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파란의 예감
“잠깐만요, 오빠는 고등학생인데 대학교 강연을 나가요?”
“뭐, 고등학생이긴 하지만 미국 게임 잡지에 실릴 정도로 잘나가는 개발자이기도 하잖아.”
서연은 상혁이 고교 시절에 이룬 업적을 떠올려보았다.
분명 한국에서도 잡지에 몇 번 실린 적이 있고, 일본에서도 절찬리에 판매중인 게임을 개발한 고등학생.
늘상 얼굴을 맞대는 팀원들로써는 체감하기 힘들지만, 상혁의 이름은 나름 게임 업계에서 핫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었고, 이번의 투표도 그 결과가 반영된 것이었다.
“오···. 멋지다!! 대학교 강연도 가시고! 부러워요!”
서연이 호들갑을 떨자 상혁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부러워할 거 없어. 교수된 것도 아니고, 그냥 가서 이야기하는 건데.”
“그래도···.어, 근데 그 정도면 입학제의같은 건 안 왔어요?”
“오긴 했는데···.”
“했는데?”
“거절했어. 대학교 갈 생각 없어서.”
“어?! 왜요?! 천하대면 명문대잖아요?”
“거기 게임학과가 없더라고.”
“아···.”
“만들어준다고는 했는데···.”
“엑?! 오빠 입학시키려고 학과를 새로 만든다고요? 근데 왜 거절했어요?”
그러자 이번엔 민준이 그 질문에 답했다.
“지금 현업 개발자 제외하면 한국에 상혁이한테 기획 가르칠 사람이 있겠냐?”
그러자 서연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네요···. 엘란테 기획팀장이라는 분도 상혁오빠한테 꼼짝도 못하던데···.”
“뭐, 일단은 고졸로 가려고. 서연이 너는 1년 더 학교 다녀야하잖아. 먼저 나가서 건물도 구하고 회사 차려서 너 기다려야지.”
“헐···. 오빠···.그런 생각을···.”
“아, 너 대학교 가고 싶으면 그건 기다려줄 수 있는데···.”
“그건 고민 좀 해볼게요.”
사실 대학교를 졸업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어찌보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기에, 서연은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이대로 상혁과 함께 게임을 만드는 것도 즐겁겠지만, 대학 생활이란 것에 대한 동경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민준이 상혁을 보며 말했다.
“근데 귀찮은 거 싫어하는 니가 용케 허락했네?”
“아, 그건 나 때문.”
상혁이 대답하기전에 현주가 손을 들며 민준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대학 음악과 출신이잖아. 전에 플래시 몹 이벤트 할 때 교수님한테 부탁해서 연주자 모았었거든. 그 교수님이 부탁해온 거라 상혁이한테 부탁한 거야.”
“뭐,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죠.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까.”
“흠···. 근데 강연 주제는 뭘로 할 거야?”
사실 회귀 전에도 상혁은 대학교 강연같은 데는 가 본적이 없었다.
그때는 무명 개발자였으니까.
그렇기에 상혁은 이런 경우에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고민 중이에요.”
솔직히 선생인 현주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움 받은 것도 있고, 현주의 체면도 살려 줄 겸 허락한 것인데 딱히 강연할 만한 내용이 없어서 상혁은 강연 주제 선정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냥 적당히 기획서 잘 쓰는 방법 같은 건 어때? 너 기획서 잘 쓰잖아.”
“기획자 아닌 학생도 있을 텐데?”
“그럼 게임 잘 만드는 방법?”
“게임은 나 혼자 만드냐? 그리고 난 게임을 잘 만드는 타입이 아니라고.”
“엑?! 오빠가요?”
“야, 세상 모든 사람이 나처럼 지 꼴리는 대로 게임 만들면 게임판은 망할걸?”
“하긴, 괴식도 가끔 나와야 괴식이지 맨날 나오면 그건 그냥 영국요리같은 게 되겠네.”
“그렇지···. 어? 시발 그래도 내 게임을 영국요리에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
“그래서, 결국 강의 주제는 뭘로 할 건데?”
“뭐, 이쪽에서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요청한 거니까 굳이 거창하게 준비할 필요는 없겠지.”
“그럼···?”
“일단 가서 자기소개 대충하고 Q&A로 때울 거다!”
“오 마이 갓···.”
***
한편 상혁과 민준이 그렇게 꽁트를 찍고 있던 그 시각, 게임부에서 나와 호텔로 향한 크리스는 전화기를 붙잡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네 지금 그 제안을 성사시키는데 돈이 얼마가 들어가는지 알고 하는 소린가?”
“하지만 어차피 계획에 있던 거 일정을 당기는 거라고 생각하면···.”
“인간아! 그 일정을 당기는데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 거라고! 겨우 게임 하나 계약하자고 그 비용을 들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쪽에서 약속한대로 pc버젼 출시일을 늦춰주면 저희쪽 에 확실한 메리트가···.”
“시끄럽고, 그 조건은 절대 들어줄 수 없으니까 로얄티 할인 조건으로 계약을 하던 개발 툴킷을 지원해주는 조건을 걸던 무조건 다른 조건을 걸라고!”
“후···. 알겠습니다.”
이미 이야기를 꺼낸 시점에서 무리인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까일 줄은 몰랐던 크리스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들고는 상혁에게 통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저 오늘 방문했던 마이크론 소프트의 크리스입니다. 아까 제안하신 조건말인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서요···. 내일 만나서 다른 조건으로 조정을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상혁의 곤란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그건 좀 어려울 거 같은데요. 내일은 제가 대학교 강연에 가야해서요.”
상혁의 이야기를 들은 크리스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대한민국에 상혁 수준의 개발자를 가르칠만한 사람이 있던가?라는 의문이.
“강연이라면···. 누구 강의를 들으러 가시는 건가요?”
“들으러 가는 게 아니라 하러갑니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받아서요.”
“아···.”
고등학생이 하는 대학교 강연이라니, 재미있는 풍경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소를 지으며 머릿속으로 상혁이 강연하는 모습을 떠올리던 크리스는 순간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쩌면 계약에 도움이 되는 정보가 나올지도 모른다.’
분명 게임 개발자를 초청하는 강연 자리니 개발 이야기가 메인이 될 테고, 그럼 개발 중의 에로사항이나 게임에 대한 가치관같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정보 중에 어쩌면 자신이 제공할 수 있으면서 회사측에서도 감당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크리스는 상혁에게 제안을 던졌다.
“혹시 저도 가도 될까요?”
“예? 크리스 씨가요?”
“예. 상혁 씨가 하는 강연이라니 저도 한번 보고 싶네요.”
“에···. 뭐 어려울 건 없지요. 그럼 함께 가시죠.”
“감사합니다.”
“여기 지리는 잘 모르실테니 그럼 1시까지 오늘 오셨던 게임부 부실로 오시겠어요? 여기서 함께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배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크리스는 상혁과의 통화를 종료한뒤 호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시차가 반대인데 무리하게 도착하자 미팅을 했던 반동때문인지 몸에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일단 자자.”
좀 더 맑은 정신으로 내일 강연에 참여하기 위해 크리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공과계열에서는 명문으로 꼽히는 천하대학교에서는 1년에 두 번, 학생들의 투표를 통해서 사회 유명인을 초청하여 강연을 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전통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젊은 기업인이 초대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온갖 분야에 뻗쳐있는 천하대 인맥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초청이기에 딱히 강연자를 구하는 게 어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청받은 사람도 자신이 선정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이 행사의 역사나 명성은 깊은 편이었다.
단지 올해는 조금 분위기가 달랐는데, 평소보다 매우 특별한 행사가 될 것이란 소문이 천하대 곳곳에서 돌고 있었다.
‘천하대 강단에 고등학생이 선다.’
전례 없는 일이기에 교수들도 처음엔 반대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상혁이란 애송이가 뭐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학생들의 전폭적인 투표로 1등으로 뽑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연자로 뽑힌 이상혁이라는 고등학생에 대해 알아보면서, 교수들도 나중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돌아이던가, 아니면 천재던가.’
한국에도 나름 게임개발자는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단기간에 자기 길을 개척하며 국제 무대에서 뛰는 인물은 그리 많치 않았다.
게다가 고1때부터 게임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는 베짱이라던가, 고등학생이 E3에 참가해서 이벤트로 이슈를 일으키는 등의 행동을 볼 때 충분히 투표를 받은 이유를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젊은 사업가가 아니라 어린 사업가가 되겠지만 충분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결국 상혁의 담임 선생과 인연이 있는 음악교수의 제안으로 강연이 성사되었고, 그 결과로 지금 강당은 학생들로 인해 가득 차 있게 되었다.
오히려 호기심 때문인지 평소에 다른 명사를 초대했을 때보다 인원이 많이 몰려 있는 모습을 보고 화학과 교수 이경철은 혀를 차며 불평을 터트렸다.
“에휴, 요즘 애들은 게임이니 뭐니 그런 거에 미쳐가지고···.”
그러자 현대미술을 가르치는 오한수 교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보통은 강연자와 관계 있는 학과의 학생들이 주로 오는데, 오늘은 좀 많이 섞여있네요.”
“뭐, 게임은 종합 엔터테인먼트니까요.”
컴퓨터 공학과 박창준 교수가 말했다.
“게임엔 음악도, 프로그래밍도, 기획도, 마케팅도, 시나리오도, 연극도, 그림도 필요하죠. 그러니까 저렇게 많이 모인 거 아니겠습니까?”
“박교수님은 좋겠습니다? 요즘 게임업계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컴공과 지원율도 높아졌다면서요?”
“그것도 잠깐이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게임학과를 따로 만들 거라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박교수가 겸임하면 되지 않아요?”
“저는 프로그래밍만 할 줄 알아서···.”
“뭐, 어찌됐건 재미있는 일이네요. 천하의 천하대 강단에 고등학생이 연설자로 서는 건 처음이니까요.”
“그러게요.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합니다.”
마침 게임이 한참 주목받고 있는 뜨고 있는 신 사업이기에 강단에는 교수들도 꽤 많은 사람이 구경을 하러 온 상태였다.
그리고 그 시각, 오늘 강연의 당사자인 상혁은 크리스와 함께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저기···. 어떻게···. 차는 입맛에 맞으십니까?”
“네. 맛있네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나이차가 30년이 넘는데···.”
“허허···. 그래도 그건 아니죠. 상혁씨는 저희 대학교에서 초대한 손님이니까요.”
눈앞의 나이든 노인이 깎듯한 말투로 상혁에게 말했다.
솔직히 처음에 고등학생이 강연자로 뽑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총장인 임하균은 적잖히 상혁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만드는 것도 애들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인 오락이나 만드는 고등학생이니 대단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상혁이 데려온 금발머리 외국인이 자신을 소개하는 말을 듣고 그 생각은 이미 싹 날아간 이후였다.
“마이크론 소프트의 게임 산업부 영업팀 팀장 크리스 레드포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려 세계 굴지의 대기업 마이크론 소프트에서 상혁의 강연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으니, 아무리 최신 트렌드에 둔감한 하균이더라도 그 대단함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눈앞의 녀석이 거물일지 모른다.’
라는 생각이 하균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하균은 이전에 상혁에게 던졌던 제안을 다시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 흠···. 상혁 씨? 혹시 전에 했던 제안은 생각해 보셨는지?”
“입학요?”
“예.”
“게임학과가 없다면서요?”
“그거야 만들면 되는 거고···.”
유명인이 모교 출신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메리트를 준다.
아무래도 사회에 나가서도 모교 출신이면 점수를 좀 더 쳐주는 사회 풍토도 그러하고, 무엇보다 떠오르는 IT업계의 스타가 천하대학 게임학과 출신이라고 밝혀지면 그것만으로도 학생이 넘치게 몰릴테니까.
결국 대학교라는 것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다.
인기 많은 메뉴를 갖추는 것도 그 서비스업의 기본이기도 하고.
그러나 눈앞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는 소년은 그런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좀 더 고민해볼게요.”
“저희도 학과를 신설하려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교수도 찾아야하고, 커리큘럼도 짜야하니까요. 가급적이면 빠른 답변이 좋을 것 같은데···”
“좀 더 고민해볼게요.”
상혁이 톤 하나 바꾸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자, 하균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제안을 거둬들였다.
“좋습니다. 오늘 방문의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요. 그것보다 강연 내용 말인데, 어떤 내용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상혁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청중으로 모인 학생들은 대부분 게임 제작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거나 게임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일 터.
그렇다면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강연 주제는···.”
“주제는?”
“don’t be evil 로 하죠.”
“don’t be evil 요?”
“앞으로 게임업계에 다가올 거대한 흐름에 대해 이야기 할까 합니다.”
상혁이 오늘 강연에서 이야기 하려는 것.
그것은 앞으로 대한민국 게임계, 아니 전세계 게임계를 덮을 거대한 악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