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
며칠 뒤.
현주는 CD패키지를 만드는 업체와 매뉴얼과 박스를 만드는 업체를 수소문해 외주를 맡겼고 각각 500카피 분량의 패키지를 주문했다.
그래서 지금 부실 안에는 접지 않은 게임 패키지 박스와 CD가 담긴 박스들이 부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선 현주가 섭외한 업체 중에 아예 매뉴얼까지 한 번에 제작하는 업체는 단가후려치기가 심해서 종이 질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현주는 주로 가수들이 음반을 맡기는 고급 프레스 업체에 CD를 주문하고 매뉴얼과 박스는 전문 인쇄업체에 맡기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그 이야기는 지금부터 500카피의 패키지를 모두 상혁일행이 손으로 조립해야한다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상혁은 다 같이 모여서 자신들이 만든 게임의 패키지를 조립하는 것도 2000년대 오기 전에나 느낄 수 있는 게임업체의 로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흔쾌히 현주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렇게 주문한 게임 패키지의 원가는 1카피당 만원 수준.
이것의 주문을 위해서 현주는 500만원정도를 지출해야 했었다.
원래 좀더 대량 주문이었으면 7천원 수준까지도 떨어트릴 수 있었지만, 워낙 소량 생산이었기에 단가가 올라간 것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퀄리티는 압도적이었고 다들 패키지를 접으면서 깔끔한 고급 광택지에 인쇄된 매뉴얼과 CD에 두근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광경 속에서 상혁은 며칠간 고민하던 내적 고민의 결단을 내려야했다.
‘패키지 가격을 얼마로 할 것인가.’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원가가 1만원이니 판매가격-원가=순이익 이라고 계산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길거리에 좌판을 깔아놓고 판매하는 게 아닌 이상 게임 샵을 중심으로 판매를 진행해야하고 그 말은 소매점에 마진을 떼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힘들게 1년 동안 만들었으니 자신들도 어느 정도의 돈은 만질 수 있어야한다.
막상 팀에서 일하는 당사자들은 단순하게 동인 제작이니 취미삼아 하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상혁은 이 게임을 팔아서 팀원들에게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싶었다.
‘역시 3만 9천원이 적당하겠어.’
그 정도면 소매점 마진을 떼고 나서도 카피당 1만원이 넘는 이득이 나온다.
1999년의 게임 시장의 규모, 타 게임이 국내 시장에서 기록했던 판매량의 정도,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게임의 퀄리티를 감안할 때 상혁은 최대 판매량을 3만장 정도로 보았고 그 정도면 3억정도의 이득이 남는다.
그러면 팀원들에게 분배할 충분한 이익이 될 것 같았다.
“우선은 이 500카피를 모두 팔고.”
지금 생각하는 것은 이후의 이야기.
게임이 잘 팔려서 저 500카피를 판 돈으로 또 게임을 주문하고 그걸 또 팔고 또 팔아야 달성되는 꿈같은 이야기.
그러나 상혁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들이 만든 게임이 반드시 잘 팔릴 거라는 자신이.
그리고 그 순간 상혁은 자신이 영길의 기사를 통해 취했던 선공이 내일 자신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움직임에 분노한 상대가 지금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에 대해서도···.
***
“물건을 안 받으신다고요?”
아직 주5일제가 정착되기 전이라 대부분의 매장이 문을 열고 있는 토요일의 용산.
그날은 마침 상혁의 학교에서 하루종일 부활동이 가능한 날이었기에 상혁은 부원들을 데리고 아침부터 용산의 게임 매장을 돌았다.
그리고 벌써 3번째 들린 게임 매장에서, 상혁은 직원에게 거부의 의사를 들어야했다.
그것도 이유를 알려줄 수 없다는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처음 거절당했을 때야 단순히 자신들이 고등학생이고 인지도가 적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던 상혁은 3번째 가게에서도 거절당하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애당초 게임이 달마다 우수수 쏟아지는 2020년대면 몰라도, 가뭄에 콩나듯 발매되는 한글 게임을 진열조차 거절한다는 건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상혁은, 보다 못해 자신 대신 나선 서연이 여고생 버프를 사용하여 직원에게 뜯어낸 정보를 통해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미친?! 그런 짓까지 한다고?”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상할정도로, 그런 짓을 벌일 상대는 하나밖에 없었다.
엘란테 소프트.
상혁일행이 만든 게임의 베타버전을 멋대로 가져가서 베껴간 회사.
그 정보를 접한 상혁이 잡지사에 먼저 자신들이 개발 중인 게임에 대해 공개하는 것으로 역습을 취하자, 엘란테 소프트에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유통채널을 통해서 상혁들에게 반격을 가한 것이었다.
“지네 게임 유통 마진을 올려 잡아 줄 테니 우리 게임을 받지 말라고 했다는 거지? 참 더럽게 노네.”
성연이 옆에서 혀를 차며 이야기하자 민준이 답했다.
“그쪽에서는 자기들 당한 것만 생각하고 있을 걸요? 고등학생 주제에 건방지게 프로개발자한테 덤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어쨌든 지금 그럼 게임 매장 쪽에는 납품이 안 된다는 거잖아. 용산 말고 지방 쪽으로 가볼까?”
“걔네가 끼고 있는 총판이 전국구라 그것도 힘들걸요?”
진만은 엘란테 소프트의 게임을 유통하는 퍼블리셔에게 자신들이 개발한 게임을 보여주고 크게 기대를 받았다.
물론 상혁들이 만든 게임과 비교하면 형편없이 밀리는 퀄리티겠지만 순수하게 게임 자체만 놓고 보면 국내에서 보기 힘든 신선한 게임임에는 틀림없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총판에서는 이번 ‘루나시아 스토리’의 판매에 엄청난 물량을 투입하여 전국 매장에 푸쉬를 넣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혁 일행은 그런 거대 유통사를 상대할 힘 따위는 전혀 갖추고 있지 못했다.
“퀄리티나 재미나 우리게임이 압도적일텐데···.”
다들 어깨에 힘이 빠졌는지 축 늘어진 분위기.
-짝-
그때, 일행 한쪽에서 커다란 박수 소리가 났다.
이곳까지 중고 승합차를 구해서 일행을 데려온 현주였다.
“어이, 제자들? 나는 너희들을 그렇게 약하게 키우지 않았다고?”
“엄밀히 말하면 저희 담임 한 번도 안하시지 않았나요?”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어찌됐던 난 게임 제작부의 담당선생이고 너희는 부원이니까!”
“그래도···. 방법이 없잖아요···.”
사실 외주비까지 거의 천만 원 이상 투자한 현주가 가장 심적 타격이 클텐데···.
현주는 제자들 앞이라서 그런지 전혀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현주는 모두의 등짝에 힘차게 스매시를 날렸다.
“악!”
“꺅!”
“윽!”
“너희들,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 너희들이 만든 게임이 저따위 더러운 방법에 질정도로 허접한 게임이었어?”
“선생님?”
“내가 호구도 아니고, 그냥 내 제자들이 만든 게임이니까 하고 적금까지 깨서 털어 넣은 줄 알아? 난 말이지, 너희가 만든 게임을 처음 했을 때도, 그리고 최종 완성버전을 했을 때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구.”
‘세상에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이번엔 이렇게 해볼까, 다음엔 저렇게 해볼까 하고,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면서도 게임이 눈에 아른거려서 분필이 손에 안 잡힐 만한 게임을 내 제자들이 만들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단 말이야.”
그리고 생각했지. 그렇게 현주는 말을 이었다.
“‘이건 안 될 수가 없다. 이게 성공 못하면, 그건 뭔가 세상이 잘못 된 거다.’ 라고. 내가 볼 때 아직 하늘은 푸르고 해는 동쪽에 떠 있거든? 내가 보기엔 아직 세상이 정상 같은데, 너희가 보기엔 아니니?”
그녀의 말은, 어찌 보면 정론적인 말이었다.
결국 게임이란 건 뭐가 더 재미있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재미에서, ‘마리의 눈물’은 ‘루나시아 스토리’따위에 밀릴 게임이 절대 아니었다.
“맞아요! 저희 게임이 저따위 게임에 밀릴 리 없죠!”
“나도 이번같이 음악에 전념한 적이 없었어.”
민준은 그런 팀원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살짝 얼이 빠져있는 상혁을 보며 말했다.
“아직 다들 의욕이 넘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 ‘팀장님’?”
민준의 그 말이 상혁의 가슴에 무언가를 터트렸다.
무려 15년 동안 게임업계의 어두운 곳에서 좆같은 꼴은 다 겪어본 개발자로써의 영혼에 담겨있는 무언가를.
“그래! 씨발! 우리 게임이 2만배는 더 재밌는데!”
“맞아요!”
“학생이 그런 말 쓰면 안 되지만 뭐 씨발! 맞아!”
현주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게 상소리가 튀어나오자 모두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 같이 용산 한복판에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썅! 우리가 이긴다고요!”
“아주 그냥 개같이 밟아주겠어!”
“우오오오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민준이 조용하게 상혁을 보며 말했다.
“우리 게임이 재밌는 것도 맞고, 저쪽 게임보다 월등하게 퀄리티도 뛰어난 건 맞아. 문제는, 그걸 알려면 일단 게임을 해봐야한다는 거지. 그리고 게임을 하려면 게임을 구매해야하고.”
맞는 말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뛰어난 게임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유통이 되지 않으면 비운의 명작이 될 뿐이다.
몇 년 후 인터넷에서 ‘숨겨진 고전 명작 게임’ 정도로 웹하드에 올라오는 게 정해진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혁은 그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시간을 줘.”
우선은 냉정하게 고민해야한다.
지금 자신들이 가진 게 무엇이고, 상대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일단 게임 매장 상대로 장사하는 건 어렵다.’
기본적으로 게임 매장은 그 게임 하나만 팔고 가게를 닫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게임을 팔아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총판이나 퍼블리셔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아무리 설득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영길 씨한테 기사한번 더 써달라고 할까?’
역효과다.
애당초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게임이 상대에게 역으로 이슈를 만들어 바치는 꼴이 될 수 있다.
상대가 만든 게임이 아예 쓰레기면 가능할지 몰라도, 일단 엘란테 소프트 개발자들도 전작을 만들던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게임 자체는 그럭저럭 양품으로 뽑아냈기 때문에, 자신들이 굳이 상대 게임의 홍보를 자처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가 가진 거···. 우리가 가진 거···.’
상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교생의 나이를 감안하면 거의 괴물급의 실력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가 전심전력으로 그린 그래픽.
20년후 쯤 국내 게임 음악계의 거장이 될 유능한 작곡가가 만든 뛰어난 OST.
담당 선생이 사비까지 털어서 만들 정도로 공들여서 주문한 패키지.
그리고 자신이 20년 넘게 쌓아온 게임 지식을 활용해서 지금 유저들에게 가장 큰 재미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해서 만든 게임 시스템까지.
그러나 그런 것은 지금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던 상혁은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
그것은 자신이 2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1998년 봄으로 과거 회귀한 회귀자라는 사실이었다.
‘타임라인.’
단순하게 자신은 그것을 언제 무슨 게임이 발매되는지, 그리고 미래에 어떤 게임이 히트하는지 만을 파악하는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쓸모가 없어진 지금, 자신의 지식은 다른 정보를 떠올려내야만 했다.
‘1999년도에 있었던 일···. 1999년도···.’
게임을 판매할 만한 방법과 연계해서 99년도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연결해나가던 상혁은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1999년 5월에 대한민국 최초로 1회 서울 코믹이 열렸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회귀 이후에는 게임 개발에만 전념하느라 서브컬쳐와 관련된 문제에 아예 관심을 끊었지만, 회귀 전만 해도 상혁은 싫어하는 민준을 억지로 끌고 5회까지 열심히 코믹월드를 다닌 적이 있었다.
물론 거의 2~3달 간격으로 계속 이뤄지는 비슷한 행사에 급격히 관심이 떨어져 2000년부터는 안 가지는 했지만···.
“좋아. 어떻게든 될 거 같다.”
상혁이 고개를 들며 일행을 보고 말하자, 일행들이 반색하며 상혁에게 물었다.
“방법을 찾았어?”
“오빠?”
“어떻게 할 거야?”
“생각해보니까 500카피 정도면 굳이 매장을 통해서 팔지 않아도 처리는 가능할거 같아.”
“어떻게?”
“어떻하긴. 좌판 벌려놓고 파는 거지.”
상혁의 말에 뭔가 기발한 수단을 생각하던 모두의 표정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러자 민준이 상혁을 보며 다시 물었다.
“설마 리어카에 실어서 돌아다니면서 팔자는 건 아니지?”
“설마. 그럴 리가.”
“그럼 500개나 되는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건데?”
뒤쪽에 있는 승합차 안에 쌓여있는 패키지를 가리키며 민준이 묻자, 상혁은 씨익 웃었다.
“게이머를 위해서 만든 게임이니까, 게이머들이 많은 행사에 가서 팔면 되지.”
“아직 우리나라에 게임쇼 같은 건 없는데?”
매년 부산에서 개최되는 G-STAR를 떠올린 민준이 말했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2000년대 중반쯤이나 되야 게임 쇼라고 할 만한 행사가 생긴다.
물론 해외 쪽으로 가면 있기야 하겠지만, 지금 자신들이 가진 게임은 한국어버전이었기 때문에 상혁의 계획에는 무리가 있어보였다.
“게임쇼를 말한 게 아니야.”
“뭐? 그럼 뭔데?”
“게이머가 게임쇼만가냐?”
“게임쇼 말고 뭐가 있는데?”
“니가 전에 그렇게 가기 싫다고 뻐튕기던 곳.”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던 민준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상혁이 말하던 ‘전에’가 현재의 ‘전에’가 아니라 회귀 전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준이 개인적으로 떠올리기 싫어하는 기억이기도 했다.
“오 시발 맙소사···. 거길 또 가자고?”
“난 좋은데? 그리고, 다른 방법 있어?”
상혁의 말에 민준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그리고 한참의 고민 끝에 자신의 머릿속에 생각나는 방법들이 상혁의 아이디어보다 좋지 않다는 것을 마지못해 시인해야했다.
“젠장. 그거보다 좋은 아이디어는 못 찾겠다.”
“오빠들? 그게 뭔데요?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서연이 묻자 상혁이 서연을 보며 말했다.
“우린 1회 서울 코믹에 참가할거야. 게임 판매 부스를 신청해서.”
“어? 그게 뭔데요?”
“너 그림 그리는 애가 서울 코믹을 몰라?”
사실 서연은 일러스트레이터 치고는 오로지 게임 그래픽에만 관심이 있었고 타 서브컬쳐 계열엔 완전 문외한이었다.
그리고 성연과 현주도 그것은 비슷한 상황.
결국 상혁은 이 일반인들에게 서울 코믹이란 행사의 개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간단하게 모두에게 그곳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만화나 게임 매니아들이 모아둔 용돈 들고 뭔가 사러 모이는 곳.”
그리고 그 설명은, 적어도 3사람이 듣기에는 ‘마리의 눈물’을 판매하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같이 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