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공개입찰
오지훈.
그는 유찬과 같은 회사에 있었던 선배로 최근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스타트업 퍼블리셔 ‘Y.J GLOBAL’의 창업 멤버 중 한명이었다.
일부러 안정적인 대기업이었던 큰빛 소프트에 남기로 한 자신과는 다르게, 격변하는 한국 게임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시원하게 퇴사원을 내고 스타트업으로 가버린 자신의 선배.
자신이 신입일때부터 자신을 가르쳤던 사수인 선배를 보는 유찬은 매우 씁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선배가 여긴 무슨 일이시죠?”
“퍼블리셔가 게임 회사 찾아오는 게 컨택하는 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엘란테 소프트는 이미 퍼블리셔가 있습니다만? 그것도 선배네 회사와는 규모가 비교도 안 되는 곳으로요.”
“엘란테 소프트 찾아온 게 아냐.”
그렇게 말한 지훈은 상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Play to Win’의 대표님을 만나러 온 거지.”
“그걸 왜 남의 회사에서 만납니까?”
돌아가던 상황을 보던 진만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남의 사무실에 불쑥 불쑥 들어오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이번엔 상혁이 미소를 지으며 진만에게 말했다.
“아까 회의에 더 참여할 인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이곳에 오지훈 씨를 부른 건 바로 접니다.”
상혁이 불렀다고 하자 일단 찔리는 게 있는 진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상혁에게 아무나 데려오라고 했던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좋습니다. 그럼 지훈 씨도 함께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진만은, 상혁에게 다시 한 번 유출 건에 대한 확답을 부탁했다.
“아까 말씀하신대로 저희가 각 신문 1면과 게임 잡지 광고로 표절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개제하고, 상혁 씨가 필요할 때 저희 회사 인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출 건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는 것인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 그거랑 별개로 저희 팀 찾아와서 정식으로 팀원들에게 사과도 해주세요. 그건 조건을 떠나서 기본적인 도리니까 거부하시진 않으시겠죠?”
“그런 거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하겠습니다.”
“그럼 그 조건으로 저희 PTW측에서는 엘란테 소프트의 표절 및 도용 건에 관한 추궁을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나중에 저희가 인력 요청했을 때 잉여 인력을 붙인다던가, 그런 수작질은 안 부리셨으면 좋겠네요.”
“요청하신 인력이 어느 파트이던 저희 회사에서 최고로 실력 있는 인원으로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아요.”
“다시 한 번 관대한 처사에 감사드립니다.”
상혁이 이번엔 유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진만 사장님께서 거짓 정보를 가지고 부탁했기 때문에 매장 진출을 막은 거겠지만 저희는 실제로 그것 때문에 피해를 봤으니까 퍼블리셔측에서도 사과를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저희 회사와는 별개로 담당자인 제가 책임지고 추진한 일이니 제가 진만 대표님과 함께 가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아뇨. 제가 유찬 씨 측에 바라는 건 사과가 아닙니다.”
“예?”
의외로 당사자인 진만을 시원하게 용서하기에 쉽게 풀릴 것이라 생각했던 유찬은 순간 상혁이 금전적인 보상에 대해 언급할까봐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일은 어디까지나 개인 권한으로 처리한 일이었기에 금전 보상이 있을 경우 회사가 아니라 본인이 책임져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혁은 이번에도 금전적인 보상대신 다른 제안을 꺼내왔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지금 이 자리에서 지훈 씨와 저희 퍼블리싱 계약을 두고 공개입찰을 해달라는 겁니다.”
“예?! 공개 입찰요?”
“조건 불러보라고요.”
“여기서요?!”
당황한 유찬이 되묻자 상혁은 웃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적을 알려면 먼저 적의 정보를 아는 게 중요하죠. 저는 진만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는 영길 기자님에게 들었고, 유찬 씨에 대해서는 영길 기자님께 소개받은 여기 지훈 씨에게 들었어요. 두 분이 같은 회사 선후배 출신이고, 신입 시절에 시뮬레이션으로 게임 하나를 두고 퍼블리싱 계약 조건을 경쟁입찰하는 연습을 자주 하셨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찬에게 그것은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다.
자신은 한 번도 지훈에게 이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건을 너무 과도하게 걸면 권한을 넘는 조건을 걸었다고 까이고, 조건을 너무 약하게 걸면 상대가 그 조건에 계약하겠느냐고 까인다.
결국 후배 괴롭히기밖에 안 되는 연습이었다고 생각하는 유찬은 상혁의 말에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요?”
“그걸 라이브로 보고 싶어서요.”
‘미친놈인가?’
유찬은 순간 튀어나오는 목구멍으로 삼키며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퍼블리싱 계약이란 건 그런 식으로 진행하는 게 아닙니다. 저희도 그걸 적정 조건을 맞추는 일종의 연습으로만 사용했고요. 실제로 공개적으로 퍼블리셔끼리 붙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요.”
만약 A와 B, 두 회사에 퍼블리싱 제안을 받는다면, 제작사 측에서는 A에서 계약 조건을 확인하고, B에서 확인한 후에 둘을 비교해서 결정하는 식이 일반적이라는 설명이다.
“태반의 게임은 애당초 여러 회사에 퍼블리싱 컨택을 받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냥 주는 대로 받고요.”
“그 주는 대로 받는 게 싫어서 공개적인 자리에서 경쟁 입찰 해달라는 건데 싫다면 어쩔 수 없죠. 딱히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어떤 연습인가 보고 싶어서 해달라고 한 거니까.”
유찬이 지훈을 바라보자 지훈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 계약 당사자가 하고 싶다는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잖아? 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런 시발 선배도 같이 미쳤나?’
유찬은 이 미친 제안을 거절해야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무려 오프라인 현장에서 정품 패키지를 1만개나 팔아버린 미친 잠재력을 가진 게임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그것대로 엄청난 손해라고 생각한 유찬은 상혁의 제안을 조건부로 수락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다만 부탁 하나만 드리고 싶습니다.”
“뭔가요?”
“적어도 ‘마리의 눈물’을 플레이 해보고 계약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아직 해본 적이 없거든요.”
“아···. 그건 생각하지 못했네요. 합리적인 요구입니다. 그렇게 하시죠.”
그때 진만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어차피 제가 그쪽 학교로 가서 팀원 분들에게 사과하기로 했으
니, 제가 일주일 정도 후에 유찬 씨와 함께 미리 연락을 드리고 그쪽 학교로 가겠습니다.”
“그럼 그때 맞춰서 지훈 씨도 오시면 되겠네요. 지훈 씨는 괜찮으시겠어요?”
“뭐 시간만 알려주시면 스케줄이야 제가 맞추겠습니다. 유찬이가 제 연락처를 아니 시간이 정해지면 그날 뵙죠. 오늘 바로 계약을 못하는 건 아쉽지만요.”
애당초 영길의 소개로 오늘 행사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지훈은 딱히 상혁과 계약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고등학생들이 그럭저럭 괜찮은 게임을 만들었다기에 구경이나 하려고 참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플래시몹을 비롯하여 순식간에 1만개의 패키지를 완판시키는 상혁을 보며,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단순히 ‘마리의 눈물’이 대박 게임이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사람과 계약하는 것이라고, 지훈은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의 눈물’은 단지 시작일 뿐.
앞으로 이 정신 나간 미친 개발팀이 보여줄 행보를 곁에서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 지훈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자리는 여기서 마무리 지읍시다.”
진만은 상혁과 성연을 자신의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상혁은 거절하고 지훈과 함께 돌아갔다.
그리고 지훈이 가져온 차에 몸을 싣고는 조용히 집을 향해 돌아가려 했다.
‘피곤해.’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이 바운드 돼서 오는 것처럼, 긴장이 풀리자마자 엄청난 피로감이 상혁을 덮쳤다.
그러나 슬프게도 상혁은 차 안에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옆에 앉은 성연이 상혁에게 계속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상혁아, 뭐 좀 물어봐도 돼?”
“예.”
“왜 용서해 준거야?”
“말했잖아요. 법원 가면 애매한 문제라고. 게임의 표절 여부는 저작권을 인정받기 극히 힘들어요. 그리고 장르가 다르면 더 심하고요.”
“저쪽은 단순히 베낀 거 말고 이쪽의 개발 버전을 사용했으니 표절이 아니라 도용으로 걸 수 도 있잖아.”
“도용으로 발생한 피해를 증명해야하는데, 저희가 ‘도용을 안 당했으면 이만큼 팔렸을 것이다.’ 라고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하죠.
하더라도 저희가 원하는 만큼의 피해보상은 불가능할거고요. 그럼 그냥 피곤하게 법적 싸움으로 가느니 사과나 대차게 받고 끝내자 싶었던 거예요. 어차피 저희가 소송으로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배상금액보다, 그쪽에서 사과문 개제하면서 쓸 광고비가 더 클 거 같아서.”
“그럼 인력은 왜 요구한 거야? 팀원을 더 뽑으면 되지 않나?”
“뭐, 다음 게임은 스케일을 좀 키울까 생각중인데, 외주로 쓸만한 사람을 수소문하는 게 힘들 것 같아서요. 일단 능력 있는 사람은 동인활동에 관심이 없을 거고, 관심 있다 하더라도 제가 필요한 수준의 인력이 딱 제가 구인공고 올릴 때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는 보장도 없고요. 정식으로 팀원으로 뽑을 사람을 뽑는 거면 제가 직접 발품팔면서 뛰어다니겠지만, 다음 작업에서 필요한 인력은 외주 작업자니까 적당히 빌려 쓰는 수준이면 돼요.”
“이해했어······. 그리고 미안하다.”
성연이 사과하자 상혁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성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문제는 됐다고 했잖아요.”
“아니야···. 애당초 지금까지 고생한 게 전부 내 탓이나 다름없으니까···. 나도 사과를 하는 게 맞을 거 같아.”
“오케이. 사과 받았으니 그건 끝난 걸로.”
“상혁아, 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무게가 담겨있는 성연의 목소리를 들은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세를 바로잡고 성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요. 본인이 얼마나 큰 잘못을 한 건지는 잘 알고 계신 거죠?”
“응.”
“그럼 그걸로 됐어요. 중요한 건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에요. 잘못한 걸 가지고 고쳐야 할 점을 찾아서 고치는 거지. 앞으로 팀 규모가 커지고 사람이 늘면 꼭 이야기 해주도록 하세요. ‘내가 옛날에 이런 실수를 해서 엄청난 사태가 되었었지, 너희는 절대로 그러지 마라.’ 라고요. 그거면 됐어요. 형한테 제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에요.”
“···응···.”
“하나 더.”
“뭐?”
“지금 눈이 반쯤 젖었는데 울면서 안기지만 말아요. 나 지금 피곤해.”
“···알았다···.”
성연은 피식 웃으며 반대쪽 창가로 고개를 돌리자, 상혁도 미소를 지으며 반대편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지훈이 상혁의 휴식을 방해하며 질문을 던졌다.
“물어볼게 있는데 괜찮겠어요?”
‘택시 타고 간다고 할 걸.’
속으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상혁은 한숨을 쉬고는 지훈에게 답했다.
어차피 차까지 태워서 집에 대려다주는데 차비로 어느 정도의 질문은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뭐죠?”
“이 모든 일을 계획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흠···. 설명하자면 좀 긴데요.”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인데요.”
“피곤해요.”
상혁이 다시 거절하자, 지훈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말했다.
“아까 유찬이 게임을 플레이할 시간을 조건으로 걸었을 때는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합리적인 요구였으니까요.”
“그럼 이렇게 말하죠. 저는 게임이 아니라 사람을 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인지, 어떤 식으로 일의 경중을 판단하고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가 제 관심사죠.”
“그러니까, 아까 박유찬이란 분이 요구한 게 정당하다면 지금 지훈 씨가 요구하는 것도 정당하다 라는 거네요?”
“그렇지 않을까요?”
“흠···.”
잠시 고민하던 상혁은 한숨을 푹 쉬더니 자세를 고쳐잡았다.
“합리적이네요. 그리고 기획자는 합리적인 요구에 대해서 거절하지 않는 법이죠. 유찬 씨는 제품을, 지훈 씨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니 원하신다면 설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왜 영길 기자님을 통해서 저에게 컨텍하신건지부터 묻고 싶은데요.”
“개발자는 개발을 해야 하니까요.”
“무슨 의미신지?”
“이번 일련의 사태를 통해서 개발팀이 개발 외적인 일에 너무 시간을 쏟았어요. 그 시간에 발매한 게임의 확장팩을 개발하거나 신작을 개발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퍼블리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거고요.”
“그럼 바로 저와 계약을 추진하셨으면 됐을 텐데요?”
“글쎄요. 오늘 1만 카피 완판 사태가 없었어도 그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지훈이 답했다.
“그것은 상대를 견제하기 위한 게 아니라 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군요?”
“겸사겸사 그런 거죠. 만약에 게임의 흥행성을 증명해야할 법적 분쟁으로 갔을 때 피해금액 산정액도 커질 거고, 퍼블리셔인 지훈 씨에게 저희 능력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고. ”
상혁의 말을 들으며, 어느새 옆에 앉은 성연이 눈을 반짝이며 상혁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신이 속한 팀의 괴짜 기획자가 처음으로 털어놓는 속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듣는 상혁의 사고 방식은, 평소의 상혁이 보여주는 태도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만 큼 놀랍도록 냉정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지훈도 상혁의 설명을 듣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고 방식때문이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지훈은 상혁에게 묻고 싶었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지훈이 이번 계약에 회사의 기둥뿌리를 걸지 말지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그래서.”
지훈이 말했다.
“그 모든 일을 벌이면서, 이상혁 씨 당신이 계획하고 있는 미래란 어떤 미래죠?”
순식간에 벌어버린 4억이 넘는 현찰. 그리고 이번 경쟁 입찰을 통해서 상혁이 얻게 될 매출.
격변하는 게임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될 자금줄을 틀어쥔 상혁이 다음 행보로 무엇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상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조용히 입을 열고는 자신이 회귀 직후부터 오랫동안 고민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제 계획은···.”
그것은 1999년을 살아가고 있는 지훈이나 성연에게는 거의 컬쳐쇼크급의 충격을 주는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