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일본어판 공개
상혁은 이전에도 한국에서 동인행사 참가를 2회 진행한 경험이 있었지만, 코믹월드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를 자랑하는 코믹 마켓은 부스 신청부터 그 방법이 많이 달랐다.
일단 추첨식으로 진행되는데다 워낙 많은 부스가 신청하기 때문에 절반정도는 떨어져나간다는 점도 달랐고, 참가 인원의 국적이나 규모도 차원이 달랐다.
그렇기에 무턱대고 참가할 수 있는 행사라는 걸 아는 상혁은 직접적으로 참가 신청을 하는 것 보다는 현지의 동인팀과 연계를 하여 발매하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그런 상혁에게 나츠는 ‘마리의 눈물’을 번역한 동인 개발자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런 게임을 만들어서 범상치 않은 개발팀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건 기대 이상이네요.”
‘마리의 눈물’을 번역한 코즈에 무카이는 작은 동인 서클을 운영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동인 멤버처럼 본업은 따로 있었다.
게임은 아니지만 소프트 개발쪽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였고 '마리의 눈물'은 한국의 친구에게 인터넷으로 전달받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 연락받았을 때는 엄청 겁먹었어요. '마리의 눈물'을 멋대로 번역해서 뿌린 것 때문에 법적인 제제라도 들어오나 해서요.”
상혁이 손수 타 준는 커피를 마시며 베시시 웃는 그녀는 직접 번역까지 한 사람답게 한국어에 매우 능통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한국에 초대하면서도 통역가를 따로 구할 필요가 없던 점은 상혁으로써는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찌됐건 상혁의 일본어는 매우 부실한 수준이었으니까.
“아닙니다. 저희는 코즈에 씨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덕분에 SANY쪽하고 연결도 될 수 있었으니까요.”
“아, 콘솔 판매 준비 중이라고 하셨죠?”
“네.”
물론 비밀 유지 협약 때문에 그 기종이 PS2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코즈에는 PS1으로 '마리의 눈물'이 발매되는 거라 생각하고 상혁에게 말했다.
“저도 PS1 가지고 있는데 PS버전도 해보고 싶네요.”
“게임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네. 엄청나게요. 제가 아는 친구들은 모두 하고 있어요. 아, 불법복제 버전이라 죄송하지만요···.”
“괜찮아요. 어차피 정품을 구하실 수 없는 상황인데 그렇게까지 고생해서 플레이해주신 거에 개발자로써 굉장히 뿌듯하네요.”
그렇게 말하며, 상혁이 슬쩍 바라보자 민준이 미리 준비한 '마리의 눈물' 패키지를 가져왔다.
거기엔 서연이 재작업한 일본어 타이틀로 ‘マリーの涙('마리의 눈물')’일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저···이건?”
“방문 선물입니다. 정식 발매는 아니고 저희가 따로 주문한거예요. 아, 죄송하지만 안에 번역본은 코즈에 씨가 작업한 번역을 사용했습니다.”
“헉! 그럼 이게···.”
“'마리의 눈물'의 일본어판이죠.”
놀란 코즈에가 패키지를 받아들고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까지나 취미삼아서 재밌어 보이는 게임을 번역해서 뿌린 것뿐인데, 이 괴랄한 개발자들은 불법으로 게임을 뿌린 자신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는커녕, 한국으로 초대해서 선물까지 주고 있었다.
“친구분들한테 선물하시라고 몇 개 더 준비했으니 돌아갈 때 가져가시면 될겁니다.
아, 짐이 될거같으면 저희쪽에서 국제우편으로 보내드릴게요.”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이거는 기념으로 제가 가지고 갈게요.”
코즈에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상혁은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상대를 부른 것인데, 상대가 너무 팬처럼 행동하고 있어서였다.
뭐, 팬이라도 할 말은 해야한다.
지금 그녀가 상혁이 계획하는 코믹 마켓 진출의 핵심이었으니까.
헛기침을 하며, 상혁이 코즈에를 보며 말했다.
“저희가 코즈에 씨를 초대한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예.”
“저희가 이번에 C57에 나가고 싶어서요.”
“겨울 코믹 말씀이세요?”
“네.”
“오! 엄청 기대되네요! 거기서 '마리의 눈물'을 파실 생각인가요?”
“아뇨.”
“엑?! 지금 팔면 꽤 팔릴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팔고 싶어도 못 팔아요.”
상혁은 자신들이 미성년자라 일본에서의 수익활동이 제한되는 점, 그리고 코믹 마켓 참가 경험이 없어 패키지 생산부터 부스 신청까지 알아봐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상혁의 이야기를 들은 코즈에는 자신의 품안에 들린 패키지를 연신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상혁을 보며 말했다.
“혹시 저희가 도울 수 있을까요?”
‘걸렸다.’
애당초 한국에 일부러 불러와서 호텔비 지불부터 관광가이드까지 자청하며 공들인 이유가 이것이다.
조금 양심에 찔리기는 하지만, 지금 가장 편하게 일을 진행하는 방법이 이것이었기에 상혁은 코즈에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될까요? 저희쪽에서 수익은 보장해드릴 수 있는데요.”
“저희도 사실 이번에 ‘마리의 눈물’ 동인지 출품 건으로 참가하려고 했었거든요. 거기서 게임도 팔수 있게 되면 훨씬 좋을 거 같아요.”
양측의 의견이 일치한 이상, 일을 진행하는데 문제될 것이 없었기에 협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우선 PTW측에서 코즈에의 번역을 정식 번역으로 인정하고 번역료를 별도로 지급한다.
그리고 코즈에가 속한 동인팀에서 그린 동인지에 원작의 원화가인 서연이 그린 축전 일러스트를 제공.
이미지 번역까지 모두 되어있는 일본어판의 데이터를 상혁이 넘기면 코즈에가 일본의 업체를 통해서 패키지를 제작하고, 동인지와 함께 코믹에서 판매를 진행하는 식으로.
물론 이 모든 내용은 사전에 퍼블리셔인 지훈과 이야기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코믹에서 예상되는 판매량이 아무리 잘 잡아도 5천 카피 정도였기에 이후 정식 발매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후 코즈에는 부실 내부와 멤버의 사진을 잔뜩 찍고는 기쁜 표정으로 지훈을 따라 공항으로 돌아갔다.
물론 자신이 받은 정품 패키지에 개발 멤버의 싸인을 잔뜩 받은 채로.
그리고 상혁이 미리 준비해준 비즈니스석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사실 지난번 코믹 이후로 상혁이 씀씀이가 커지긴 했어도 여기에 퍼스트 클래스까지는 오버라고 생각해서 비즈니스 정도로 잡아준것이지만, 코즈에는 그것도 엄청나게 배려해준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상대는 고등학생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한국에서 보았던 풍경을 곱씹으며,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학교 안인데 별천지로 보인는 부실 내부라던가, 단순히 커피를 먹겠다고 엄청나게 비싸보이는 커피 머신을 가져다 놓은 부분이라던가.
다들 즐겁게 개발하는 분위기를 보면서 자신이 다니는 회사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파티션으로 꽉 막힌 갑갑한 공간에 침묵으로 가득찬 개발실.
야근과 철야를 반복하면서도 공치사 한번 해주지 않는 인색한 상사들.
비록 게임은 아니지만 같은 IT업계에 일하는데 양쪽의 개발 여건이 너무나 차이나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 그런팀을 만들 수 있게 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코즈에는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서 빨리 일본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한국의 멋진 개발팀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휴.”
상혁이 부실에서 한숨을 쉬자 민준이 다가와서 말했다.
“넌 가끔 보면 너무 잔머리를 잘 굴려서 무서울때가 있어.”
“뭐, 상황 정보를 잘 이용한 것 뿐인데?”
간단한 미팅을 통해서 코믹 관련 업무를 죄다 일본 동인팀에 떠맡겨버린 상혁이 머리뒤로 뒷짐을 지며 말했다.
“어차피 번역퀄도 높았으니까 따로 작업할 필요도 없어지고, 코믹 등록절차나 패키지 주문같은것도 거기서 다 해줄테고, 우린 이제 몸만 가면 되잖아.”
“그러니까 그런 상황까지 한번에 만드는게 잔머리라고.”
“센스라고 해라. 잔머리가 뭐냐?”
상혁이 투덜거리자 민준이 씨익 웃었다.
“뭐, 그덕에 좀 편할거같기는하다. 지훈 씨는 뭐래?”
“그쪽은 지금 일본쪽 수입사 조건이 마음에 안들어서 보류중이래. 우리쪽에서 코믹 출품으로 치고 나가면, 좀더 유리한 조건으로 재협상 시도할거라던데?”
“그쪽도 잔머리가 좋네.”
“센스라고 하라고.”
그렇게 말한 상혁은 쇼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겨울 코믹까지는 시간이 꽤 있었지만 일단 일본에 가면 개발 진도를 더 뽑을 수 없기에 지금 최대한 진도를 뽑아놔야했다.
그것을 아는 민준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작업을 개시했고, 서연도 작업을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겨울이 오기전에, 지금 만들고 있는 신작의 알파 버전을 최대한 빠르게 만들기 위해서.
***
“실제로 보니 좀 무섭다.”
부스 준비를 위해 도착한 도쿄 빅 사이트를 앞에 두고, 상혁은 솔직한 감상을 뱉었다.
물론 아직 본행사가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본것처럼 무지막지한 사람의 인파는 볼 수 없었지만, 사전 준비를 위해 참여한 부스 참가자만으로도 행사의 열기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잇었다.
그러나 상혁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분주하게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부스 참가자들이 아니었다.
대신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주변의 풍경 자체가 상혁을 압박하고 있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내가 오타쿠 기질이 있는 건 인정하겠는데 말이지···이건 너무 많다.”
입간판부터 현수막에 사방에 걸린 태피스트리까지, 그 넓은 공간을 가득 매운 2D미소녀들의 모습에 상혁은 마치 자신이 2D 세계에 들어온 3D 인간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호러블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름이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적어도 파오운은 안봐도 될거 같으니까.”
“파오운이 뭐에요?”
상혁의 혼잣말을 들은 서연이 상혁에게 다가와 물었다.
상혁의 감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해외 여행에 코믹 참가까지 겹쳐 잔뜩 상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혁은 그런 서연을 보며 씨익 웃더니 파오운이 뭔지 설명해주었다.
“여름 코믹에 오면 10만명이 넘는 참가자가 흘린 땀이 증발하면서 저 건물 천장에 구름같이 뭉실뭉실 떠 있는거야.”
“으엑!”
“거기에 이제 천장에 달린 에어컨에서 나온 찬바람과 만나면 응결하면서 천장에서 물이 뚝뚝···.”
“으아아!”
상혁이 더 설명하려하자 서연은 귀를 틀어막더니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가버렸고, 상혁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피식피식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사람은 입구 근처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코즈에를 만날 수 있었다.
다른 팀원들과 함께 있던 그녀는 상혁을 보고는 크게 손을 흔들며 뛰어와 인사를 했다.
“오셨군요!”
“네. 옆에 분들은 팀원?”
“예.”
그렇게 말한 코즈에가 팀원들에게 일본어로 말을 하자 팀원들이 반갑게 고개를 숙이며 상혁에게 인사를 했다.
“죄송한데 친구들은 한국어를 못해서요. 이번에 행사 참가비용 전체 다 지원해주신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네요.”
“저희야말로 코즈에 씨 팀이 아니었으면 코믹 참가는 못했을테니까요. 번거로우셨을텐데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등학생답지 않은 깔끔한 예절에 코즈에의 팀원들이 서로 귓속말로 수근댔다.
“저기. 뭐라고들 하시는 거죠?”
“하하···. 진짜로 아저씨같이 말한다고 놀라고 있네요.”
‘뭐, 아저씨는 맞으니까.’
조금 그렇긴 했지만 40살 동안 먹은 나잇살이 어디로 가는건 아니었기에 상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코즈에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 부스쪽으로 안내해주실래요?”
“네.”
코즈에를 따라간 부스는 생각보다 큰 크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참가한 두 번째 코믹월드 부스가 더 컸을 정도.
그러나 애당초 부스 참가 자체도 추첨을 뚫어야 겨우 통과가 가능한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리도 괜찮은 편이었고.
“생각보다 잘 꾸며놓으셨네요.”
사실 상혁은 이번 이벤트에서 순수하게 참가에 의의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흥행여부는 별로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일본 정발전에 약간의 이슈 메이킹 정도만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코즈에에게 듣기로는 일본에서 꽤 많은 유저들이 플레이 한 상태고, 나름 주목을 받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것과 오프라인 행사와는 별개니까.
그렇기에 상혁은 아마 오늘 준비한 1,000카피도 다 팔면 기적에 가깝지 않을까···라고 상혁은 생각하고 있었다.
서울 코믹때와는 상황이 좀 다른게, 일본 코믹 마켓은 본가 행사답게 참가인원도 많지만 참가 부스 수도 차원이 다르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부스 뒤쪽에 쌓여있는 산더미같은 패키지를 보면서, 상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코즈에를 돌아보았다.
“제가 분명 1,000카피 정도만 팔준비하자고 하지 않았었나요?”
“예···. 그렇기는 한데···.”
“이건 어떻게 봐도 1,000카피가 넘는데요?”
상혁의 앞에 쌓여있는 ‘마리의 눈물’의 일본어판 패키지.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1,000카피의 5배는 넘어 보이는 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