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돌아온 돌아이
두 사람이 회귀하기 전, 민준은 상혁이 벌이는 돌아이짓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보아야했다.
무식하게 신념만 있고 혈기만 넘치는 상혁은 마치 자신이 게임업계의 신묘한 진리를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매사 행동에 거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일컬어 민준은 ‘기획자 병’이라고 불렀는데,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자신의 아이디어로 마치 드라마처럼 짠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상혁의 태도를 보고 붙인 병명이었다.
그리고 그 드라마병의 유일한 치료약은 ‘실패’였다.
의외로 자신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 것을 수없이 겪다보면, 결국 현실을 깨닫고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 40이 된 상혁은 이미 현실에 무딜대로 무뎌진 아저씨 기획자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구로에서 과로사를 하고 과거로 회귀하게 되면서 몸은 고등학생이 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마음은 아직 40대 아저씨였기 때문에 상혁의 비교적 얌전한 태도는 그런 상혁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었고.
그러나 예상치 못한 위기의 상황에서 민준이 던진 한마디에 상혁은 다시 돌아이로 각성하려 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기획자 병’에 걸렸던 젊은 시절의 상혁처럼, 자신의무모한 행동을 통해서 상황을 무대뽀로 해결하려는 기질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기획자 병이 재발한 팀장은 무려 고스로리 드레스로 여장을 하고 전혀 안 어울리는 모니터를 한쪽팔로 든 채로 부스에 도착해 민준의 앞에 서 있었다.
“아 시발 골 아파···.”
민준은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도 피식하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실 자신이 게임업계로 진로를 결정하고 과로사를 할 때까지 상혁의 곁에 붙어있었던 것도, 이런 상혁의 모습이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이는 확실하게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혁은, 적어도 그 분야에서는 민준이 아는 최고의 돌아이 중 한명이었다.
“오빠, 저 다른 부스 구경하고 왔어요. 이제 제가 자리보고 있을 꺄아아아악!!!”
마침 쉬는 시간을 마치고 돌아오던 서연은 그런 상혁의 모습을 보고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고, 상혁은 그런 서연에게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보였다.
“이건 뭔 상황이래요?”
“게임을 홍보한다고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어디서 옷을 빌려 입어 왔나봐.”
“오빠 미쳤어요?”
“안 미쳤어.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살짝 미친 게 좋을 거같아.”
“좋은 말로 오빠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아요. 당장 갈아입고 오세요.”
“왜? 주변을 둘러봐. 장내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몰려들고 있잖아?”
“저건 선망의 시선이 아니라 경악의 시선일걸요?”
“어찌됐건 시선만 끌면 됐어. 지금 이 전시장 전체에 동인게임 파는 부스가 몇 개나 된다고. 그리고 우리처럼 퀄리티 높은 게임은 존재하지도 않잖아. 홍보만 하면 팔 수 있는 상황이라고.”
“후···.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최소한 혐오감은 좀 없애야할 거 같아요. 저기 봐요 지금 오빠 뒷모습보고 걸어오던 남자가 오빠 얼굴보고 흠칫 하고 뒤로 물러나잖아요.”
“그건 부수적 피해라고 하는 거야.”
“그래도 없앨 수 있으면 없애야죠. 민준 오빠? 미안한데 조금만 더 부스 맡아주세요.”
“어? 뭐하게?”
“기왕 여장한 거 제대로 시켜주려고요.”
그렇게 말하며, 서연은 바닥에 놓인 가방에서 자신의 손가방을 꺼냈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상혁을 구석진 자리로 데려갔다.
잠시 후.
단순히 드레스를 입는 것은 객기 어린 용기라고 생각했던 상혁은 화장까지 하게 되면서 조금 흥분이 가신 듯 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살짝 부끄러운지 얼굴에 홍조까지 띄우고 있었는데. 서연이 그런 상혁을 완벽하게 화장시켰기에 이제 상혁은 살짝 튀어나온 목젖만 빼면 그냥 머리 짧은 미소녀처럼 보이고 있었다.
민준이 입을 떡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자 상혁은 한술 더 떠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멘트를 날렸다.
“상순이라고 불러주세요~”
“으아아 내눈! 저거 안본 눈 산다!”
민준이 양손으로 눈을 가리고 비명을 지르던 말던, 상혁은 소녀답지 않은 걸음걸이로 힘차게 부스쪽으로 걸어가더니 아까 한쪽팔에 끼고 온 모니터를 부스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노트북을 연결해 게임화면을 띄워놓고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전설의 명작! ‘공주 키우기 2’!”
호리호리한 미소녀가 남자다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좌중의 시선이 쏠렸고, 상혁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3편은 마음에 안드셨던 분들! 저희도 그랬습니다! 2편이 훨씬 재미있었어요!”
상혁의 외침에 사람들중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3편은 좀 아니었어.”
“그렇지. 2편이 훨씬 재밌었지.”
“그.래,서!”
상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만들었습니다! 공주 키우기2의 정신적 후속작!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팬심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공주 키우기! ‘마리의 눈물!’ 지금 코믹월드 1회에서 판매중입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사람들이 게임을 구경하려 몰려들자, 상혁은 모니터 앞에 앉아 게임을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혁의 주변에 몰린 사람들이 상혁에게 게임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 화면은 재밌어 보이는데? 이게 진짜로 여러분들이 만든 게 맞아요?”
“기획은 제가, 프로그래밍은 저기서 눈 부여잡고 있는 놈이, 그리고 원화는 옆에 있는 아리따운 여고생이 그렸답니다.”
“믿고 샀는데 버그 투성이면 어떻하게? 동인 게임은 AS도 안되는데?”
“저희 프로그래머가 괴물이라 버그도 별로 없겠지만 있는 버그는 일단 다 잡았습니다. 웬만한 상용게임보다 버그 찾기 힘들걸요? 그리고 AS는 저희 홈페이지에서 추후에 패치로 배포할 예정입니다.”
“고등학생들이 만든 것 치고는 퀄리티 좋은데? 하나 줘 봐요.”
“옙! 고객님! 여기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상혁은 게임을 디자인할 때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디자인했다.
누군가 옆에서 하고 있으면 뺏어서 하고 싶은 게임.
게임화면만 봐도 재미있어 보이는 게임.
게임 전체에서 상혁의 그러한 철학이 엿보인다.
버튼 하나, 캐릭터 하나에서 ‘어? 저게 뭐지? 나도 하고 싶다’라는 느낌이 드는 게임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은 실제 그럴싸한 게임화면을 본 유저들의 구매로 이어졌다.
“오, 오오! 팔린다! 팔려!”
민준의 감탄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게임이 팔리기 시작했지만 상혁은 아직 게임 구매를 결정하지 못하고 밍기적 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유저에게는 가격이 문제라고 판단했다.
“선생님!”
인솔자 자격으로 와서 게임판매를 맡으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현주를 상혁이 부르자, 현주는 입이 귀에 걸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호호호 상혁아, 여장은 좀 괴랄한 발상같긴하지만 어떻게 잘 풀린거 같구나?”
“저희 오늘 타고 온 차에 아직 포장 안된 CD있죠?”
“어? 응. 근데 매뉴얼이랑 박스는 없는데?”
“민준아, 선생님 따라서 그거 갖다줘.”
“어? 뭐하게?”
“묻지말고 빨리.”
잠시후, 민준이 커다란 박스를 가져오자 상혁은 박스를 열고 안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직 정품 패키지 포장이 끝나지 않은 CD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상혁은 박스에서 CD를 꺼내 책상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A3용지에 커다랗게 매직으로 쓴 글씨를 책상 밑에 붙여놓았다.
‘1회 코믹 한정! 정품 박스와 매뉴얼이 없는 쥬얼 CD를 파격가 1만원에 판매합니다!’
“뭐?! 오늘 발매하는 게임을 쥬얼로 팔겠다고? 상혁이 너 미쳤어?”
“어차피 지금속도면 준비한 500카피는 다 팔아. 나머지도 지금 팔아버리자.”
“메뉴얼이랑 박스까지 포함해서 3만 9천원에 팔면 2만원 가까이 이윤이 남는데 쥬얼로 팔면 7천원밖에 안 남잖아!”
민준이 소리 지르자 상혁은 씨익 웃었다.
애당초 돈을 보고 만든 게임이 아닌 것을.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40세 게임 제작자의 사고방식에 갇혀있었던 것처럼, 민준도 그러한 것이다.
“됐어. 돈은. 어차피 이거 다 합쳐도 2천 카피도 안 돼.”
“그럼 적게 파니까 이윤을 더 붙여야 정상 아냐?”
“난 수십억 벌고 100명만 즐거워하는 게임보다 적게 벌어도 수만 명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표정은 단호했다.
“최대한 이번 행사에서 우리 게임을 뿌려놔야지 상대방한테 반격을 하지.”
“반격? 엘란테 소프트 말하는거야?”
“거기랑 우리 게임 안 받겠다고 말했던 용산 게임 매장까지.”
“여기서 쥬얼 팔면 그게 가능하다는 거지?”
무슨 원리인지는 잘 모르지만 상혁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민준은 그런 상혁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좋아. 그럼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 나도 도울게.”
자신도 모르게 상혁의 돌아이짓에 동화된 것인지, 아니면 몸이 고등학생이라 이런 상황에서 쉽사리 흥분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준은 자신도 상혁처럼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오직 지금 이때만! 오늘 발매한 정품 게임 CD가 1만원!”
평소에 잘 흥분하지 않는 민준이 그렇게 소리 지르며 군중 속으로 걸어 나가자 서연과 현주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한명은 여장을 하고 오질 않나, 한명은 갑자기 평소와 다르게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점잖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엔 무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쪽팔림이라는 단어를 감수하고 하나가 되어 소리를 지르게 만들 만한 그런 열정이.
그리고 잠시 후, 서연과 현주는 민준과 함께 군중 속으로 뛰어나가 함께 소리 질렀다.
그것은 쪽팔릴지는 몰라도, 부끄럽지는 않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귀까지 빨개진 상태로 소리지르며 뛰어다닌 결과는···.
***
“완판이네. 패키지 500개, 쥬얼 1500개. 2천 카피 완판.”
가격 때문에 주저하던 사람들이 1만원이라는 가격에 혹해서 많이 구매해주었고 무엇보다 ‘공주 키우기 2’의 향수를 자극하며 소리지르고 다닌 게 판매에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지금 현장에서 네임밸류도 없이 2천 카피의 게임을 완판한 주인공들은, 반쯤 파김치가 되어 부스 근처에 이리저리 널 부러져 있었다.
“제작비 빼고 순이익은 2천만 원 정도인가.”
“오, 많다.”
“우리 인건비 빼면 손해야. 아직 더 팔아야 돼.”
“아, 그렇네. 인건비가 있었지.”
물론 다들 자진해서 동인형태로 참여하여 만든 게임이었지만, 상혁은 제대로 각자의 일한 기간을 산정해서 지불해야하는 임금을 세어놓고 있었다.
나중에라도 뭔가 이윤이 되는 게임을 잘 만들면 그때 전부 줄 생각으로.
“그런데 아까 물어봤던 거지만 여기서 2천 카피를 완판한 게 의미가 있어?”
그때 민준이 상혁에게 묻자 상혁은 잠시 고민하다 민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우선, 앞으로도 이렇게 행사마다 돌아다니면서 게임 판매를 진행할 순 없다는 건 너도 동의하지?”
“동의해.”
“그렇다고 매번 매장에 게임을 납품하려고 학교 쉬면서 용산에 들락날락 할 수도 없잖아.”
“근데 방법이 없잖아.”
“아니지, 내가 굳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이곳의 사람들이 소셜 마케팅에 최적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야.”
“소셜마케팅? 인터넷도 제대로 보급 안 된 시대에?”
“애당초 여기 사람들이 어디서 정보를 얻어서 찾아온 거라고 생각하는데?”
상혁의 질문에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애당초 티비 광고를 하고 다니는 행사도 아니니, 다들 어디선가 정보를 얻어서 참여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이곳에 참여한 인원의 대부분은 PC통신이든 인터넷이든 동인행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말이었다.
민준은 그제야 상혁이 오프라인 판매를 기획한 의도를 깨달았다.
“그럼 너 설마 여기 참여한 게···.”
“맞아.”
반쯤 흘러내린 니삭스를 손가락으로 끌어올리며, 상혁이 민준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원래 계획했던 계획의 결과가 어찌 될지를 민준에게 말해주었다.
“이제 매장에서 우리 게임을 납품하게 해달라고 찾아오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