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인연을 위한 투자
‘마리의 눈물’은 분명 '공주 키우기 2'를 모티브로 한 게임이었지만, 게임의 방향성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게임이었다.
궁전 내부의 모략이나 인물 관계, 그리고 실제 살아있는 인물들처럼 느껴지는 AI를 토대로 정말로 왕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해진 운명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주인공의 느낌을 주는 것이 ‘마리의 눈물’의 개발 방향이었고 상혁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것을 설계하는데 투자했다.
몇십번을 플레이해도 매번 다른 느낌의 게임.
똑같은 플레이를 하더라도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는 게임.
수없는 실패 속에서 조금씩 캐릭터의 성격과 능력을 파악하고 진짜 회귀자처럼 쌓여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다가오는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게임.
때로는 자신의 측근이 목숨을 바쳐 주인공을 지키거나 전혀 상상도 못하던 타이밍에 배신을 하기도 하는 게임.
상혁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게임이었다.
엘란테 소프트에서 마리의 눈물의 개발 버전을 가져갔을 때, 그 버전은 상혁의 그런 비전이 적용되기 전의 버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완성된 버전은, 상혁이 전심 전력으로 자신이 생각한 수준에 근접할때까지 지속적으로 수정과 개발을 거쳐 꽤 그럴싸하게 자신의 비전을 구축한 버전이었다.
정말로 존재하는 인물들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상혁은 특이한 시스템을 넣었는데, 그것이 바로 ‘운명 시스템’이었다.
마치 지뢰크래프트를 처음 실행할 때 세계가 생성되고 결정되는 것처럼, 게임을 시작할 때 그 회차 플레이의 정해진 운명값이 결정되고 그것에 따라 사건의 발생이나 AI의 대응이 변화한다.
그렇기에 마리의 눈물은 매 회차마다 굉장히 다채로운 경험을 안겨주는 게임이 될 수 있었다.
전 회차에서는 등장조차 하지 않던 엑스트라가 다음 회차에서는 중요 인물로 주인공을 암살하려 한다거나, 이전 회차에서 라이벌이었던 귀족 영애가 다음 회차에서는 주인공을 위해 가장 노력하는 후원자가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중요한 것은 그 모든 AI의 반응이 단순하게 랜덤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NPC의 모든 행동에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후반 작업 내내 상혁을 밤새게 만들었던 가장 큰 장벽이었다.
“그리고 결국 성공했구나.”
“어···.”
“초기 버전은 AI가 너무 복잡해서 캐릭 하나 셋팅하는데 이틀씩 걸렸지?”
“뭐 그렇지.”
회귀 전에 15년간 게임회사에서 현업 개발자로 일했던 상혁이지만 상혁 역시 이런 형태의 게임을 개발한 경험은 없기에 시행착오는 필수적이었다.
그렇기에 상혁이 처음 만들었던 프로토타입 AI는 각 상황에 대한 모든 대응을 따로 테이블에 셋팅하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것은 극히 비효율적이었다.
결국 NPC 3명 정도를 셋팅하고 나서, 상혁은 완전히 손을들고는 AI의 대대적인 개편을 시도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VER 2.
매 상황마다 반응 값을 다르게 셋팅해야하는 초기 버전과 다르게 특정 성격의 프리셋을 미리 만들어두고 각 프리셋이 캐릭터의 능력치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게 만드는 버전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혁은 각 캐릭터마다 성격을 일일이 설정해주는 대신, 캐릭터의 성격만 지정한 상태로 능력치를 다르게 지정해줌으로써 간단하게 캐릭터가 다르게 행동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다.
예를들어 외모 능력치가 높은 캐릭터가 성격이 교활할 경우는 미인계를 사용해서 계략을 펼치지만, 자존감이 높은 성격일 경우는 다른 방식의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 형태의 AI설계를 통해서 상혁은 마침내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형태의 게임을 만들 수 있었다.
예측할 수 없이 매 회차마다 플레이가 변화하면서도, 각 인물의 행동의 이유가 명확히 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상혁이 설계한 ‘캐릭터의 성격의 구현’은 내부 테스트에서는 이미 압도적인 평가를 받은 상태였다.
“진짜로, 저희 게임은 AI가 핵심인거같아요. 가끔 정말 사람같이 느껴질때가 있다니까요?”
서연도 최종 버전을 플레이 하며 상혁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서연의 게임 화면에서는, 이전 회차에서 서연이 측근으로 썼던 인물이 서연이 건넨 독이든 와인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고 있었다.
“걔 측근으로 삼으려는 거 아니었어?”
“얘는 중반까지 설득 못하면 그냥 죽이는 게 편하더라고요. 능력치도 워낙 좋아서 살려두면 후환이 두려워서···.”
“너 은근 잔인하다?”
“히히히···. 게임이니까요.”
단순히 인물의 능력치가 아니라 성격을 중심으로 게임 플레이를 계획하는 것은 상혁이 바라던 플레이 그 자체였기에,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서연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민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평가는 어떠려나?”
“모르겠다. 일단 게임이 좀 헤비해진만큼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기도 하고.”
“맞아. 그러니까 더더욱 잘 모르는 사람의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상혁이 우려를 담은 눈으로 민준을 바라보는 그 시각,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현주는 상혁이 건네준 마리의 눈물을 플레이 하는 중이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현주는 ‘압도적’ 이라는 표현을 떠올렸다.
분명 고등학생인 자신의 제자들이 만든 게임임에도, 그 짜임새가 너무 완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잘 짜여진 캐릭터들과의 상관 관계, 그리고 그 캐릭터의 성향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한 능력치와 스킬 설정.
상혁이 철저하게 다듬어 맞물리게 만든 사교파트와 영지 경영 파트의 절묘한 조합은 게임의 완성도를 개편 이전보다 몇 배로 더 살려내고 있었고, 그 개선으로 인해 그래픽과 음악 역시 시너지를 받아 플레이하는 내내 ‘잘 만들었다’ 라는 감탄사를 나오게 하는 매력을 갖추게 되었다.
교수형 당했던 주인공이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운명을 피한다는 컨셉에 이끌려 게임을 플레이하다보면, 어느새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관계에 깊이 빠지게 되어버린다.
특히 매 회차마다 등장하는 이벤트가 변해버려 상황에 맞춰 가장 필요한 측근을 파악하고 결정하는 과정은 ‘'공주 키우기 2'’에서는 느낄 수 없던 긴장감을 주고 있었다.
‘어떻게든 단점을 찾기는 해야 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제자들이 찾지 못한 치명적인 단점을 떡 하니 찾아내여 자랑스럽게 한몫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의 눈물’은 전문 테스터도 아닌 그녀의 눈에 뻔히 보일만한 단점을 가진 게임이 아니었기에, 현주는 결국 자신이 이 게임과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해야했다.
“내가 졌어.”
약속한 날짜가 지나고, 테스트 결과를 알려주기로 한 날. 그녀는 교무실로 찾아온 상혁에게 순순히 그것을 인정하는 말을 내뱉었다.
“적어도 나는 이 게임에서 단점을 못찾겠다. 나도 pc게임은 조금 하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대단한 완성도야. 물론 아마추어인 내 의견이니까 그리 참고는 되지 않겠지만.”
“뭐 저희가 필요한게 그 아마추어의 의견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선생님께 부탁한거기도 하고.”
현주는 어린것처럼만 보이는 눈앞의 고등학생이 이런 게임을 만들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쩌면 뭔가 엄청난 사람이 될 존재의 선생님으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렇게 생각하자, 현주는 지금 같은 선생 제자의 관계보다 조금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현주는 몸을 베베 꼬며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뭐 부탁할거 있으세요?
지금이라면 한가하니까 학교 서류 업무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
“흠···. 그게 아니라···. 음···.”
현주는 고민했다. 이 이야기를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그러나 인생에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편이 아니고 지금 그녀가 보기에 이것은 확실한 기회로 보였기에 그녀는 굳은 의지를 담은 표정으로 상혁을 보며 말했다.
“저기, 상혁아?”
“예?”
“너희 출시는 어떻게 할 거니?”
“이번엔 무료로 안풀거니까요. 아마도 오프라인 매장 돌면서 진열해달라고 부탁해야겠죠.”
“흠···. 내가 물어본 건 그 단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전 단계를 이야기하는 거야. 게임을 팔려면 일단 게임을 만들어야 하잖아?”
“그래서 만들었잖아요?”
상혁이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살짝 속으로 열이 받는 기분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 말은 ‘제품 제작’을 어떻게 할 거냐는 이야기야. 어찌됐건 CD를 너희 부실에서 일일이 판매할 만큼 죄다 공씨디에 구워서 팔건 아니잖아?”
“아···.”
2020년대야 인터넷으로 게임을 판매하는 오픈 플랫폼이 넘쳐나는 시대였으니 사실 적당한 플랫폼을 선정해서 데이터를 업로드 하면 그쪽에서 알아서 판매부터 데이터 서버까지 해결해주지만 지금은 1999년이었다.
게임 CD를 팔려면 일단 전문 공장에 의뢰를 해서 게임 패키지를 제작하고 박스부터 매뉴얼까지 모두 생산하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시대.
그리고 그 부분은, 상혁이 의외로 놓치고 있던 맹점이었다.
“아, 진짜네? 그걸 생각을 못했네? 아오 씨!”
막연하게 ‘동인 게임이니까’ 개발비가 딱히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상혁은 자신이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까먹었다는 것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진짜로 그 부분은 생각도 못했네?’
사실 아예 생각못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계획하고 지금의 계획이 많이 틀어졌을뿐.
원래 계획에서 상혁은 ‘조금씩 만들어서 천천히 팔아나간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딱히 그게 유리해서가 아니라, 현재 팀의 규모에 그게 맞다고 생각해서였다.
일단 20카피든 50카피든 돈이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만들고, 그걸 팔아서 더 만드는 식으로 팔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마리의 눈물’의 복제 게임을 이길 수 없다.
애당초 물건이 풀려야 싸움을 하던 말건 할거 아닌가.
그것은 지금까지 패키지 제작 경험이 없었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혁의 실수였다.
상혁이 고민에 빠지자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현주는 상혁에게 재빨리 자신의 제안을 건넸다.
“선생님이 너희한테 투자를 하면 어떨까?”
“투자요?”
의외의 제안에 상혁이 놀라며 현주를 바라보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어차피 너희가 게임을 팔아서 내가 준 음악 외주비를 갚기로 했잖니? 거기 더불어서 내가 좀 더 너희한테 투자를 하고싶은데.”
“선생님 돈 많으세요?”
“좀 있지.”
‘젠장 더러운 부르쥬아 같으니···. 부들부들부들.’
“응? 상혁아? 왜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희야 그러면 좋죠. 그럼 이자 붙여서 갚아드리면 되는거에요?”
어차피 고등학생 신분으로는 신용대출도 받을 수 없기에 담보도 없이 빌려주겠다는 현주의 제안은 상혁으로써는 고마운 것이었다.
“근데 이율은 몇%나 붙여드려야하나요?”
“에엑? 적당히 너희들이 알아서 붙여줘. 제자들 상대로 이자놀이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도 이득은 좀 보셔야죠. 나름대로 이것도 ‘투자’인데.”
생각해보면 1학년때부터 존재조차 없었던 게임 제작부를 만들어서 방과후 활동을 지원해주는가 하면, 부실에 있는 기자재나 간식들도 대부분 현주가 지원해준 것들이었다.
그걸 떠올린 상혁은 새삼스레 현주가 생각보다 자신들에게 엄청나게 쏟아붇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못해도 월 30은 넘게 들어갈텐데?’
현주의 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월급도 그리 많치 않을 것이었기에 그 정도면 꽤나 큰 투자금액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 왜 갑자기 날 빤히 보니?”
상혁은 갑자기 현주를 가만히 바라보다 현주의 손을 덥석잡고는 90도로 허리를 숙여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지금처럼 저희가 게임을 만들기는 어려웠을거에요. 이 은혜는 제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물론 ‘어렵다’고 했지 ‘못만든다’라고는 안하는 상혁이었지만, 현주의 협조가 없었다면 게임 개발이 더 어려웠을 것이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팀에서 유일하게 있는 그래픽 담당자도 어찌보면 현주가 소개시켜준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음악을 담당한 성연이나 시나리오를 담당한 혁찬도 마찬가지였다.
상혁이 갑자기 그렇게 감사를 표하자, 현주는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로 상혁을 밀어내며 얼굴에 손 부채질을 했다.
“어머, 어머, 얘가 왜이런데? 선생님으로써 제자들의 성장에 투자하는건 당연한거란다? 오호호호···.”
“그래도 선생님처럼 해주시는 분은 흔하지 않죠. 게임 만든다고 편견에 사로잡힌 눈으로 보시지도 않고요.”
“에이, 칭찬해도 이자는 받을거야?”
“이자 드려야죠. 선생님께서 기대하시는 것보다 훨씬 많이 드릴 수 있게 노력할게요.”
어찌되었건 이걸로 제작비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러자 현주는 단순히 자금만 지원하는 걸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게임 제작부의 담당 선생님으로, 그리고 게임 제작에는 도움을 줄 수 없지만 자신도 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녀는 상혁 일행이 처리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대신 처리해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럼 너희가 패키지로 만들려고 하는 박스 디자인이랑 매뉴얼, CD 커버랑 CD 케이스 도안을 나한테 줄래? 내가 만드는 업체를 섭외해서 알아봐줄게.”
“그것도요? 저희가 해도 되는데요?”
“아무래도 너희는 고등학생이니까 상대가 무시하거나 바가지 쓸수도 있잖니. 내가 어른으로써 그런 부분은 해결해줄테니까, 너희는 게임을 만드는데 집중하렴.”
상혁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녀가 단순히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투자를 결심할 정도로 괜찮은 게임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상혁의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론 자신들은 아직 ‘고등학생’이고 자신들의 게임을 베낀 회사는 이미 게임을 몇 번 출시한 ‘게임 회사’였지만 상혁은 딱히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영길과 현주처럼, 이렇게 자신들을 믿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럼.”
상혁은 현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저 비열한 복제게임 제작사에 정의의 철퇴를 날리는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