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마리의 눈물
“진짜로?! 너희들이 ‘공주 키우기 2’같은 게임을 만들었다고?!”
서연의 설명을 들은 현주는 깜짝 놀랐다.
사실 자신도 게임을 좋아하긴 하지만, 게임 제작에 대해선 잘 모르기 때문에 동아리 활동에는 거의 관여를 안 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현주는 게임 제작 동아리의 담당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자들이 무슨 게임을 만드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지 예전에 혁찬의 동아리에 있을 때는 자주 자신을 찾아와 울상을 지으며 불평하던 서연이 동아리를 옮긴 이후에는 행복하게 게임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던 상혁과 민준의 게임은 ‘익스트림 발리볼’같은 게임이기도 했기에, 그녀의 생각으로는 정말로 제자들이 ‘그럴싸한 규모의’ 게임을 만들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공주 키우기 2’보다는 좀 더 복잡한 게임인데, 퀄리티는 확실히 좋을 거예요. 아무래도 서연이가 그래픽을 맡았으니까요.”
서연의 실력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현주는 나름 세 사람이 내민 게임에 대해서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완성 버전이 아니라는 건 좀 아쉬웠지만···.
“그래서, 이걸 내가 플레이만 해주면 되는 거야?”
“네. 소감이 듣고 싶어서요.”
“근데 왜 나야? 전엔 친구들한테 부탁했었잖아?”
“뭐 보안 문제도 있고, 저희 제작부 담당이시니까 저희가 무슨 게임을 만들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나야 뭐, 게임 좋아하니까 거절할 이유는 없지. 그런데 하나 말해둘 게 있어. 너희들이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게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난 ‘공주 키우기 2’의 광팬이라구. 내 안에서 그거보다 재미있는 게임은 없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공주 키우기 2'보다 재밌다 같은 반응을 원했다면 그건 내가 해줄 수 없는 부분일 거야.”
때때로 한 게임을 정말 오래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있었고 현주 역시 그런 타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서연은 자신 있다는 듯 가슴을 피며 이야기했다.
“그건 해보시고 판단할 문제고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야 저희한테 도움이 된대요.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말씀해주셔도 되니까요!”
“좋아 그럼 안 그래도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오늘 퇴근하고 주말동안 플레이한 다음 월요일에 이야기해줄게.”
세 사람은 그런 그녀의 말에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교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현주는 그런 상혁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그들이 건네준 CD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게 내 제자들이 만든 게임이라 이거지···.”
사실 그녀는 상혁이나 민준의 담임도 아니었고 부활동 담당으로써 무언가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그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사촌 동생인 서연을 상혁과 연결해준 건 자신이었기에.
그리고 제자들이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느낌은, 스승의 입장에서는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그녀는 핸드백 속에 CD를 넣으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날 그녀가 하게 될 게임이 그녀의 예상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게임이란 사실은 꿈에도 모른채···.
***
-위이잉~턱-.
둔탁한 소리와 함께 CD가 컴퓨터로 들어가고 그녀는 그녀의 컴퓨터가 CD를 읽는 소음을 듣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사용하는 윈도우 85의 화면에 회색과 파란색이 섞인 설치 화면이 떠올랐다.
“오, 제법 그럴싸한데?”
설치 마법사 화면에 근사한 이미지와 함께 글자들이 떠오르자 그녀는 꽤나 괜찮은 느낌이라 생각하며 다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후 게이지가 가득 차며 설치가 완료되었다.
“어디보자···. 이건가?”
바탕화면에 ‘Marie's Tears’라는 아이콘이 보였다.
사실 그것은 게임 타이틀을 악역영애 메이커로 하기엔 너무 노골적인 느낌이라 알파판 완성 직전에 바꾼 제목이었다.
“오, 뭐야? 스토리가 있네?”
처음엔 ‘제자들이 만든 게임을 플레이해보자’ 라는 단순한 느낌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생각이었던 현주는, 이윽고 이어지는 장면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뭐야? 얘가 주인공 아니었어? 주인공이 교수형 당하는 걸로 시작이야?!’
임팩트 있는 출발. 그리고 주인공의 사망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악행을 일삼던 여주인공이 죽음을 통해 과거로 회귀하는 과정을 짧지만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깨어난 어린 소녀.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사악하고 나쁜 짓을 해왔는지도.
현주는 어느새 ‘마리의 눈물’의 스토리에 빠져들었다.
어릴 적부터 귀족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안하무인으로 자라온 주인공. 그리고 그런 그녀를 무서워하는 시종들.
대놓고 ‘나 악당이요’라고 얼굴에 써 붙인 것처럼 생긴 측근들과 망해가는 영지의 모습이 현주로 하여금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우선 영지부터 살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영지의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복지를 베푸는데 집중했고 곧이어 첫 번째 배드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다.
“뭐야?! 뭔데?!”
사교계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려주던 시녀의 경고를 무시한 것이 실수였다.
그렇게 그녀는 같은 파벌의 귀족이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우씨, 해보자는 건데?”
게임 오버 화면에서 그녀는 [트로피: 살해당한 영애를 획득했습니다]라는 창이 뜨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재 시작하자 새 게임에 적용할 트로피를 고르는 창을 볼 수 있었다.
[트로피: 살해당한 영애]
[장착효과: 암살 계열의 이벤트 발생 확률 15%감소]
“배드엔딩을 보는 것도 다음 판에서 이득이 되는 구조구나! 잘 만들었네?!”
감탄한 현주는 바로 다음 게임을 시작했고 이윽고 다시 게임에 빠져들 수 있었다.
“아아악!! 마리아아아아!!!”
자신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던 충직한 시종 마리아가 독을 대신 먹고 죽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흐흠! 그렇지!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열심히 키워놓은 의술 관련 능력치로 나라 전체에 퍼질 역병을 막아내기도 하면서.
“다음엔 뭘 해볼까?”
그녀는 어느새 ‘마리의 눈물’에 푹 빠진 채로 주말을 통으로 날리고 있었다.
***
“선생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월요일. 현주에게 게임에 대한 감상을 듣기 위해 교무실에 온 상혁이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응? 이거? 아! 어제 잠을 좀 못 자서 피곤해서 그래!”
“게임은 어떠셨어요?”
“음···. 감상을 말하기 전에···. 혹시···. 이거 테스트 끝나면 게임 돌려줘야 하니?”
그녀는 대답 전에 그녀가 걱정하는 부분을 먼저 말했다. 자신은 아직 이 게임을 더 플레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흠···. 원래는 그래야 하지만 선생님이 하고 싶으시다면 테스트 버전은 선생님 드릴게요. 대신 누구한테도 유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요.”
“응 좋아. 절대 다른 사람한테 빌려 주지 않을게.”
“그럼 이제 평가를 말씀해주시겠어요?”
상혁이 묻자 그녀는 흥분한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엄청나! 난 너희들이 이정도 게임을 만들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그럼 뭘 만든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난 기껏해야 전에 만든 ‘피○츄 배구’ 짭퉁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지···.”
“‘익스트림 발리볼’은 ‘피○츄 배구’ 짭퉁이 아닌데요···.”
짭이라고 보기엔 훨씬 진화한 게임임에도 그녀가 그런 평가를 내리자 살짝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는 상혁이었다.
“아,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미안. 그래도 너희들은 학생이고 어디까지나 부 활동이니까 그런 수준에 맞는 퀄리티의 게임을 생각하고 있었지. 설마 웬만한 게임회사에서 만든 게임보다 퀄리티가 좋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
“퀄리티는 뭐, 어차피 원화 중심 게임은 원화가 실력이 게임 그래픽을 결정하니까요.”
“내가 말하는 건 단순하게 원화 퀄리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게임의 짜임새라던가···. 음, 그럴싸함? 내가 잘 몰라서 뭐라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는요?”
상혁이 원했던 피드백은, 이 게임의 ‘퀄리티’가 어느 수준이냐 가 아니었다.
순수하게 일반인 시점에서 어느 정도의 재미를 보장하는가가 상혁이 궁금한 부분이었기에 상혁은 현주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러자 현주는 고개를 숙이고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음···. 으음···.”
재미?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인생게임이라고 생각했던 ‘'공주 키우기 2'’보다 이 게임이 훨씬 재미있었다.
심지어 완성된 버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녀는 솔직히 그렇게 이야기하기엔 그 전에 세 사람에게 부린 허세가 있어서 조금 부끄러운 느낌이 있었다.
결국 고민하던 그녀는 ‘'공주 키우기 2'’와 ‘마리의 눈물’은 서로 다른 재미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너희가 만든 건 ‘공주 키우기 2’만큼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해. 공주 키우기 2와는 다른 재미가 있다 정로도 말 해둘게.”
“그럼 게임 유저로써 만약 이런 게임이 있다면 돈 주고 구매하시겠어요?”
이번 질문에는 그녀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솔직히 이 게임이 완성버전이었다면 그녀는 당장에라도 지갑을 열었을 테니까.
“당연하지! 솔직히 완성되면 바로 사서 해보고 싶어. 지금의 버전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완성되면 더 엄청날 거 같아서 기다리기 힘들 정도야.”
“배우기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알기 어려운 점이라던가, 혹은 초보자는 시작할 때 대부분 게임오버를 보게 될 텐데, 그런 부분에 대한 반감 같은 거는?”
“글쎄? 난 오히려 그 부분이 좋았던 거 같아. 암살당해서 죽었을 때만 해도 기분이 나빴지만, 그걸로 다음번에는 암살을 막을 수 있는 트로피를 줬잖아? 그런 선물 같은 게 있어서 게임 오버도 괴롭지는 않더라구. 나중엔 있을법한 게임오버를 일부러 찾게 되더라니까?”
현주의 이야기를 들은 서연은 상혁을 보면서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부분은, 자신이 이전에 테스트 때 지적해서 상혁이 보완해서 넣은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게임에 단점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현주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적어도 세 사람이 플레이할 때는, 문제라고 할만한 부분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 음악에 대해서는 개선할 생각이 없니?”
현주의 제안은 딱히 선생으로서 무언가 지도를 해야겠다는 감정보다는, 단순하게 게이머로써, 자신이 플레이할 게임이 이랬으면 더 좋겠다는 의견제시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지적한 부분은 세 사람이 의외로 생각하지 않고 있던 부분이었다.
“음악이 별로에요?”
현재 ‘마리의 눈물’의 음악은 라이선스가 공개된 BGM중에서 작품 분위기에 어울리는 무료 BGM을 사용하고 있었고 상혁은 그 음악들이 나름대로 상황에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주는 이 좋은 게임에 그정도 음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공주 키우기 2’는 음악만 들어도 바로 게임 화면이 떠오르는 멋진 음악을 가지고 있잖아. 물론 지금 음악도 안 어울리는 건 아니지만···.”
“흠···. 그럼 굳이 바꿀 필요는 없는 게···. 저희가 음악 전문가를 아는 것도 아니고요···.”
“그건 안 돼!”
갑자기 현주가 소리를 높이자, 상혁은 놀라서 뒤로 반 발짝 물러나고 말았다.
“내가 볼 때 너희 게임은 정말 멋지단 말이야! 그림도 이야기도 게임도 정말 멋지니까! 음악도 멋지게 만들면 좋잖아!”
거의 땡깡에 가까운 그녀의 고집에 상혁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옆에서 서연이 끼어들어 현주를 말렸다.
“언니, 아니 현주 선생님. 지금 저희는 음악까지 신경 쓸 정도로 개발여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음악은 외주로 쓰려고 하면 돈이 든다고 했고요.”
“그럼 그 돈은 내가 낼게!”
“예?!”
갑작스런 현주의 선언에 당황한 세사람이 동시에 외쳤지만, 현주는 무조건 그래야한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돈이 필요해서 그러는 거면 내가 낼게. 어차피 이거 돈 받고 팔 거잖아? 그럼 팔아서 갚으면 되지! 일종의 투자 같은 거니까, 이자도 쳐주면 더 좋고···.”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저희가 음악 하는 분을 소개받을 방법도 없는데···.”
“그걸 왜 걱정해? 너희 혹시 내가 누군지 잊었어?”
현주가 말하자 세 사람은 자신들이 현주에 대해 알고 있는 이미지를 털어놓았다.
“이상한 선생님.”
“게임 좋아하는 사촌 언니”
“학교 재단 이사장 손녀님”
“아니라고!!!”
그렇게 소리 지른 그녀는 세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고는 자신이 어떤 선생님인지에 대해서 말했다.
“나, 음악 선생이거든?”
“음악 선생님이셨어요?!”
“너희들 정말로 나한텐 관심이 하나도 없구나?”
“죄송합니다···.”
“뭐 그건 됐어, 어쨌든 중요한 건, 내 인맥을 동원하면 어떻게든 그 문제도 해결될 거라는 거야.”
“그 말은···.”
“기껏 좋은 게임을 만들었으니, 음악도 좋은 걸 쓰자는 거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인맥부터 돈까지 모두 해결해주겠다는데.
상혁은 그대로 현주의 손을 붙잡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그 부분은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그리고 그런 상혁의 뒷모습을 보면서, 민준은 자신의 친구가 회귀 이후로 점점 뻔뻔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