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적반하장
비록 엘란테 소프트의 ‘루나시아 스토리’가 상혁의 팀에서 개발한 ‘마리의 눈물’의 회귀 컨셉을 일부 차용하긴 했어도 상혁은 딱히 표절에 대해 항의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두 게임의 장르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몇몇 요소만 베껴서 넣는다고 비슷한 게임이라고 보기엔 두 게임이 가진 특징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다르기에, 굳이 그것에 대해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었다.
그렇기에 상혁은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상대의 반응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매장에서의 판매 중지 압력에 대해서 오프라인 행사인 코믹월드 참가를 추진하거나, 상대가 맞참가를 선언하자 플래시몹 이벤트를 통해서 이슈를 끌어오는 식으로.
출시한 게임에 대해서는 재미로 승부하고, 상대방이 걸어온 싸움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대응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상혁이 이번 표절 사태를 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혁이 그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생각보다 매우 단순했다.
‘득이 되지 않아서.’
평소에 까불대고 농담을 즐겨하는 성격 뒤에 묻혀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사태를 대하는 상혁의 태도는 기획자답게 철저하게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찾아온 인간의 타입은, 그런 상혁과는 상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두 게임을 플레이 해보지도 않고, 단순하게 한쪽의 말만 믿고 누가 표절했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상혁을 찾아와서 시비를 거는 유찬을 보며, 상혁은 이벤트의 성공으로 좋아지던 기분이 한 번에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상혁은, 자신의 좋은 기분을 날린데 대한 분노를 담아서, 눈앞의 유찬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표절이라고요? 저희 게임이?”
“남이 개발 중인 게임을 가져다가 자기네 게임 만드는데 참고했으니 그게 표절이지!”
“아, 그러십니까?”
목소리는 깔고 있었지만 태연한 어조의 상혁과는 다르게, 어느새 유찬을 따라와서 사람들 사이에 숨어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던 진만은 유찬의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느낌이었다.
유찬의 말대로 남이 개발하던 게임을 멋대로 가져다가 자기네 게임 만드는데 참조한쪽은, 지금 비난받고 있는 상혁이 아니라 자신의 측이었기 때문에.
‘제발 좀 닥쳐.’
진만은 속으로 저 젊은 직원을 향해 욕을 하고 있었지만 진만의 간절한 기도는 정의감에 휩싸인 유찬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대신 상황은 진만의 의도와는 다르게 진만이 가장 원하지 않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좋아요. 저희가 ‘루나시아 스토 리’를 베꼈다고 주장하시고 싶으신 거 같은데, 증거는요?”
“증거?”
“어디가 어떻게 베낀 건지 설명해주실래요?”
“어? 어? 그게···.”
“설마 그것도 모르고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지금 열심히 만든 게임을 팔려고 행사에서 뛰어다니는 순진한 고등학생들을 비난하러 오신거예요? 증거도 없이?”
“어, 흠···. 아! 그래! 여기 패키지 보면 너희 게임도 ‘루나시아 스토리’처럼 주인공이 죽어서 회귀하는 내용이라고 되어있네!”
“그래서 저희가 베꼈다?”
“그래! 그게 증거지!”
“‘루나시아 스토리’ 출시일이랑 저희 게임이랑 같은데요?”
“개발 중인 버전을 멋대로 가져다가 베낀 거겠지!”
“무슨 수로요?”
“어?”
“그러니까 저희 팀원 중에 그쪽 회사 개발자랑 친분 있는 사람도 없고 연관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그쪽의 개발 중인 버전을 빼오냐고요.”
“그, 그건···,”
“그리고 저희 게임은 보시다시피 주인공이 회귀한 거에 맞춰서 게임 플레이가 구성되어있어요. 루나시아 스토리는 초반부에 언급만 되지 스토리 말고는 관련 시스템이 전무하고요. 여기서 하나 묻겠습니다. 과연 누가 누구 게임을 베꼈다고 말하는 게 옳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시선은 유찬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김진만 사장님?”
상혁의 시선은, 연주를 구경중인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이쪽을 바라보던 진만을 향하고 있었다.
결국 진만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고는,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상혁의 앞에 섰다.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악의 원흉.
자신이 욕심을 위해서 한 동인팀을 묻어버리려 했던 악당의 출현 치고는 한없이 초라한 느낌의 등장이었다.
“날 아나?”
“예전에 잡지에 인터뷰 실린 걸 본적이 있습니다. 사진도 같이 올라와 있더군요.”
“자네같은 능력 있는 개발자가 날 안다고 하니까 영광이라고 해야 겠구만.”
“뭐, 그게 아니더라도 조만간 찾아가던가 해서 얼굴은 한번 볼까 하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이 지겨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필요도 느끼고 있었고요. 그쪽에서 걸어온 싸움이니, 굳이 피하시진 않으시겠죠?”
“그건···.”
뭔가를 말하려던 진만은 입을 다물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진만의 태도를 본 유찬은,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느끼고 있었다.
마치 베낀 쪽이 더 당당해보이고, 도용당한 쪽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그리고 유찬은, 그 분위기 속에서 하나의 가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사장님?”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단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유찬에게 부탁하는 진만을 보며 유찬은 자신의 가설이 확실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잘못된 정보로 피해자에게 속이 뒤집어질만한 개소리를 씨부렸다는 사실도.
“아니, 사장님! 지금 이게···.”
“제발!”
진만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시죠. 3명이 다 모인 가운데서요.”
“후···. 좋습니다. 일단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으니···.”
유찬은 그렇게 말하며 상혁을 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전까지 비난하던 상대에게 사과를 하려니 뒤통수가 간지러운 느낌이라서였다.
“저기···. 아까는.”
“됐어요. 사과라면 안 받겠습니다.”
“어? 진짜로?”
“아니, 뭔가 오해하신 거 같은데, 사과를 안 받겠다는 게 당신이 사과할 일이 없으니 안 받겠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재수 없고 꼬우니까 지금 와서 사과 받고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죠.”
“아···.”
“우선은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지금은 이벤트가 한창 진행 중이니까요.”
상혁이 그렇게 말하며 상황을 정리해버리자,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숙여 인사한 뒤 상혁의 부스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옆에서 듣기만 하던 민준이 상혁의 곁에 다가오며 물었다.
“아. 존나 긴장했네.”
“뭐가?”
“니가 칼부림이라도 펼칠까봐.”
“그럴 가치도 없어. 그리고 이번 행사는 완벽하게 우리 승리로 끝난거고.”
플래시몹 이벤트를 구경하기 위해 몰린 인원들이 마치 마법에라도 빠진 것처럼 줄을 서서 게임을 구매해간다.
상혁은 게임을 사기 위해 늘어선 긴 줄을 보며, 오늘 준비한 물량도 완판될 것임을 예상했다.
무려 1만 카피에 달하는 막대한 분량을.
“이럴 줄 알았으면 1만 카피정도 더 준비할걸.”
민준이 옆에서 아쉬운 듯 말하자 상혁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저것도 조립하느라 친구들한테 알바비 주고 알바까지 시켜서 준비한 물량인데 거기서 1만 카피를 어떻게 더 준비하냐?”
“그건 그렇네. 그냥 아쉬워서 그러지. 그래도 뭐 여러모로 선생님한텐 감사해야할 것 같아. 이벤트 연주자도 선생님이 섭외해줬고, 이번에 준비 물량 늘리면서 제작비 추가로 내느라 적금도 깨셨다던데.”
“챙겨드려야지. 확실하게.”
갑자기 상혁이 예상판매물량을 정품 패키지 2천개에서 2만개로 10배로 늘리고 싶다고 이야기 했을 때, 현주는 아무말 없이 적금을 깨서 주문을 넣어주었다.
그것은 현주가 보여주는 상혁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증거였고 상혁은 그 일에 대해서 아직도 엄청난 감사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주변에 너 빼고는 다 적인 것 같았는데 회귀하고 나서는 뭔가 이래저래 주변에 도움이 많이 받네.”
“좋은 거지. 난 억눌려 있던 니 재능이 지금 와서 폭발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겨우 게임 두 개 만들었는데 재능은 무슨···.”
상혁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민준의 생각은 달랐다.
회귀 이전의 상혁을 떠올려보면 이전에 열정과 패기가 있을 때는 능력이 부족해서 실패했고, 능력을 갖췄을 때는 이미 열정과 패기가 죽어버린 상황이 되어버렸다.
회귀라는 기적을 통해서 그 두가지를 모두 갖추게 된 상혁인 지금 거의 언터쳐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보이고 있는 긴 구매 행렬.
그것은 개발자로써 절로 미소가 지어질 수 밖에 없는 뿌듯한 광경이었다.
“뭐, 덕분에 회귀 이후엔 진짜 재미있게 개발하고 있는 거 같다.”
그렇게 말하며, 민준은 저 멀리 보이는 엘란테 소프트의 부스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한눈에 보기에도 명확하게, 기습적인 플래시몹 이벤트 이후로 사람들의 주목이 다 빠져나간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행사 끝나고 미팅도 기대되고.”
민준의 말을 들은 상혁도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일단 우리를 이렇게 고생하게 만든 댓가는 철저하게 치러야 할 테니까.”
“어떻게 할 생각인데?”
“그건 일단 나중의 즐거움. 우선 저쪽에서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 봐서, 처벌의 수위를 결정해야겠지.”
“우리 입장에서 처벌이 가능해?”
“가능하지. 이쪽은 저쪽에서 개발 중인 데이터를 도용했다는 증거도 가지고 있고, 알파 버전 입수 이후에 게임 내용이 변경되었다는 데이터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건 어떻게 얻었는데?”
“유출한 당사자한테 안 가져오면 소송 건다고 협박했지.”
“평소 같으면 너한테 당했을 그 사람에게 동정심이라도 가졌겠지만, 해놓은 짓이 있으니 별로 동정심이 안가네.”
“뭐 그쪽에서는 선의로 그랬다지만 하면 안 되는 짓을 하긴 했지. 솔직히 민사 걸어서 먼지까지 터는 방법도 있겠지만, 남성연씨랑 아는 사이라 내가 원하는 데이터를 넘기는 선에서 그쪽은 용서하려고.”
“너무 관대한 거 아냐?”
민준의 말에 상혁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개인한테 민사 걸어봐야 돈도 얼마 못 털고 법원 왔다 갔다 하느라 귀찮기만 한데 털려면 기업을 털어야지.”
“그래서, 엘란테를 털겠다?”
“싯팔 앵간 하면 봐주겠는데 오늘 건까지 포함해서 대놓고 회사 힘으로 동인팀 뭉개려고 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뭐, 뭘 하던 니 의견을 따르겠지만,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지는 마라.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잖아. 엄밀히 말하면 그쪽에서 표절을 인정했어도 두 게임 장르가 달라서 법원 가면 좀 애매해지는 문제기도 하고.”
“그게 고민이야. 차라리 확 베꼈으면 아예 밟아버리겠는데 베낀 부분이 좀 애매하단 말이지.”
그렇게 둘이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에, 두 사람의 앞에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웠다.
두 사람이 앞을 보자 거기엔 땀을 뻘뻘 흘리며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자그만 여고생이 서 있었다.
물론 그 여고생의 정체는 방금 전까지 5천개가 넘는 패키지를 팔면서 5천 번 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던 팀의 홍일점, 서연이었다.
“오빠들. 이제 교대 좀 하시죠?”
“아, 미···. 미안.”
두 사람은 급하게 사과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부스로 향했다.
그리고는 서연의 대신 자리에 서서 힘차게 고개를 숙이며 외치기 시작했다.
“구매 감사합니다!”
그렇게 외치면서도, 상혁의 머릿속은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에게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이나 엿을 먹인, 이 좆같은 새끼들을 어떻게 엿 먹여야 속이 시원할지에 대한 생각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