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입찰전쟁
사실 굳이 지금 팀원들의 자금을 받지 않아도 상혁은 앞으로 퍼블리싱 계약을 진행하고 전국 유통 채널을 통해 게임을 판매하면서 나오는 추가 수익으로 자신의 계획을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상황에서 거절하는 것도 뭔가 폼이 안난다는 생각이 들은 상혁은 그냥 감동받은 표정으로 모두의 의지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 멤버는, 적어도 상혁이 생각하기엔 끝까지 함께 가더라도 거를 타선이 한명도 없었다.
회귀 전 이미 사축짓을 하면서도 스택 오버플로우 평점 27,000을 달성하며 0.1% 클래스의 프로그래밍 기술을 보여주던 민준.
이미 탑클래스급 원화가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는 서연.
앞으로 엄청난 게임 음악 작곡가로 대성할 미래를 가진 성연.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적금까지 깨 가며 팀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상혁이 추진하는 온갖 무리한 계획의 뒷바라지를 묵묵히 추진하던 현주까지.
돈문제는 차지하더라도 이 인원을 끝까지 안고 가고 싶었던 상혁은 팀원들의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 내심 매우 기뻤다.
그리고 그런 상혁의 기쁨은, 잠시 후 팀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는 순식간에 개박살났다.
“그니까, 상혁 오빠가 나중에 회사를 차리면 개인 작업실을 룸카페 같이 만든다고 했단 말이죠?”
“어. 거기에 한쪽 벽에 만화책이랑 DVD를 쫙 깔아놓고 개인 작업실에서 뭘 하던 터치 안 할거라고 하던데?”
“와 진짜 놀기 좋겠다.”
“그럼 회의는 어떻게 한 대?”
“그 프로그램 같은 거 만들어서 회의 요청하면 벽에 달린 모니터에 회의 스케쥴 뜨게 한다더라.”
“오 뭔가 멋질 거 같아.”
“퍼블리셔 분이 그런 상태에서 누가 개발하냐고 하니까 상혁이가 그러더라고.
‘2년 걸려서 20억짜리 게임 만드는 것보다 5년 걸려서 2천억짜리 게임 만드는 게 낫다.’ 라고.”
“크···. 오빠 개 멋져.”
“암튼 그런 꿈의 회사에 안 들어갈 순 없지.”
한참을 그렇게 떠들던 팀원들은 상혁이 자신들을 뻔히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상혁이 그런 팀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민준이 상혁에게 물었다.
“대충 이야기는 성연 씨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퍼블리셔에서 찾아 올 거라고?”
“응.”
“엘란테 소프트 사장이랑 같이?”
“맞아.”
“대체 무슨 꿍꿍이야? 정말로 단순하게 보고 싶다는 이유로 공개 입찰을 시킨 건 아닐 거 아냐.”
“가끔 난 니가 날 너무 잘 알아서 불편할 때가 있어.”
“나도 내가 널 너무 잘 알아서 불편할 때 가 있으니까 쌤쌤이네.”
민준이 그렇게 대답하자, 상혁은 피식하고 웃었다.
“뭐, 계획이 없는 건 아닌데 아직 말할만한 수준의 거는 아니고, 이번에 퍼블리셔가 최종 결정되면 그때 이야기 해줄게.”
“지금은 안돼 ?”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 그리고 안됐을 때 실망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고.”
“안됐을 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민준은 그렇게 말했다.
“니 계획대로 다 됐을 때 얼마나 미친 짓을 벌일까 그게 걱정인거라고.”
“넌 너어어어~~무 부정적이야.”
“팀에서 너한테 지금 브레이크 걸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최소한 나는 항상 리스크를 생각해야지.”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잖아.”
“윙크하면 눈깔 뽑아버린다?”
“크크크크”
“에휴. 앓느니 죽지. 그래서, 퍼블리셔 분들은 언제 오는데?”
“이번 주말에.”
“좋아. 재미있겠네. 니가 벌인 미친 짓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나도 꼭 봐야지.”
“저도요. 저도요!”
서연이 손을 들자 다른 팀원들도 다 참석하겠다고 떠들기 시작했고 결국 퍼블리셔가 찾아오는 날 팀원 전체가 보는 가운데서 회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
유찬이 ‘마리의 눈물’의 테스트 플레이를 마치고 퍼블리싱 미팅 제안을 걸어온 것은 코믹월드에서 상혁이 빅 이벤트를 치룬 뒤로 정확히 일주일 정도가 지난 후였다.
유찬의 연락을 받은 상혁은 전에 받은 명함을 통해 약속시간을 전달했고 지훈이 그날 스케쥴을 비워놓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게 되었다.
만남의 날을 기다리는 동안 상혁은 차기작에 대한 간략한 구상을 하거나 가끔 계좌에서 돈을 뽑아서 부실에 비품을 마련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멤버 전원의 책상과 의자가 고가의 최신형 모델로 변경되었고 서연에게는 최신형 액정 타블렛이 지급되었다.
노트북도 각자 하나씩 지급되었는데 데스크탑 컴퓨터는 따로 바꾸지 않았다.
‘현주 선생님이 힘들게 마련해 주신 건데 그리 사양차이도 심하지 않은데 1년도 안 되서 교체하고 싶지 않다.’ 라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은 현주가 매우 감동받은 표정을 지은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약속의 그날이 다가왔다.
계약을 위해 차를 몰아 학교 운동장에 세우며, 유찬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조용한 운동장에는 점심시간 학생들이 벌인 격렬한 축구의 흔적 때문인지 공기에서 미약한 모래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계약하러 고등학교 오는 건 되게 특이한 기분이네.’
미묘하게 본 거 같으면서도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와 다른 복도를 걸어가면서, 유찬은 자신이 고등학생이라도 된 것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상혁에게 안내받아 찾은 ‘게임부’의 문을 밀고 들어가며 순식간에 깨어지고 말았다.
‘뭐지? 여기만 별천진가?’
물론 방의 형태는 다른 부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교실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학교 특유의 보온성이라고는 밥말아먹은 듯 한 얇은 창문에, 칙칙한 녹회색 벽, 언제 갈았는지 잘 모를 듯한 형광등까지 방 자체는 고등학교 부실의 느낌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지만, 안에 있는 기자재들은 무슨 실리콘 밸리의 게임회사를 연상시키는 느낌이었다.
‘저 의자 100만원 짜리 아냐? 어휴, 책상도···.비싼 거네..?’
한쪽 구석엔 무려 안마의자까지 놓여있고 쇼파에 대형 tv에 게임기도 종류별로 놓여있는 게 느낌이 마치 잠실의 낡은 아파트 안에 갖춰진 초 고급 인테리어를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거금을 받고 나서 상혁이 싹다 교체한 것이었기에 자세히 맡아보면 물건마다 전부 새 물건 냄새가 나고 있었지만, 일단 비쥬얼 적으로는 여유를 품품 풍기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을 보는 유찬의 마음은 풍경이 주는 여유로운 느낌과는 반대로 조금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상혁이 유도하고 있는 감각이었다.
‘딱히 너와 계약하지 않아도 우린 꿀릴게 없다.’
그게 상혁이 새로 바꾼 가구들로 전달하고 싶었던 심상이었기에, 상혁은 굳어가는 유찬의 표정을 보며 씨익하고 미소를 흘렸다.
“지난번에 ‘장사’가 좀 잘 돼서 이번에 가구를 좀 바꿔봤어요. 어떤 거 같으세요?”
“여기서 개발하는 겁니까?”
“예.”
“즐겁겠네요. 제가 고등학생 때 이런 부가 있었으면 저도 게임개발자가 되고 싶었을 만큼.”
“뭐, 돈이 좋더라고요. 있으면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할 수 있고요.”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유찬을 쇼파로 안내했다.
거기엔 미리 와서 앉아있던 지훈이 미소 짓자, 유찬은 그 순간 이번 입찰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특별히 윗선에 보고해서 권한 이상의 조건을 걸어도 좋다고 허락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훈의 저 표정은 이번 입찰에서 회사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반드시 이기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아씨···. 이번 건은 반드시 따내야하는데···.’
게임을 해보기 전에는 몰랐지만 해보고 난 이후에 유찬은 이번 계약에 엄청나게 욕심을 내고 있었다.
잘 하면 해외 진출도 노려볼만한 제품.
당시 제대로 해외 진출에 성공한 게임이 없는 한국 시장에서 오랜만에 나온 제대로 된 제품이라는 생각에 유찬은 이번 계약에 사활을 걸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가장 걸리는 건 역시 선배인 지훈의 존재였다.
그 역시 노련한 경험으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부실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며 잠시 후 엘란테 소프트의 사장 김진만이 부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역시도 부실 안의 이질적인 풍경을 보고는 놀람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는, 부원 하나하나에게 명함을 돌리며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이번에 그쪽 게임을 무단으로 참고했던 개발사 사장 김진만입니다.’
라고.
다들 놀라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현주에게 명함을 돌린 진만은 부원 앞에 서서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른이 고등학생 앞에서 진심을 담아서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기에, 서연은 진만의 사과를 받으며 굉장히 당황해했다.
물론 속은 40대인 민준이나 이미 성인인 현주와 성연은 태연하게 받고 있었기에, 당황한 사람은 서연 한명 뿐이었지만, 어찌되었건 나머지 팀원들도 진만에게 그리 큰 원한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에 다들 진심어린 사과를 받은 것으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사실 지난번 코믹월드때 워낙 게임이 잘 팔려서 주머니가 두둑해진 이유로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일지도.
그렇기에 팀원들의 메인 관심사는, 진만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만의 사과가 아닌 상혁이 추진한 이번 공개입찰에 있었다.
적어도 오늘 계약이 이루어지면 지난번처럼 1만개의 패키지를 조립하겠다고 밤새 박스만 접고 있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상혁의 예상대로, 팀원들 역시 처음엔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지금은 패키지 박스 접는 것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었다.
‘이제 다시 안정적으로 개발하고 싶다’
모두의 염원이 이번 계약에 걸려 있었기에, 상혁은 빠르게 사태를 정리하고 예정되어있던 계약 진행에 들어갔다.
진만은 상혁의 제안으로 얼떨결에 함께 구경하게 되었는데, 사실 자신이 처음 퍼블리싱 계약을 맺을때는 이런식 으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만 입장에서는 약간 배알이 꼴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계약을 할 때 는 철저하게 ‘을’의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계약에서 상혁은 ‘갑’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고 계약을 추진해야하는 퍼블리셔 양측에서도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시죠.”
겨우 고등학생 앞에서 ‘저희와 계약을 해주십시오’하고 부탁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존심 상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유찬과 지훈, 양쪽 다 그런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눈앞에 앉아있는 개발자는 보통의 개발자가 아니라 ‘마리의 눈물’을 개발한 개발팀의 팀장이니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두 사람의 눈에 상혁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역시 상혁이 계획한 거대한 연막의 일부에 불과했다.
‘어차피 2000년대 넘어가면 한국 게임 시장은 폭발할 텐데.’
온라인 게임시장으로 메인 스트림이 넘어가면서, 수많은 개발사들이 게임을 쏟아내는 것이 2000년대의 한국 게임시장이다.
그것을 잘 아는 상혁은 지금이 최대한 좋은 조건을 받아내기 위한 적기라고 판단했고, 일부러 이런 이벤트까지 준비하면서 두 퍼블리셔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당장 내년 이후부터 자신같은 패키지 게임 개발자는 퍼블리싱 시장에서 주목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렇게 진만의 부러움 섞인 시선과 팀원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유찬과 지훈의 경쟁 입찰이 시작되었다.
‘마리의 눈물’의 유통 권을 걸고.
그리고 두 사람의 선후배 중, 먼저 움직인 것은 후배인 유찬이었다.
“먼저 저희쪽 조건을 먼저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찬은 한눈에 보기에도 두꺼워 보이는 종이뭉치를 꺼내 상혁에게 내밀었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후에 상혁이 ‘호구대전’이라 이름 붙인 두 퍼블리셔의 치열한 전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