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게임 컨셉팅
“드라마요?”
상혁의 이야기를 들은 서연이 물었다.
상혁이 코즈에와의 대화 중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방안을 방방 뛰어다니더니, 아마도 지금 게임에 드라마가 부족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상혁은 서연과 그 옆에서 궁금해하는 코즈에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주었다.
“혹시 ‘고스트 오목왕’이라는 만화 알아?”
“당연하죠! 올해 나온 만화 중에 인기 최고인데.”
“거기 보면 주인공이 다락방에서 오래전에 오목하다 죽은 귀신을 만나잖아?”
“그렇죠.”
“만약에 그게 아니라 아무 재능 없는 주인공이 처음부터 오목을 배우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어때?”
잠시 생각하던 서연이 말했다.
“···평범하네요···. 아, 그럼 우리 게임도?”
“맞아. 사람들은 특별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길 원하니까.”
“그럼 어떻게 고치시려고요?”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코즈에 씨, 혹시 노트랑 펜 있어요?”
코즈에가 노트와 펜을 가져다주자, 상혁은 노트에 그림을 그려가며 서연과 회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코즈에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저는 뭐 간단히 먹을거라도 준비해 올게요.”
잠시 후.
코즈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음식을 옆에 두고 두사람이 하는 작업을 구경하며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게임이나 만들어볼까.’
지금까지 동인지는 작업했어도 게임을 만들어볼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그녀였지만, 옆에서 보는 상혁과 서연의 회의는 굉장히 재미있어 보였다.
정말로 자신도 저 사이에 끼어들고 싶을 정도로.
***
결국 상혁은 남은 기간 코믹 참여를 포기했다.
대신 마찬가지로 관광을 포기한 서연과 함께 기획 수정에 들어갔고, 민준이 작업을 마칠 것이라 예상했던 일주일째가 되는 날 상혁도 모든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 일주일동안, 민준은 일본의 업체에서 마련해준 별도의 숙소에서 지내기로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첫날부터 그냥 그쪽 전담 프로그래머 집에서 같이 먹고 자며 작업을 한 모양이었다.
사실 상혁도 멀쩡한 호텔 놔두고 거진 코즈에의 집에서 보냈기 때문에, 실제로 이번에 일본에 온 멤버 중에 제대로 관광을 즐긴 멤버는 한명도 없었다.
인솔자로 와놓고 혼자 관광하러 다닌 현주를 제외하면.
“으어어! 다들 안색이 어째 여행 오기 전보다 더 피폐해진 것 같은데?”
“선생님은 잘 노셨나 봐요?”
“그럼! 아주 잘 놀았지! 오호호호!! 여행은 남의 돈으로 가는 게 제일 재밌는 법이란걸 이번에 깨달았다니깐?”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상혁은 공항까지 배웅을 위해 따라 나온 코즈에를 보며 말했다.
“일주일동안 신세 많이 졌어요. 코믹 건도 그렇고, 기획건도 그렇고.”
“덕분에 저도 많이 배웠으니까요. 게임 제작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나중에 게임팀이나 한번 꾸려보려고요.”
“그럼 그때 연락주시면 많이 도와드릴게요. 언니!”
옆에서 서연이 끼어들자 코즈에가 활짝 웃었다.
일주일동안 많이 친해져서 그런지 언니 동생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좋으면 일주일 더 있던가?”
“에이, 언니도 좋지만 빨리 한국 가서 수정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데요?”
“그럼 가자. 일주일동안 감사했어요.”
상혁이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자, 저 편에서 민준에게 90도로 인사를 하고 있는 일본 쪽 프로그래머가 보였다.
서연과 마찬가지로 저쪽도 뭔가 관계를 맺은 것 같기는 했는데···.
“스승님. 다음번엔 언제 오시나요?”
“엑!? 제가 훨씬 어리니까 스승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어휴, 민준 상이 아니면 누굴 스승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이제 저보다 PS2 포팅도 더 잘하시잖아요.”
“그래도 작업은 거기 맡길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전 가서 저 빌어먹을 팀장 놈이 바꿔놓은 기획에 맞춰서 신작 작업해야하거든요.”
“그냥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저희 사장이 좀만 통이 더 컸으면 억대 연봉을 드려서라도 붙잡고 싶은데 말이죠.”
“뭐, 다음 작품도 PS2 발매하게 되면 또 뵐 수 있겠죠.”
그렇게 말한 민준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상혁이 있는 곳으로 왔다.
거기엔 기다리던 상혁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민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너 이 새끼 스카우트 제의 받았냐?”
“어.”
그러자 갑자기 상혁이 주저앉더니 민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 이놈아! 안 된다! 넌 내 곁을 못 떠난다 이놈아!!”
“뭐,뭐야!? 너 왜이래?”
“아이고 이놈아 넌 나랑 같이 가야지이이이! 안 된다 이놈아!”
“아 쪽팔리니까 떨어져! 떨어지라고! 거절했으니까 떨어지라고!”
“어 그래?”
180도 태도를 바꿔서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은 상혁은 멋쩍은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돌아가 볼까?”
비행기를 타기 위해 떠나는 일행을 보면서, 코즈에는 그동안의 시간이 꿈처럼 지나간 느낌을 받았다.
흔히들 말하는 ‘마법의 가을’ 같은 느낌처럼.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듯한 괴상한 고등학생들을 만나서, 기대 이상의 주목을 받으며 코믹 마켓에 참가하고, 일주일을 같이 지내면서 게임 기획에도 참가했다.
그렇게 차를 타고 돌아오니, 일주일동안 북새통처럼 시끄러웠던 집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조금 어질러진 것을 제외하면, 상혁과 서연이 찾아오기 전의 모습과 별 다를 게 없다.
방 한쪽에 놓여진 컴퓨터와 타블렛을 빼면.
‘아···저거···.’
이 집에 온 첫째 날 노트와 펜으로 회의를 하던 상혁은 다음날 갑자기 갑갑하다며 그녀를 데리고 아키하바라로 갔다.
그리고는 꼴랑 일주일 사용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구매하더니 이렇게 집에 놓고 가버렸다.
작업한 내용물만 CD에 담아서 챙긴 채로.
‘이것도 있었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서연은 액정 타블렛까지 사더니 일주일 쓰고 놓고 가버렸다.
그 덕에 코즈에의 집에는 자신이 원래 쓰던 컴퓨터와 함께 여분의 컴퓨터 한세트와 액정 타블렛 한세트가 남아있었다.
그 ‘방문의 잔해’를 보며, 코즈에는 피식피식 웃었다.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으니 숙박비를 주겠다 길래 바득바득 안받겠다고 하니, 이렇게 컴퓨터를 놓고 가버린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의 컴퓨터를 키고는 인터넷 게시판에 접속했다.
자신이 겪은 마법의 겨울.
꿈같았던 일주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
한편, 한국에 돌아온 상혁은 나머지 일행을 데리고 캐리어를 든 채로 공항에서 학교로 직행했다.
그리고는 바로 게임부실로 향했다.
“어, 왔네? 공항에서 바로 온거, 으에엑?!”
부실에는 마침 개인 작업 때문에 일본에는 함께 가지 못했던 성연이 부실 쇼파에 앉아 게임기로 게임을 플레이하다 일행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마침 오늘이 돌아오는 날이었기에 성연은 밝게 일행을 맞이하려 했지만 일행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뽀샤시한 피부의 현주와는 대조적으로 마치 일주일은 철야를 때린 것 같은 몰골을 보며 성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희 코믹 간다더니 해병대 캠프 갖다왔냐?”
“아닌데요?”
“근데 몰골이 왜 그래? 일주일동안 잠도 제대로 못잔 사람들처럼?”
“민준이는 외주처 가서 PS2 포팅 배운다고 잠 안자고 코딩해서 그럴러고, 저랑 서연이는 일이 좀 있었어요.”
“안 좋은 일이었어? 헉! 혹시 코믹 갔는데 하나도 못 팔았다거나?”
“그건 아니에요. 다 팔았으니까.”
“뭐?! 1,000카피를 다 팔았다고?”
“그건 아니고요.”
“그렇지. 나도 친구한테 들었는데 처음 참가하는 서클한테는 되게 혹독하다더라.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마. 혹시 아니? 우리나라에서처럼 입소문 퍼져서 나중에 잘 팔릴지도 모르잖아.”
“아니, 못 팔았다는 말이 아니라···.”
“응?”
“1,000카피가 아니라 5,000카피를 완판 했어요.”
“엑?!!”
거기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성연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에서 이미 그 정도 인지도를 쌓았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5,000카피 파느라 그렇게 파김치가 된 거야?”
“그것도 아니고요.”
“아 그럼 뭔데?!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건 지금부터 설명할게요.”
그렇게 말한 상혁은 커피머신으로 가서 진하게 커피를 내렸다.
항상 하던대 로, 얼음넣은 5샷 에스프레소.
“너 그거 몸에 엄청 안 좋다니까?”
“설탕 안 넣어서 괜찮아요.”
쓰다못해 헛구역질이 날 것 같은 걸쭉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오자 상혁은 철야의 피로가 약간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카페인으로 자신의 머리를 강제로 깨운 상혁은 가방에서 CD를 꺼내 PC에 넣고는 일본에서 작업해둔 기획서를 프린트했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한부씩을 돌리고는 회의실 쇼파에 앉았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좀 진지한 이야기니까 다들 신중하게 판단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한 상혁은 기획서를 자신의 앞에 놓고 입을 열었다.
“저희, 게임 갈아엎읍시다.”
그것은 상혁이 회귀한 이후 다시는 자신의 귀로 들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말이었다.
***
“지금도 충분히 재미있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개편이야기를 처음 듣는 성연은 그렇다치고 일본에서 대충 언질만 받고 온 민준 역시 개편에 호의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우선 상혁이 만든 개편안을 살펴보았을 때 재작업량도 많고, 무엇보다 플레이의 본질이 많이 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처음에 만들고자 했던 거는 D&D라는 보드 게임을 즐기던 소년이 전학을 가면서 같이 게임을 즐길 친구들을 모은다는 내용이었잖아? 그리고 지금 알파버전은 그 재미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렇죠. 충분히 재미있죠.”
“그런데 왜 고치겠다는 거야?”
“재미만 있어서요.”
“응?”
“지금 저희 게임은 그냥 친구들과 모여서 게임을 하는 느낌의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렇지.”
“거기엔 로망이 없는 것 같아서요.”
“로망이라···.”
상혁의 설명을 들은 성연은 고민에 빠졌다.
애당초 알파 개발기간에 상당수의 OST 작업을 끝내놓았기 때문에, 테마가 변경되는 경우 곡을 대부분 새로 재작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로망이 그렇게 중요한가? 재미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재미도 주고, 로망도 있으면 더 좋죠.”
“흠. 좋아. 네 말이 맞다 쳐. 그럼 그 로망은 어떻게 줄 건데?”
“그건 지금부터 설명해드릴게요.”
상혁은 대형 TV와 연결된 컴퓨터로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띄웠다.
그러고는 일본에서 일주일 내내 작업했던 새 스토리 플로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존 오프닝 플로우는 그대로 유지합니다. 평범하게 친구들과 D&D를 플레이하던 아이가, 전학을 가게 되는 부분까지요. 바뀌는건 그 이후 부분부터인데···.”
원래 스토리에서는 새 집으로 가면서 부모님이 공부를 하라고 압박을 하면서 D&D를 포기하고 살다가, 우연히 지나는 서점 진열대에 놓여있는 D&D책을 보고 용돈을 털어 구매한 뒤 친구들을 모으는 내용의 프롤로그 파트를 갖추고 있었다.
상혁은 이 부분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여기서 원래의 초반부 컨셉트를 새 컨셉트로 변경하려 합니다.”
그렇게 말한 상혁이 슬라이드를 넘기자, 익숙한 모양의 책 한권이 나타났다.
“저건···.”
“맞아요.”
“장르를 현실에서 아예 판타지로 바꾸겠다는 말이야?”
상혁이 띄운 슬라이드에 있는 책.
그것은 1999년 11월에 한국에 발매된 따끈따끈한 신작 소설.
그리고 외국에서는 이미 97년에 발매되어 선풍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던 소설.
바로 ‘해리버터와 마법사의 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