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34화 (35/485)

034. 호구대전

유찬은 심호흡을 하고는 지훈을 향해 씨익 웃었다.

신입시절 한 번도 그를 이겨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유찬의 그 확신은, 자신의 품에 들어있는 한 장의 종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설마 대표님이 이 정도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지만···.’

사실 마리의 눈물이 가지는 시장 가치를 판단하는데 일주일이나 필요하지는 않았다.

유찬은 첫 번째 날 플레이하고 바로 사장님께 보고를 올렸으니까.

그리고 사장은 유찬의 강력한 추천으로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하고는 폼나게 유찬에게 자신이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권한을 넘겼다.

그리고 유찬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품안에서 무려 백지수표를 꺼내 상혁에게 내밀었고, 상혁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 유찬을 만족스럽게 했다.

“오, 이런 건 기대 못했는데요?”

“저희 사장님께서 주신 겁니다.”

물론 유찬의 회사가 아무리 대형 퍼블리셔라고 해도 백지수표를 내밀만큼 돈이 남아 튀는 퍼블리셔는 아니다.

그러나 유찬은 여기 오기 전 사장이 백지수표를 내밀며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진짜로 이걸 내라고요?”

“어.”

“그랬다가 한 1.000억 적으면 어떻게 하게요?”

“에휴···. 유찬 씨는 지금까지 그 상혁이란 녀석의 행동을 보고서도 추측이 안 되나?”

“어떤게요?”

“잘 생각해봐. 우리가 건 매장 진출 불가에 대해서 오프라인 행사를 참가해서 2천 카피를 팔아먹고, 이후에 다음 행사에서 그 정도로 대범한 이벤트를 진행해서 1만 카피를 팔정도의 인물이야. 보통 사람과는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백지수표를 건네도 높은 금액을 적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본 바로는 그런 사람은 세상의 재물이나 부귀영화에 관심이 없어. 단지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거지. 그리고 난 이 백지수표로 그 마음을 표현하는거고.”

“크~~. 사장님 멋지십니다.”

“허허 내가 괜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줄 아나? 다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라고, 오늘 아침에 있었던 대화를 회상중인 유찬의 귀에 펜이 종이를 열심히 긋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유찬은 사장과 자신이 무엇을 착각했는지 깨달았다.

눈앞에 앉아있는 놈은 천재가 아니라 단순히 돌아이라는 사실을.

유찬은 1뒤에 10번째 0을 그리고 있는 상혁의 모습을 보고는 급하게 상혁을 불러 세웠다.

지금까지 상혁이 적은 숫자만 무려 100억.

그러나 상혁이 처음에 잡은 1의 위치와 0의 크기를 보면 절대 100억만 가지고 끝낼 생각은 없어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기···.”

“왜요? 아직 6개는 더 그려야하는데···.”

“저희 회사 다 팔아도 그 가격은 안 나와요.”

“뭐야, 난 백지수표라길래 한 1경  정도 적어도 될 줄 알았는데.”

“아니, 그냥 성의처럼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드린 거지 거기다 그렇다고 냅다 동그라미를 그렇게 무식하게 그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백지수표가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1경은 우리나라 은행 털어도 안나옵니다. 한국은행정도면 몰라도. 거기도 현찰로 1경은 안가지고 있을 걸요?”

1999년 기준 대한민국 1년 국가 예산이 84조9376억 원이었으니 1경이면 1년 국가 예산의 10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당연히 은행에 있을 리가 없는 금액이기에 유찬은 조를 넘어서 현실에서 잘 쓰지도 않는 경단위를 언급하는 상혁을 보며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유찬을 보고 상혁은 입을 삐쭉 내밀더니 ‘그럼 백지수표는 뭐하러 있는 거야.’ 라고 투덜거리며 자신이 그린 숫자에 찍찍하고 취소선을 긋고는 유찬에게 돌려주었다.

“뭐, 장난이고, 그쪽에서 쇼맨십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아서 저도 그렇게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지금 보여드렸다시피 딱히 금액은 메리트가 되지 않으니까 다른 걸 제시해주세요.”

“잠시만요, 어째서 자금 제공이 메리트가 되지 않는다고 하시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기본적으로 게임 개발도 다 돈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유찬은 상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상혁이 한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데서 온 오해였다.

“저는 돈이 싫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럼요?”

“그쪽에서 제공하는 돈이 메리트가 되지 않는다고 한 거죠.”

“돈은 다 같은 돈 아닙니까?”

“아니죠.”

상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결국 퍼블리셔에서 제공하는 자금도 돈을 벌기 위해서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은 모두 게임을 팔아서 메꿔야하는 돈이고.

그것은 나중에 받을 돈을 먼저 받는 것 말고는 딱히 메리트가 없는 것이기에 지금 당장 돈이 궁하지 않은 상혁은 그것이 메리트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었다.

“결국 저희 매출에서 나올 돈을 미리 받는 건데 결과적으로 팔아서 벌 수 있는 돈이 같다면 돈을 먼저 받는다는 거 말고는 장점이 없잖아요. 딱히 지금 돈이 급한 것도 아니니 그런 식의 무의미한 생색내기는 딱히 메리트가 있게 느껴지지 않네요.”

“다른 거 준비한건 없으세요?”

“예? 아, 예! 있습니다.”

당황해하던 유찬은 가방에서 급히 서류 바인더를 꺼내어 탁자에 펼쳤다.

그리고는 상혁에게 자신의 회사에서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현재 전국의 거의 모든 게임 매장에 게임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CD와 패키지, 매뉴얼 생산 공장과의 연계도 되어있기 때문에 생산 단가도 낮게 잡아드릴 수 있고, 물량도 빠르게 댈 수 있죠. 계약만 해 주시면 한달 안에 전국의 게임 매장에 ‘마리의 눈물’이 쫙 깔린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마진율은 얼마나 잡고 계신가요?”

“통상적으로는 수입 게임의 경우는 수입사에서 저희가 40% 할인된 가격에 받아오고요, 거기에 저희가 총판이니 저희 쪽 마진 25%를 까서 15% 할인된 가격에 소매점에 넘깁니다.”

“저희는 수입 게임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파격적이라고 말씀 드리는겁니다. 수입 총판과 마찬가지로 60%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정가가 3만 9천원이니 패키지당 2만 3천4백원이나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엄청난 조건이었지만 상혁은 유찬의 이야기에 제작 단가가 빠져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제작 단가는 어디에서 부담하고요?”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한카피 당 9750원 남기면서 거기서 제작 단가도 부담하신다고요?”

“대신 10만장 까지만 그렇게 부담하고 이후 판매에 대한 라이센스를 넘겨받았으면 합니다.”

“정품 패키지를 팔고, 이후 쥬얼 패키지에 대한 수익을 다 가져간다?”

말 그대로 지금 만들어진 게임에 대해서 23억 정도의 수익을 보전해주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10만장 이상 팔릴 거라는 담당자의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금전적인 조건 자체는 저희한테 매우 좋네요.”

“좋은 정도가 아니라 파격적인 제안이죠. 왠만한 게임업체도 이 조건으로 계약 안 해줍니다.”

“23억의 고정 수익 보장. 이게 끝인가요?”

“아뇨. 사실 아까 백지수표와 관련한 조건도 있습니다. 상혁 씨가 그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지 않으셨으면 좀 더 좋은 그림이었겠지만···.”

그렇게 말한 유찬은 상혁이 아까 돌려준 취소선이 죽죽 그어져있는 백지수표를 다시 내밀었다.

“저희는 원하신다면 그 수익을 미리 드리는 조건으로 계약해드릴 수 있습니다.”

무려 23억의 선지급.

그것이 유찬이 사장에게 받아온 히든 카드였다.

‘미친! 당장 그걸 받아!’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진만은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가서 수표를 대신 받을 뻔 했다.

저정도 돈이 있다면 자신이 만들고 싶어 준비하던 MMO 프로젝트를 확실하게 완성하고도 남을 자금이었기에.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조건인지 알고 있는 상혁도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입 게임과 동일하게 대우하겠다는 이야기는 원래 수입사에서 가져가는 수익만큼의 이윤을 더 얹어주겠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였기에 유찬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이정도의 조건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찬의 예상대로, 지훈은 한숨을 쉬더니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상혁에게 내밀었다.

“지훈 씨 쪽이 조건은 더 안 좋네요?”

“맞습니다.”

지훈이 가져온 것은, 일반적인 국내 패키지 게임의 퍼블리싱 조건과 비슷한 계약서였다.

“그럼 유찬 씨쪽의 승리라고 봐도 될까요?”

‘이겼다.’

처음으로 선배를 이겼다는 기쁨에 유찬이 속으로 승리의 환호를 지르고 있을 때, 지훈은 씨익 웃더니 품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대신 저는 이걸 가져왔죠.”

지훈이 책상에 놓은 명함을 보는 순간 유찬의 표정은 ‘이게 뭐냐’ 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상혁 역시 지금 왜 지훈이 이걸 내미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훈이 내민 명함.

거기엔 지훈이 속한 퍼블리셔인 ‘y.j global 도쿄 지사 담당자 박지훈’ 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선배, 갑자기 이건 뭐에요? ‘나 일본지사 간다’라고 자랑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유찬이 그렇게 묻자 지훈이 말했다.

“아니, 사실 우리 회사는 도쿄지사 같은 건 없어. 너도 알다시피 우린 국내 퍼블리셔거든.”

“그럼 존재하지도 않는 지점의 명함을 내밀어서 뭘 하시려는 겁니까?”

그때, 지훈의 의도를 파악한 상혁이 입을 열었다.

“일본 쪽 이랑 이야기가 되어있다는 이야기군요.”

그제야 지훈이 씨익 웃었다.

“맞습니다. 저희와 계약하시면 저희는 ‘마리의 눈물’을 일본어 버전으로 PS 버전 발매를 진행할겁니다.”

해외 진출. 그것도 거대한 일본 콘솔 시장으로의 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 지훈의 제안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상혁이 생각에 잠기자 유찬은 당황하며 급하게 입을 열었다.

“일본 시장은 절대 쉬운 시장이 아닙니다. 저런 조건보다는 저희 쪽 조건이 훨씬 유리하죠. 그리고 저희 쪽도 일본 진출은 밀어붙이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제까지 그럴 게임이 없어서 못한 것뿐이죠.”

“게임은 초반 판매량이 전체 판매량을 좌우하죠. 미리 준비가 다 되어있는 저희 쪽이랑 계약하시는게 글로벌 진출엔 훨씬 유리합니다.”

“선배, 그걸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하는 거예요. 반짝이는 미래라고 해도 결국은 그냥 미래라고요.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두 사람의 의견 대립이 격해지기 전에, 상혁은 이 자리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두 분 의견은 잘 들었고요. 일단 오늘 미팅은 이걸로 마치죠.”

“예?! 이 자리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첫째로 저도 저희 팀원들 의견을 들어봐야 하고, 둘째로 세상에 이런 식으로 계약 진행하는 제작사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그걸 알면서 왜 이런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하신 겁니까?”

“말했잖아요. 그냥 보고 싶었다고.”

눈앞의 고등학생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강한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유찬이 물었다.

“그럼 계약은 어떻게 진행하실 겁니까?”

“서로 내건 조건을 아셨으니 최종 제안을 메일로 저희한테 보내주세요. 그걸 보고 최종 결정하겠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상대방이 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유찬은 상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까지 새로 조건을 추가해서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오늘 있었던 해프닝은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유찬과 지훈이 가도, 진만은 돌아가지 않고 부실에 남아있었다.

조금 꺼내기 곤란한 이야기를 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사과 끝났으면 돌아가셔도 되는데요?”

상혁이 말하자 진만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상혁에게 말했다.

“저···. 혹시 이후로 시간 되십니까?”

“예. 괜찮은데요?”

“그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진만은 심호흡을 깊게 하더니 상혁을 보며 말했다.

“물론 저 때문에 많이 고생시켜드린 것과 제 잘못을 생각하면 이런 제안을 드리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건 압니다만···.”

“뭐죠?”

진만은 각오를 굳혔다. 아까 두 퍼블리셔 직원이 상혁에게 제안을 던지는 모습을 보

면서 어렴풋이 마음속으로 하고 있던 각오를.

“혹시 저희 쪽과 같이 일해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진만이 던지는 뜻밖의 제안.

그것은 상혁의 팀을 통째로 고용하고 싶다는 사실상의 인수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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