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이게 고등학생이 만든 게임이라고?
진만의 행동은 준표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보란 듯이 사장실에서 게임을 플레이하고는 사무실에 다 들리도록 감탄사를 연발하다 직원 전체를 회의실로 집합시킨 것이었다.
회의실에서 회의를 진행하기 전에, 진만은 ‘마리의 눈물’의 개발자 버전을 회의용 컴퓨터에 인스톨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회사에서 만들고 있는 게임의 최신 버전을 직원을 시켜 회의실 컴퓨터에 설치하게 했다.
게임을 만드는 중소기업답게 ‘엘란테’의 회의실에도 컴퓨터와 연결된 회의용 TV가 한 대 있었고, 두 게임이 모두 설치되자 진만은 두 게임을 동시에 구동시켰다.
그리고는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게임이 뭔지 아는 사람?”
당연히 진만이 가르치는 게임이 뭔지 모르는 직원은 이 회의실 안에는 없었다.
진만은 지금 자신들이 개발 중인 SRPG ‘루나시아 스토리’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나시아 스토리 개발버전이잖아요?”
“그래. 이거, 벌써 3번째 타이틀을 개발 중인 중견 개발사 우리 ‘엘란테 소프트’의 차기작.”
그렇게 말한 진만은 마우스를 옮겨 ‘마리의 눈물’의 화면을 띄웠다.
“그리고 이건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이 개발 중이라는 게임의 개발화면.”
회의실은 삽시간에 웅성거리는 목소리로 가득찼다.
“진짜요?”
“상업용 게임 같은데···.”
“이미 발매된 게임 아냐?”
“개발 중인 버전이라고 하셨잖아···.”
그때, 진만이 책상을 쾅하고 내리치며 말했다.
“도대체!”
순식간에 조용해진 회의실.
그 속에서 진만만이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난 이해가 안간다. 너희 프로잖아? 어째서 고등학생보다 우리가 개발하는 버전이 구려야 돼?”
당연하게도 이런 종류의 비난섞인 질문에 대해 쉽사리 대답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렇기에 준표는 회의실의 침묵을 느끼고는 한숨을 쉬며 손을 들었다.
“개발 기간이 길었으니까요.”
“그게 이유가 돼?”
“되죠. 컴퓨터 사양이 갑자기 올라간 게 최근 몇 년도 안 되었고, 저희는 DOS 버전을 개발하다가 윈도우로 플랫폼을 옮겨야 해서 거기서도 개발기간이 추가로 소요됐었죠. 솔직히 저희가 처음부터 윈도우 버전을 목표로 잡고 개발했으면 지금 저 게임 퀄리티 정도는 나왔을 겁니다.”
그 말에 진만이 반박을 하지 못하자, 준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고등학생들이 저 정도 게임을 개발 중이라는 건 엄청난 일이지만요.”
“그···. 그렇지?”
“저희도 퀄리티 업을 좀 고려해봐야 할지 모르겠네요.”
“퀄리티 업이라···.”
준표의 이야기를 들은 진만은 고개를 천장으로 돌리고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준표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게 답일까?”
“예?”
“내가 매번 해외 게임들을 해보고 나서 준표 씨에게 뭔가 변화시켜보자고 말한 건, 단순하게 우리 게임의 퀄리티가 낮아서 그걸 올리자는 의미는 아니었어. 외국 개발자들이 만든 그런 빅 게임같이 커다란 게임을 만들자는 의미도 아니었고.”
“그런 의미가 아니면 뭔데요?”
“게임의 심장 같은 거지.”
진만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두드렸다.
“맨날 어디선가 해봤던 것 같은 게임. 스토리랑 캐릭터 보는 거 말고는 아무 메리트도 없는 게임. 그런 거 말고 우리 게임만이 가진 뛰어난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는 게임을 우리도 만들어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였어.”
애당초 대기업 임원자리에서 퇴직금까지 털어 게임회사를 차린 만큼, 진만은 게임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열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박봉에도 진만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준표가 유일하게 진만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사장님 마음은 알겠지만 외국의 경우는 게임 개발에 있어서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방법도 많고 경력자도 많으니까 가능한 거고요. 저희는 지금 제일 오래된 경력자가 고작 3년 차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희가 준비가 되기 전에는 일단 기존에 발매된 게임들을 구축하면서 경험을 쌓기로 이야기 되었던 거고요. 말씀하신대로 ‘우주 크래프트’ 같은 걸 개발팀에서 뽑아내려면, 우선 경험을 쌓아야한단 말입니다.”
“쟤네는 하는데?”
“예?”
“저 고등학생들이 무슨 경험이 있겠어. 근데 지금 이렇게 기발하고 재미있는 걸 만들고 있잖아. 우리가 걔네보다 뭐가 부족해서 철지난 게임을 그대로 만들어야하는데?”
아마 상혁이 이 회의에 참가했다면 ‘15년차 경력자 둘이랑 2020년까지 발매된 히트게임들의 플레이 경험 같은 게 부족하지 않을까요?’ 라고 답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모르는 진만은 단순히 이것이 기발한 아이디어만으로 태어난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험? 중요하지. 그렇다고 경험을 꼭 옛날 게임 베끼면서 쌓아야하나? 우리도 뭔가 도전하면서 경험 쌓으면 안 돼는 거야? 남한테 보여줄 때, 우리 게임은 이런 점이 정말 재밌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외칠만한 부분을 만들면서 경험을 쌓으면 안 돼는 거냐고.”
진만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진지했다.
그리고 준표는, 그런 진만을 보며 이번엔 사장의 고집을 꺾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잠깐 나가 있어요. 사장님. 저랑 잠시 둘이서 이야기하시죠.”
물론 준표라고 진만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기엔 이미 지금 게임에 투자한 자금과 기간이 너무 아까운 시점이었다.
나머지 직원들이 나가자, 준표는 솔직하게 자신도 진만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고, 진만은 금새 화색이 되어 물었다.
“그럼 지금 개발 버전 갈아 엎는 거야?”
“그건 아니죠. 이미 너무 많이 갔어요.”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일단 지금 거는 그대로 개발해서 출시하고 다음 작품때 다시 논의해보시죠.”
준표가 생각하기엔 그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진만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벌써 3번째 게임이잖아? 언제까지 공부만 할 건데? 이제 우리도 우리 게임 만들어볼 때 된 거 아냐?”
“사장님은 지금 상황에서 저희가 새 게임 만들겠다고 회의 진행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아이디어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세요?”
준표의 말을 알아들은 진만은 아쉬운 듯 회의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상혁과 민준이 개발한 ‘마리의 눈물’의 화면이 그대로 떠 있었다.
“뭐 저도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대신 최대한 빠르게 이번 게임 발매하고 다음을 노려봅시다.”
그리고 그렇게, 언제나 평소처럼 다시 원래의 개발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안 갈아엎으면 어때?”
“예?”
“준표 씨가 말했잖아. 우린 새 게임을 개발할 개발력이 안 된다고. 그리고 우린 여기 좋은 샘플을 가지고 있지.”
“지금 그 말씀은···.”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SRPG를 변경해서 여기 끼워 맞춰서 만들면 어떠냐는 이야기야.”
바로 부정하려던 준표의 입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리의 눈물’ 역시 기존 게임인 ‘공주 키우기 2’의 RPG 파트를 빼고 그 자리를 타이쿤으로 채운 게임이다.
거기서 타이쿤을 다시 제거하고 sRPG파트를 넣는다는 진만의 발상은, 해석에 따라 베끼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장르 합성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얘네 게임에서 주인공이 죽음에서 돌아와서 다시 삶을 살아간다는 부분이 맘에 들어. 그리고 ‘공주키우기 2’에서 차용한 스케줄 시스템으로 능력치 성장하는 것도 마음에 들고. 그걸 넣은 SRPG를 만드는 거야. 어때?”
“지금 한국 고등학생 동인팀 게임을 베껴서 만들자고 말씀 중이신건 알고 계신 거죠?”
“이게 왜 베끼는 건데? 얘네는 ‘공주 키우기 2’를 개선해서 게임을 만든 거고, 우린 다른 방식으로 만드는 건데?”
“스토리가 비슷할 텐데요?”
“시대를 프랑스 궁전이 아니라 아예 판타지 배경으로 하면 되지. 우리 캐릭터도 기존 그대로 쓰고. 측근 대신 SRPG에서 쓸 수 있는 캐릭터가 추가되는 식으로 만드는 거야.”
“저는 반대입니다.”
실상 자신이 만드는 게임도 사실 일본에서 발매된 게임과 판박이였지만 국내 개발자가 만드는 중인 게임을 베낀다는게 영 찝찝한 준표였다.
그러나 진만은 포기하지 않고 준표에게 계속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아까 준표 씨는 개발자 50명이랑 개발기간 3년만 주면 ‘우주 크래프트’도 만들어준다고 했지? 나라고 그런 조건으로 개발시켜주고 싶지 않은 줄 알아? 매번 게임 낼 때마다 판매량 안 나와서 월급 인상도 못해주는 사장이란 타이틀이 얼마나 지겨운지 아냐고!”
진만은 ‘대의를 위한 희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번 한번만 눈감고 양심을 버렸을 때 자신들이 가지게 될 기회를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그것은, 3년째 별다른 성과 없이 말 그대로 ‘개발’만 해오던 준표에게는 거절하기 너무 힘든 유혹이었다.
결국, 평소와는 반대의 입장에서 2시간 넘게 진만의 이야기를 들은 준표는 진만의 설득을 거절할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
“후···.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자네는 일단 이제부터 이 게임을 플레이해본 적이 없는 거야.”
그렇게 말한 준표는 CD를 꺼내 반으로 꺾었다.
필요한 데이터는 이미 컴퓨터 안에 있으니 별 문제될게 없었고 추후에 깔려있는 컴퓨터의 데이터만 삭제하면 될 일이었다.
이미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고등학생들이 만든 게임을 베낀다는 그런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아마추어들이 만들던 미완성의 게임을 프로인 자신들이 완성시킨다는 자기합리화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
영문도 모른 채 제작 중인 게임을 도용당한 성연은 그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열심히 ‘마리의 눈물’의 BGM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업이 진행된 지 4달여가 지난 시점에서는 거의 팀의 일원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어 매일 같이 부실로 출근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성연 오빠는 그렇게 일하면 회사 안 잘려요?”
걱정된 서연이 그렇게 물어볼 정도였지만 성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으며 서연의 질문에 답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회사는 개인 외주 작업 허용하거든. 출퇴근도 어느 정도 프리하고.”
“와, 부럽다. 출퇴근 프리···.”
“최소시급도 못 받고 일할 거면 우리 회사 추천해줄까?”
“엑? 됐습니다. 그건 싫어요.”
주고받는 농담 속에서 성연은 편안함을 느꼈다.
장소가 주는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고등학생 밴드를 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개발은 잘 돼가?”
“뭐, 문제될 게 있겠어요? 형도 지금 곡 작업 거의 다 마무리 해주셨고, 서연이야 평소처럼 무슨 프린트처럼 일러스트를 뽑아내고 있죠.”
성연이 팀에 외주로 합류한 지도 4달이 지났기 때문에 이미 해를 넘겨 상혁과 민준은 2학년이 돼 있었고 서연은 그 둘을 따라 선문고에 진학하여 선문고 1학년인 여고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교생이 되고 나서는 봉인을 해제한 것처럼 미친 듯이 작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작업 속도가 빨라서 상혁이 기획을 못 따라 잡을 정도였다.
“아 씨, 나는 음악이랑 프로그래밍이랑 그래픽이랑 기획 전부 다 봐야한다고!”
기획은 일을 할당하고 업무를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모든 파트의 작업에 대해 계획 및 검수를 맡는다.
그렇기에 혼자서 모든 부분을 다뤄야 하는 상혁은 극한의 멀티태스킹을 위태위태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가끔 보면 넌 진짜 고등학생 안 같아.”
“저보다는 민준이가 더 늙어 보이지 않아요?”
“아니 외모적인 의미가 아니라 일하는 게 완전 프로 개발자 같다는 의미였어.”
“부실 와서 노가리 까는 성연형의 모습도 충분히 프로 노가리꾼 같아요.”
“야, 난 칭찬한 건데?”
“저도 칭찬한 거예요.”
그렇게 농담을 건네며 이야기하는 와중에, 성연의 허리춤에서 부르르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로 돌아와서 상혁이 제일 적응하기 힘들어하던 삐삐의 울림소리였다.
“삐삐?”
“어. 사무실에서 호출이네?”
“부실에도 전화기 있으니까 쓰세요.”
상혁이 손가락으로 전화기 위치를 가리키자 성연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전화기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웃으며 전화를 걸더니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어 소리를 질렀다.
“예?! 선배! 지금 그게 말이 되요? 아니, 잠깐만요. 지금 사무실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성연은 어느새 사무실 팀원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이 이미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 팀에 커다란 사고가 발생한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미안한데 나 사무실 금방 다녀와야겠다.”
“갖다 안 오셔도 되는데요? 벌써 7시 넘었기도 하고.”
“아니, 와야 할 것 같아. 늦어질 거 같으면 전화할 테니까, 가급적이면 너라도 사무실에 남아있어 줄래?”
상혁은 진지한 성연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성연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쏜살같이 부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나간 성연이 부실로 돌아온 것은, 두 시간이 지나 시계가 9시를 가리킬 때 쯤이었다.
보통 팀원들 전부 부실에서 10시는 넘어야 집에 가기 때문에 부실에는 3명 모두 남아있었다.
그리고 성연은 3명이 모두 남아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자신에게 더 부담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상황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이걸 어찌 말해야할까.
고민하던 성연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최선임을 깨달았다.
“너희 세 사람에게 할 말이 있다.”
“뭐죠? 저도 궁금해서 남아있었는데.”
민준이 이야기하자 성연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너희 게임이랑 똑같은 게임을 만들고 있는 개발사가 있는 것 같아.”
방학까지 모두 바쳐서 ‘마리의 눈물’ 개발에만 전념하고 있던 개발팀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