요···”
“그림은?”
“···.못 그려요···”
“뭐 아무거나 게임 제작 관련된 기술같은 건 없어? 3D 모델링이나 애니메이션이라던가 작곡이라던가···.”
“···없어요···.”
상혁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이 첫만남때 미처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 설정 같은건 잘 짤수 있어? 세계를 만들고, 캐릭터를 창조하고, 누구보다 깊게 망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재능같은거.”
상혁의 질문을 듣는 순간, 지수는 가슴속에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터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분을 안은 채로, 지수는 가슴에 품은 너덜너덜한 노트를 꾹 쥔 채로,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삼키며, 밝은 목소리로 상혁에게 소리쳤다.
“네! 있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단순히 시간낭비라고만 생각했던 것.
그리고 상혁이 자신에게 그것도 뛰어난 재능이라고 말해준 바로 그것.
“저, 설정은 누구보다 잘 짤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녀가 억지로 연기하던 밝음이 아닌, 기쁨과 자신감으로 가득 찬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상혁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녀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한마디를 해 주었다.
“PTW에 합류한걸 환영합니다. 우리 팀의 6번째 팀원. 이지수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