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더블 캐스팅
상혁이 비록 나츠에게 받은 네트워크 어댑터의 시제품 사진을 가지고 크리스에게 협박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발매 플랫폼을 SANY쪽으로 바꿀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럴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었을 뿐.
애당초 게임 서버 자체를 MS에서 관리하는 X-BOX LIVE와는 다르게 SANY에서 나오게 될 통합 온라인 서비스는 게임사가 서버를 운영하고 SANY는 중계만 맡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에 상혁은 이번 게임을 X-BOX로 내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실제로, 서버 운영엔 돈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
유명 MMO중 하나인 ‘월드 오브 월크래프트’ 같은 경우는 하루 서버비만 1억 6천만 원씩 소모되기도 했으니.
게다가 동접자가 늘어 서버 장비를 늘릴 때도 일이 늘어나지만 반대로 동접자가 줄어도 서버 장비를 함부로 줄이기 어렵다.
그렇기에 많은 게임 회사들은 2020년대 들어서 회사 내에 자체 서버 장비를 구축하기 보다는 아마존같은 대기업에서 제공하는 클라우드 서버에 자신들의 서버를 구축하곤 했다.
그러나 2001년 현재 그런 클라우드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상혁은 MS측에 자신들의 서버 장비 구축 및 관리를 맡기려는 것이다.
상대에겐 마치 PS진영에서 온라인 서비스를 준비하는 것처럼 속이면서.
사실 지금 보여준 사진도 실제 시제품 사진이 아니었다.
그냥 제품 컨셉사진같은 건데 나츠에게 부탁해서 얻어낸 것일 뿐.
SANY의 담당자인 나츠는 ‘나이츠 어셈블’을 PS2에서 런칭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윗선에 쿠사리만 잔뜩 먹고 계약을 포기해야했다.
‘겨우 게임하나 런칭 하려고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러니까 지금은 어찌보면 크리스가 계약을 거부하는 순간, 상혁이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상혁은 절묘하게 필요한 정보를 통제하며 상대와의 협상을 진행해 나갔다.
절대 상대가 일방적인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리고 자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이 어차피 MS측에서 준비하고 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며, 상혁은 추가적인 요구사항을 조심스레 제시했다.
크리스의 염려와는 다르게 상혁은 과도한 로얄티 할인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혁이 요구한 것은, 조금 다른 종류의 조건이었다.
“PC 서버도 우리가 관리하라고요?”
“예.”
“흠···. 그건 조건이 조금···”
“아뇨. 이건 MS측에도 확실히 메리트가 있는 제안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노트북 화면을 돌려 크리스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콘솔버전에서도 시나리오 에디터를 지원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에디터 자체는 PC판이 훨씬 편하죠. 플레이는 콘솔이 좀 더 편하고요.”
“그렇죠.”
“저희는 PC판에서 에디트한 시나리오를 콘솔버전에서 불러올 수 있게 할 겁니다. 그리고 콘솔 유저와 PC유저가 게임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거죠.”
상혁이 이야기하는 것은 크로스 플랫폼이었다.
당시에는 매우 실험적인 기술로 콘솔에서는 단 한 번도 시험된 적이 없는 개념.
애당초 고속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게임자체가 발전을 하기 시작한 직후의 시대라 크로스 플랫폼 자체가 시대를 크게 앞서나가는 시점이기도 했다.
PS2는 3만번대 기기가 나오기 이전엔 아예 인터넷 접속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 PC와 콘솔 게이머가 같은 서버에서 게임을 하는 것 자체가 그 당시로써는 매우 실험적인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혁은 지금, MS측에 자신들이 그것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확실히 그런 제안이라면 메리트가 있네요. 그러니까, PC유저들이 만든 시나리오를 콘솔유저들이 플레이하고, 반대도 가능하다는 건가요?”
“예.”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MS쪽에서도 그걸 위해서 .NET Framework 베타버전을 발표했잖아요?”
“아 그런 게 있었나요?”
“물론 그거 갖고 지금 풀크로스플랫폼을 구현하는 건 무리니 저희 쪽에서 아예 새로 구축해야겠지만요.”
“엑?! 그런 게 가능한 개발자를 구할 수 있어요?”
“구할 필요 없어요. 저기 앉아있잖아요.”
상혁이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자 그 방향에 앉아있던 민준은 어깨를 으쓱 하더니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민준 씨라고 했었나요? 저분이 그런 대규모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고요?”
“뭐 그쪽에서 서버 장비 구축만 제때 해주시면요.”
사실 준비 자체는 지금 현재 체험판 서버 운영을 위해 돌리고 있는 서버 장비에 다 올라가 있는 상태였기에, 장비만 갖춰지면 그리 많은 작업이 필요한건 아니었다.
그러나 상혁은 그 사실도 숨기고 마치 선심을 쓰는 것처럼 이야기를 해 크리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장비만 갖춰 주시면 저희 천재 코더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오늘 미팅을 종료하고 제가 윗선에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해보죠.”
“그렇게 하죠.”
크리스가 고개숙여 인사한 뒤 게임부를 나가자, 민준이 상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수고했어.”
“휴, 내색은 안했지만 솔직히 좀 긴장했다. PS2쪽 발매가 완전 나가리 돼서.”
“나츠 씨는 뭐래?”
“어떻게든 조건 맞춰주려다가 윗선에 엄청 쿠사리 먹었다고 복수해달라던데?”
“나츠 씨도 힘들겠네.”
“뭐 윗대가리들이 현장 판단 무시하는 거야 업계에서 보기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럼 아예 MS진영으로 확정한 거야? 앞으로도 계속?”
“아니? 그건 아니지. 단지 이번 게임이 북미나 유럽권 게이머를 타겟으로 만들어졌으니 거기 더 맞는 서비스 형태를 찾은 것뿐이고 다음에 만들게임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발매 콘솔은 변경할 수 있지. 일단 지금은 X-BOX쪽 발매에 집중할 생각이야. 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좋아. 하지만 지금 우리가 먼저 처리해야할 일이 있어.”
“뭔데?”
“지금 빈교실에 구축해놓은 서버 장비가 동접자 증가를 못버틸 거 같다.”
“벌써?”
“니가 그 어그로성 강연을 한 이후로 동접자가 폭발하고 있거든.”
“미안하다. 동접자 늘리려고 어그로 끌었다.”
“시끄럽고 장비나 더 주문해줘.”
“알았어.”
상혁은 서버 장비를 주문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고는 전화를 걸었다.
어찌되었건 MS측에서 서버를 구축해 주기 전 까지는 자신들이 구축한 서버에서 유저들이 게임을 해야 했으니까.
***
호텔로 돌아간 크리스가 계약의사를 타진해 온 것은 미팅이 있던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다.
결과는 상혁의 제안을 100% 수용한다는 것.
결과가 결정 되었으니 진행 자체는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다.
상혁이 공태규 변호사를 통해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크리스가 본사 법무팀에 보내 검토하게 하고, 검토가 완료되자 크리스는 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한 뒤 미국 본사로 돌아갔다.
아무리 팀장이라지만 게임 계약 하나를 위해서 2주 가까이 회사를 비운 것이었기에 급하게 돌아갈 필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이제부터 개발의 바톤이 MS측에 넘어갔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미 나이츠 어셈블의 개발진도는 90%를 초과하고 있었고 남은 것은 MS측에서 준비한 장비에 게임 서버를 구축하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E3와 어그로성 강연을 통해 세간의 시선을 끌어 마케팅도 어느정도 되어있는 상태였고 이제는 체험판 유저들이 입소문으로 새 유저를 끌어들이고 있는 단계였기에 상혁은 남은 시간을 게임의 완성도를 올리는데 쓰기로 결정했다.
늘 그렇지만 무언가에 집중할 때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동안 상혁은 정말 많은 일을 처리해야했다.
북미 쪽에서 크리스가 가교를 맡아 진행 중인 서버 관련 문제도 해결해야했고, 엄청나게 많이 들어갔지만 상혁의 눈에는 아직도 부족해보이는 컨텐츠 문제도 해결해야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버그를 수정하고 스크립트를 다듬으며 팀원들을 다독인다.
게임 패키지 디자인을 결정하고 각종 청구서를 처리하고 외주 작업 지시를 내리고 성연이 작곡한 음악을 컨펌한다.
그렇게 바쁜 상황에서, 현재는 평소라면 상혁이 밑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민준까지 부재중인 상황이었다.
크리스가 너무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바람에 예상 시점보다 빠르게 북미쪽 서버 장비들이 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원격으로 일하는것도 가능했지만 북미와 한국의 시차 때문에 민준이 북미 쪽과 실시간으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밤을 새야하는 경우가 많았고, 상혁은 민준의 눈 밑에 점점 쌓여가는 다크서클을 보다못해 민준을 북미 MS 로 파견 보낸 상황.
상혁은 그래도 만족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진행 중인 대부분의 일들은 자신의 예상 범위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전에 ‘마리의 눈물’때처럼 외부적 요인이 게임 출시를 압박하는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고 외주자들도 의욕적으로 결과를 내고 있었으며 민준이 파견간 이후로 북미에서도 별다른 이야기가 전달되고 있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경우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자신에게 무언가 연락이 오지 않을만큼 민준이 현지에서 작업을 훌륭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 였으니까.
오히려 최근 상혁을 괴롭히는 이슈는 개발관련 이슈가 아니라 다른 이슈였다.
노이즈 마케팅을 위해 펼쳤던 지난 강연 이후로 천하대쪽에서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는 상혁은, 그런 현재 상황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또 전화 왔는데, 어떻게 해줘?”
마침 손이 비어있던 현주가 무심코 받은 전화의 주인공이 천하대 총장 임하균이라는 사실을 전달 받은 상혁은,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제스쳐를 취하며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없다고 해줘요.”
“흠. 잠깐만? 여보세요? 아, 총장님. 죄송해요. 마침 상혁이가 부재중이네요. 예? 뭐라고요? 흠···잠시만요···. 이번에도 통화 안 되면 아예 여기로 찾아온다는데?”
“하아···.전화기 주세요.”
상혁은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현주에게서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전화 바꿨습니다.”
“오! 상혁 씨! 전 영락없이 상혁 씨가 제 전화를 피한다고 생각할 뻔 했습니다.”
“피한 거 맞아요.”
“하하 언제나 그렇듯 스트레이트로 상대를 찔러가는 상혁 씨의 화법은 저를 유쾌하게 하는군요!”
“저 바쁜데 용건만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아, 물론 바쁘시겠죠. 그 유명한 대기업 MS와 함께 게임 출시를 준비중이실텐데.”
“말씀안하시면 끊습니다?”
“아, 잠시만요.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저번에 제안하신 입학 건이라면 아직 고민 중이에요.”
“빠르게 결정해야 저희도 움직일 수 있어서요. 그걸 어떻게 좀···.”
“그래도 대학교 가면 4년은 박혀있어야할텐데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죠.”
임하균이 요즘 상혁을 꼬드겨 제안하고 있는 것은, 새로 신설될 게임제작과에 상혁이 입학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청소년 기업인 특별전형’ 이라는 희대의 입학전형까지 만들어가면서.
일반적인 고등학생이라면 낼름 받아들일 조건이었다.
애당초 성적도 무시하고 상혁과 민준 두 사람만 입학 가능한 특별전형으로 학과까지 신설해서 대학 졸업증을 주겠다는 거니까.
그러나 그런 사탕발림에 넘어가기에는 상혁의 사회생활 경험이 너무 길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자기 이득을 추구하게 마련이지.’
임하균의 노림수를 예측하는 것은 상혁으로써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고교 3년간 게임을 3개나 만들고 2개를 런칭시킨 프로개발자.
E3에서 주목을 끌고 현재 게임 업계 종사자들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천재 소년.
외국 게임잡지에도 종종 실리는 이 젊은 영재가 천하대 출신이라는 것은 천하대 입장에서 매우 뛰어난 메리트를 가진다.
우선 대부분의 CEO가 그러하듯 나중에 상혁이 창업을 하게 되면 같은 학과 동문들이 취업할 때 보너스를 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 게임산업이 매우 커져가는 시점에서, 이상혁같이 개발력이 검증된 인원이 학과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신설할 게임학부의 명성이 크게 높아진다.
그 외의 여러 메리트를 감안하면 임하균 입장에서 상혁은 반드시 학교로 데려와야 하는 영재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상혁 역시 그런 그의 속내를 모두 알고 있었기에 협상은 생각보다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
“원하시면 현업출신 개발자를 외부 강사로 초빙해서 강연도 하겠습니다.”
“저도 현업출신 개발자인데요.”
“외국 명문대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공한 박사를 교수로 모시겠습니다.”
“코딩은 민준이가 더 잘할 텐데요?”
결국 임하균은 품위있는 논의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는 직설적으로 제안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냥 사무실값 아낀다 생각하고 들어오시죠. 학교 다니는 동안 저희측에서 기숙사와 등록금, 전기료와 설비비도 다 지원할 텐데요.”
“딱히 돈이 없는 게 아니라서···.”
“입학하시면 일단 군대도 미루실 수 있는데···.”
군대 문제.
하균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상혁은 자신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커다란 문제를.
그것은 자신과 민준이 고등학생으로 회귀하면서 생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짐이었다.
‘아 시발 그러고 보니까 군대 두 번 가게 생겼네?’
갑자기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국방의 의무를 떠올리며, 상혁이 수화기를 향해 말했다.
“조건에 대해 다시 협상해보죠.”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회귀 이후 승승장구중인 상혁조차도 군대를 두 번 가는 것은 꺼림찍할 수밖에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