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E3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
매년 E3행사가 열리는 이곳에는 올해도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쇼를 위해 수많은 기자들과 업계 관계자들이 몰려 있었다.
유저 친화적인 성향의 다른 게임 쇼와 다르게 B2B(business-to-business)성향이 강한 E3는 기본적으로 참가인원의 유형부터 다른 게임쇼와는 꽤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애당초 제한된 숫자만 입장 가능한 일반 참가 인원을 제외하면, 오직 초청장을 받은 인원만 참가가 가능하다는 점도 그러하고, 참가 인원의 대부분이 ‘할 만한 게임’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사거리’나 ‘투자할 만한 게임’을 찾는 것도 그러했다.
그리고 올해로 기자생활 6년차를 맞이하는 게임기자 리차드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명이었다.
‘괜찮을만한 기사거리.’
일반적인 시선으로 볼 때 최근 E3는 기사거리가 넘치는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우선 SANY부스에서 공개된 차세대 기기용 ‘모탈 기어 솔리드2’도 그렇고, ‘C&C 레드2’나 ‘마블VS캡콤’도 괜찮은 소재거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올해 행사에서 그 대형기업, MS가 X BOX의 초기 개발 버전을 공개하면서 행사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사거리들은, 리처드의 시선에는 조금 모자란 느낌이 들고 있었다.
‘신선함이 부족해.’
차세대 기기용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모탈기어 솔리드’ 역시 전작의 후속작이고 ‘레드’도 마찬가지.
이번에 SANY 서드파티 자격으로 참가했다는 PTW라는 팀이 잠깐 이목을 끌었으나 잠시 뿐이었다.
지금 시대에 도트그래픽 RPG라니, 아무래도 게임역사에서는 후진국 축에 속하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만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왠지 시대를 역행하는 느낌이라 리차드는 부스 근처에서 시연중인 게임화면을 보자마자 깔끔하게 관심을 끊고 다른 부스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찾아간 화장실에서, 리차드는 이제까지 E3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물건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게 뭐지? 판촉물인가?”
아마도 어느 부스에서 나눠준 판촉물을 누군가가 화장실에 실수로 놓고 간 모양이었다.
“퀄리티는 좋네.”
딱 게이머들이 좋아할만한 모양새의 외형을 갖춘 그 판촉물은 마치 한권의 마법서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책’이 아니라 ‘마법서’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 책이 풍기는 이미지가 연상시키는 단어가 마법서라는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낡은 효과를 준 듯한 외형의 가죽자켓에 테두리에 씌워진 금속 테두리, 양각으로 불룩불룩하게 씌워진 장식까지 완벽하게 ‘이 책을 가지고 있으면 넌 세상의 주인이 되리라’ 라고 어필하는 듯한 외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리처드의 마음속에 있는 게이머의 강한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내껀 아니지만···.’
주인을 찾아주더라도 잠깐 보는 것은 죄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리처드는 책을 펴서 안의 내용을 보았다.
그리고는 책 첫머리에 쓰여진 글귀를 읽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 행사장에 숨겨진 800권의 이벤트 룰 북 중 327번째 룰북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부스에서 나눠준 판촉물이 아니라 특정 부스 측에서 일부러 행사장 곳곳에 숨겨놓은 이벤트 상품이었다.
거기에 흥미를 가진 리처드는 룰북에 영어로 쓰여있는 소개페이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소개페이지는 일어/독일어/영어/프랑스어/한국어의 5가지 언어로 쓰여 있었고 각 페이지별로 색이 달라 쉽게 자신의 언어를 찾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누가 주울지는 몰라도 웬만한 수요에 대응하겠다는 생각이군. 괜찮은데?”
뒤를 읽어나가자 리처드는 배포측에서 하려는 이벤트가 어떤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무려 총상금 1억이 걸린 오프라인 이벤트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800개의 룰북중 하나를 소지하신 분께서는 총상금 10만달러가 걸린 이벤트에 ‘마스터’로써 참여하실 수 있는 기회를 받게 됩니다. 행사장 안에서 함께 플레이할 4명의 ‘플레이어’를 모아 B2B 세션에 있는 ‘PTW’ 부스로 와서 행사에 참가하세요!]
이벤트의 내용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마스터가 4명의 플레이어를 모아서 부스에 온다.
그리고 첨부된 약식 룰북을 사용하여 D&D를 플레이하면 끝.
개시 시간 이후 가장 먼저 정해진 시나리오를 완료하는 팀이 승리하며 상금은 마스터가 5만 달러, 나머지 인원이 1만 2천 달러씩을 나눠가진다.
‘이건 내꺼다.’
D&D야 초등학생 때부터 줄창하던 게임이었으니 플레이어만 모으면 상금을 탈 수 있다고 생각한 리차드는 바로 함께 E3에 참가한 후배에게 전화를 걸려했다.
그러나 그 순간 리차드는 후배가 건 전화에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아야했다.
“리차드 씨! 혹시 D&D할 줄 알아요?”
“이런 젠장, 너도 주웠냐?”
“혹시 리차드 씨도?”
***
결국 리차드는 후배와의 연합을 포기해야했다.
마스터로 참가하면 상금이 4배인데 누구 한명이 쉽사리 포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차드는 열심히 행사장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일단은 게임잡지 기자니까, 기업 부스 참가한 직원들과 안면도 있고 하니 쉽게 사람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 D&D할 줄 모르는데요?”
“내가 가르쳐줄게, 12,000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잖아? 어차피 캐릭터 시트도 미리 짜여 있고 30분 정도면 깰 수 있는 시나리오니까 잠깐만 같이 하자고.”
“그래도···.”
“젠장, 혹시 부스에 D&D할 줄 아는 직원 없어?”
“아까 누가 불러서 가던데요?”
그제야 리차드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애당초 이 책 자체가 800권이 행사장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그 말은 지금 이 넓은 행사장에 800명의 ‘마스터’들이 ‘플레이어’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리차드는 다시 다음 사람을 찾아 부스를 떠났다.
어떻게든 인원을 모아 상금을 타기 위해서···.
***
“오 하느님 맙소사, 이 인원이 다 참가인원이라고?”
돈의 힘은 위대하다.
물론 예상보다 많은 참가인원의 이면에는 상혁이 미리 깔아둔 계산도 적용하고 있었다.
우선, B2B 부스에 참가한 인력의 대부분이 게임 업계에 종사하는 일반 직장인이라는 것.
그 덕에 퍼블리셔 인원이든 게임 기자든 이 이벤트를 취재나 조사의 일환으로 생각하여 참여 장벽이 크게 낮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둘째로 일반 배포가 아닌, 일부러 발견할 수 있는 장소에 판촉물을 두어 ‘기회를 잡았다’라는 느낌을 준 것.
마지막으로, 배포물의 퀄리티에 엄청난 신경을 써 설사 D&D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번쯤은 부스를 찾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
그 모든 안배가 합쳐져, 행사가 시작되는 시간 즈음엔 PTW의 부스 주변이 마치 대형 업체의 부스 수준으로 인원이 몰려있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리처드는 이 부스의 주인들이 꽤나 머리를 굴렸음을 인정해야했다.
비록 게임 자체는 좀 낡은 느낌의 도트 그래픽 RPG였지만···.
어찌되었건 이제 곧 행사 시작이기 때문에, 리처드는 힘들게 모아온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앉을만한 테이블을 찾기 시작했다.
부스 넓이를 볼 때, 도저히 이 인원들이 동시 참가 가능한 공간이 안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부분 역시 이미 계산 되어있었는지, 진행은 동시 진행이 아닌 ‘타임어택’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참가중인 인워들의 모습이 여러개의 모니터로 방송되고, 플레이 시간이 기록되어 실시간으로 전광판에 표시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첫 번째 그룹에서 가장 빠른 클리어가 나왔을 때, 나머지 팀이 플레이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참가인원이 적네요.”
리차드의 제안을 거절하고 직접 마스터로 참여를 선언한 후배 리로이가 돌아보며 말했다.
“상금이 세긴 한데 아무래도 여기 참여한 사람들 중에 D&D에 익숙한 사람도 한정되어있고, 애당초 플레이어 4명을 모으는 게 쉽지 않으니까.”
“기껏 이정도 홍보물도 만들고 이벤트도 했는데 실패한 이벤트가 되겠군요.”
“실패한 이벤트라고?”
리차드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니 눈에는 이게 실패로 보여?”
애당초 참가가 가능한 인원을 모으지 못한 사람들도 가슴에 룰북을 안은 채 행사를 구경하고 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벤트를 진행하는 게임이 어떤 게임인가 궁금해서 시연 부스에서 게임을 플레이 하고 있었다.
이건 애당초 주최 측에서 800명의 전원 참가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이슈만을 위해서 이벤트를 진행했다는 증거였다.
“어찌됐건 집에 가져가서 장식하고 싶을 만큼 멋진 판촉물이고, 그걸로 흥미를 끌어온 시점에서 이미 이 이벤트는 성공한 거나 다름없어. 그리고 저걸 보라고.”
리차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엔 한참 플레이를 하고 있는 파티가 있었다.
그리고 그 파티는 마치 진짜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주사위를 굴리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애당초 D&D플레이 좀 해본사람이면 알겠지만 여기서 제공하는 시나리오 자체에 배정된 몬스터 밸런스가 어느 정도 크리티컬이 터지지 않으면 클리어가 불가능한 난이도로 짜여있다고. 그러니까 주사위 하나 하나 던질 때마다 조마조마 한거지.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려있으니까.”
실제로 시간을 달성 못해서 중도 이탈하는 파티보다, 중간에 파티원이 죽어서 포기하는 파티가 더 많았다.
“어찌됐건 저런 풍경은 옆에서 볼 때 굉장히 즐거워 보이잖아?”
“예. 재미있어 보이네요.”
“처음 참여하는 기업에서 부스 관람자를 이정도로 흥분시킬 이벤트를 기획했다는 거 자체가 엄청난 거라고.”
그렇게 말한 리처드가 힘들게 모아온 멤버들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미안하지만 저희는 참가를 포기해야겠네요. 도저히 저 타임엔 클리어가 안 될 것 같아요.”
“에엑?! 그럼 상금은요?”
“어차피 참가해도 못딸건데 그냥 포기하죠.”
“으으···. 아까운데···.”
“선배, 포기하시게요? 5만달러나 되는데요?”
“지금 5만달러가 중요한 게 아냐.”
이정도 행사를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팀이다.
그것도 게임의 컨셉과 정확히 일치하는 행사를.
그것을 본 리처드는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수정했다.
애당초 도트로 이루어진 그래픽 역시 시대에 뒤떨어지는 그래픽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이 장르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의 취향을 꿰뚫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는, 게임 잡지의 기자로써 이 게임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겠다는 강한 직감을 느꼈다.
대박의 기운? 아니면 조짐? 무엇이라 불러도 좋지만 절대 무시할 수는 없는 강한 예감.
그것이 리차드로 하여금 5만달러의 상금을 포기하더라도 남들이 움직이지 않는 지금 리차드를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인터뷰를 따야겠어. 지금 당장.
너도 따라와.”
“엑?! 전 상금 받고 싶은데요?”
“부장님께 보고한다?”
“젠장. 알았어요.”
그렇게 리차드는 투덜대는 리로이를 데리고 PTW의 부스로 향했다.
이 게임을 준비한 관계자들을 만나 게임에 대해 듣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