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후폭풍
사실 늘어선 줄은 일종의 우연의 산물이었다.
예상외의 판매량에 진열해놓은 분량이 매진되는 바람에 직원이 급하게 여유분을 가져오는 동안, 잡지를 구매하려는 인원이 줄 서서 늘어서 있던 것 뿐.
말하자면 타이밍 좋게 인상 깊은 장면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구매자는 동네 서점에서 구매하려다가 잡지 재고가 없어 교보문고까지 찾아온 인원들이었고, 그 구매자들이 이번호 잡지를 사러 온 이유는 대부분 이번 호에 첨부된 번들 CD 때문이었다.
물론 최고 인기게임의 자리는 여전히 '우주크래프트' 오리지널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애당초 우주 크래프트라는 게임 자체가 헤비한 면이 있다 보니 캐쥬얼 대전 게임으로써의 시장을 '익스트림 발리볼'이 적절하게 찔러 들어간 것이다.
사람들은 '익스트림 발리볼'의 신 캐릭터를 제공한다는 말에 잡지를 사러 왔다가, 표지에 그려져 있는 ‘기공 무림전’의 아름다운 일러스트에 시선을 빼앗기고는 제자리에서 잡지를 이리저리 넘겨보고 있었다.
“선배님. 굉장한 광경이네요.”
“그러게.”
상혁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조금 아쉬운 마음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단순하게 무료 게임의 패치를 받기 위해 잡지를 사러온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개발한 게임을 정가를 주고 사려고 줄 선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상혁은 언젠가 자신이 만든 게임으로 독립적인 컨벤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브리즈컨처럼.
한 ‘개발사’의 팬들이 모두 모여 축제를 즐기는 가운데, 수많은 팬들 앞에서 차기작을 발표하고 팬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개발자로서 참으로 보람 있는 모습일 것이다.
상혁은 언젠가 반드시 그런 행사를 열 수 있는 개발자가 되리라고 마음먹으면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넋을 놓고 대기줄을 바라보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갖고 싶다···.’
상혁은 서연이 마음에 들었다.
남녀 사이의 그런 감정이 아니라 순수하게 재능 있는 원화가를 보는 개발자의 감각으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몰라도 1998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서 타블렛을 가지고 컴퓨터 그래픽을 전문으로 그리는 중학생은 정말 찾기 힘들다고 볼 수 있었다.
애당초 컴퓨터도 고가인데다, 입시 미술이면 모를까 컴퓨터 그래픽 전문학원도 찾기 힘든 상황이니까.
그런데 순수하게 독학으로 지금 수준까지 올라온 원화가를, 자신이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라 혁찬이 먼저 발견한 것이 상혁은 참으로 안타까운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혁찬의 팀을 그만두고 자신의 팀으로 오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상혁은 혁찬도 팀의 일원으로 데려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저 그냥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게임만 좋아하는 널리고 널린 동인 개발 지망생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혁찬은 컨셉 기획과 시나리오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민준의 말에 따르면 혁찬팀의 프로그래머인 민솔 역시 프로그래머의 재능이 있는 아이라고 했다.
회귀한 자신과 민준이 만든 팀이 치트급의 경험치를 가진 고교생 개발팀이라면, 혁찬의 팀은 재능으로 똘똘 뭉친 열정 있는 개발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재능과 자신들의 경험이 합쳐진다면, 무언가 게임 역사에 의미 있는 한 획을 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상혁의 머릿속에 자꾸만 맴돌고 있었다.
“선배, 혹시 무슨 고민 있어요?”
이런 저런 생각에 상혁이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자, 서연이 상혁에게 물었다.
“응?”
“뭔가 고민하는 표정이시라서요.”
“어, 음, 흠···.”
마침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가이드로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고,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로서의 감동을 서연이 느끼고 있을 지금 타이밍에 제안을 던지는 것은 상혁이 보기엔 괜찮은 기회로 보였다.
“서연아···. 혹시···.”
상혁이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자, 눈치 빠른 서연은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상혁이, 자신을 상혁의 팀에 스카웃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물론 그녀가 혁찬의 팀에 불만이 매우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2년 동안 매일 말로만 무언가 하자 하자 해놓고 아무것도 진행되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혁찬은 마치 마른 벼가 물을 빨아들이듯 상혁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자신은 원하던 게임 개발을 드디어 할 수 있었다.
전부 눈앞의 선배가 도와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과 동시에, 그녀는 상혁과 함께 게임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에 대한 호기심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도우미 역할만으로도 이정도의 성과를 이루게 만들어준 두사람과 함께 게임을 만들면, 왠지 지금의 자신을 더욱 높은 세계로 데려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먼저 제안을 할 수는 없었다.
혁찬과 민솔을 남겨두고 자신만 고등학생팀에 합류하는 건, 그녀에게는 배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 문에서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까지 작업을 하면서 열심히 자신을 상혁과 민준에게 어필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이만큼 열정이 있다고.
그리고 이만큼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그런 어필을 통해서, 상혁과 민준. 두 사람이 자신에게 먼저 합류를 제안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필했고, 자신의 의도대로 상혁은 때때로 무언가 굉장히 부럽다는 표정으로 혁찬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강하게 그녀의 뇌리를 감싸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흠···. 아니다, 아무것도 아냐.”
상혁은 결국 지금 합류를 제안하지는 않았다.
이 녀석들에게는 그 녀석들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게 있을 테니까.
적당히 게임을 만들게 하고 내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그때 혹시 자신의 팀에 들어올 생각이 있는지 물어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고교생인 자신과 민준과 마찬가지로, 중학생인 그들에게도 충분히 시간이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대한민국 게임 시장은, 이제 겨우 대격변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다.
이제 곧 '우주크래프트'의 확장팩인 블러드워가 발매될 것이고 pc방의 폭발적인 확장과 함께 전국에 고속 인터넷이 깔리게 된다.
시장의 잉여 자금이 게임시장에 몰리면서 수많은 온라인 게임이 난무하고 소위 말하는 ‘온라인 1세대’개발자들이 쏟아질 시기가 멀지 않았다.
상혁은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고민에 잠겼다.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을 지키면서, 게이머들에게 어떤 게임을 선보일 것인가에 대해서.
‘일단 '익스트림 발리볼'로 인지도도 쌓았으니 원화가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그것이 상혁의 현재 생각이었다.
***
한편 그 시각, PC 동호인의 편집장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담당 기자인 영길의 강력한 주장으로 평소보다 많은 양을 유통사에 넘겼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추가 요청이 온 것이다.
덕분에 이번호 판매량은 역대 최대 판매량을 기록할 듯 싶었다.
처음 영길이 잡지 전용으로 추가 캐릭터를 추가하겠다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했을 때만 하더라도 반신반의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신의 한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뻐하는 편집장이 건너편에는, 이번 호의 판매량을 견인한 당사자인 영길이 마찬가지로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승리의 여운을 맛보고 있었다.
‘PC PEOPLE 박기자가 매우 빡쳐하겠군···. 흐흐흐···.’
지난달에 용건도 없으면서 전화를 걸어서 다음호 번들로 엄청난 게임을 섭외했다며 자신을 약 올리던 박기자의 목소리가 떠오른 영길은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아무리 좋은 게임이라도, 잡지 번들의 한계 상 발매된 지 몇 년 지나 매출이 제로가 된 게임이 아니면, 개발사는 번들로 게임을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최신 게임의 패치를 잡지 번들로 제공하겠다는 상혁의 제안은 영길에게는 참으로 기발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런 모델이 지속적으로 사용가능하다면 참 좋겠지만···.’
영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은 단지 운이 정말 좋았을 뿐임을.
이미 무료로 뿌려져서 유저가 산더미처럼 있는 게임의 개발팀에서, 패치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것은 사실 두 번 기대하기는 힘든 문제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편집장 역시 영길을 바라보며 조금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호에도 이런 걸 가져 오라는건, 인간적으로 무리겠지?”
영길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으쓱하는 자세를 취했다.
“말했잖아요. 이번은 운이 좋았다고요. 번들게임을 제공해줄 국내 제작사 찾는 것도 어려운데, 이번처럼 해줄 개발사 찾는 건 말도 안되게 어렵겠죠.”
“후···. 어쨌든 이번 일은 정말 잘 했어.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었군.”
“그럼 보너스라도 좀 주시죠. 이번 일 도와준 아이들에게 고기라도 좀 사주게요.”
“그런 이유라면 법인카드 줄 테니까 그걸로 맛있는 거라도 사드려.”
“사 ‘드리는’건가요?”
“갖다 바치라고 하려다 말을 고친거야. 이 짓 3번만 더 가능하면 사무실도 옮길 수 있겠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편집자 한명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뭐야?”
“영길 선배님 찾는데요?”
“왜?”
“퍼블리셔래요. 이번에 체험판 공개된 게임 관련해서 문의할게 있다고요.”
영길은 한숨을 쉬었다.
잡지 발매 이후 관련 문의가 꽤 왔었는데, 대부분은 해당 체험판을 제작중인 개발팀의 연락처를 줄 수 없냐는 문의였다.
애당초 기사에 아직 중학생인 혁찬 일행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개발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하지만 현재 중학생인 개발자들을 퍼블리셔와 연결해주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와 더불어서, 정작 당사자인 혁찬이 퍼블리싱 컨택을 거부한 것도 있기에 연락처를 건네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 나이대 아이들은 이런류의 이벤트에 흥분할법도 한데, 혁찬이 거절하며 말한 내용은 아직도 영길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저희도 선배님들처럼 첫 번째 게임은 그냥 무료로 발매하고 싶어요.’
그것이 존경하는 선배에 대한 동경인지, 아니면 개발 중인 게임을 좀 더 많은 유저가 플레이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인지는 영길은 잘 알지 못했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만난 학생들이 정말로 게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앞으로 대한민국 게임 시장의 한 축을 책임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게임 기자로서 절로 미소가 나오는 영길이었다.
“그 ‘기공 무림전’은 확실하게 무료로 배포할 거라고 했지?”
“예. PC통신과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하고 저희 쪽에서는 홍보 기사를 실어주기로 했습니다.”
“공략은?”
“뭐 출시일이 아직 미확정이라 정해진 건 아닌데 일단 출시되자마자 제가 직접 플레이해서 기초 공략 출시하고 발매 3달 후에 그쪽에서 기획 데이터를 넘겨준다고 했으니까 그때 완벽 공략을 개제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무료 배포 할 거면 우리 잡지에서 번들로 배포하면 안 되나?”
“흠···.”
“원래 번들 예산으로 잡았던 거에서 좀 더 올려도 되니까 한번 이야기는 해봐. 그쪽에서도 배포가 목적이면 그편이 돈도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한테 뿌릴 수도 있을 테니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스트림 발리볼'의 추가 캐릭터 때문에 이번호를 구매한 독자들이었지만, 의외로 ‘기공 무림전’의 평가가 심상치 않았다.
일러 때문에 한번 깔아봤는데 의외로 괜찮다는 이야기. 정식 발매되면 사고 싶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커뮤니티에서 돌고 있었다.
이후 혁찬의 게임이 나오게 된다면, 관련 공략이나 기사만으로도 쏠쏠한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쯤 되니, 영길의 관심사는 오직 한가지로 쏠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패치 번들이라는 특이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범상치 않은 고등학생들.
그것은 상혁과 민준이 지금처럼 다른 사람의 게임 제작을 돕는 게 아니라, 정식으로 원화가를 영입하여 게임을 만든다면, 대체 어떤 게임을 만들게 될까 하는 궁금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