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기공 무림전
상혁이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지금 혁찬네 팀이 만들고 있는 게임의 체험판을 번들로 함께 제공할 것.
그리고 그 게임에 대한 소개를 기사로 별도로 실어줄 것.
제안을 들은 영길은 혹시 그 체험판을 플레이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자, 상혁은 개발 버전이 깔려있는 PC 앞으로 데리고 갔다.
영길은 그렇게 ‘기공 무림전’의 테스트 버전을 플레이한 첫 번째 외부인이 되었다.
“무협인가? 원화 수준이 좋네요?”
가장 먼저 영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윈도 기반에 640x480의 깔끔한 해상도의 그래픽이었다.
당연하게도 4K를 넘어 8K시대로 진입하던 시기에 게임 개발을 하던 민준이나 상혁의 눈에 차는 그래픽은 아니었지만, 97년의 평균적인 컴퓨터 사양을 고려하면 꽤나 괜찮은 그래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인디 게임들은 480×320 해상도도 흔했기 때문이었다.
간단하게 비교하자면, 당시 그래픽으로 꽤 괜찮다고 평가받던 우주크래프트 오리지널이 640x480 해상도였다.
국내 게임 기업 중 원탑이라 할 수 있는 발노리의 1997년작 뭐가튼 사가의 해상도가 320×240인 것을 감안하면 ‘기공 무림전’은 이미 그래픽적인 측면에서는 국내 상업게임을 넘어선 게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그럴싸하다?’
사실, 영길은 게임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애당초 인터뷰를 하러 온 목적인 '익스트림 발리볼'은 시스템이 매우 깊이 있는 게임이지만 그래픽 자체는 로우퀄리티라고 할 수 있는 게임이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나게 잘 만든 인디게임.
그것이 '익스트림 발리볼'에 대한 영길의 생각이었고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차기작도 그런 류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혁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혁이 이 게임을 만든 당사자도 아니고 중학생 팀이 게임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 게임은 ‘중학생들이 만든 동인 게임’ 인 것이다.
영길은 정확히 그런 수준의 게임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본 ‘기공 무림전’의 내용은, 오히려 기대가 낮았기에 영길의 예상을 아득하게 벗어나고 있었다.
초반엔 그래픽에 대한 감상을 하거나 캐릭터 디자인에 대한 평을 하던 영길은 스토리가 진행되자 점점 말수가 적어지기 시작했고, 체험판의 중반부를 넘어서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우스만 클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영길을 혁찬은 애가 타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슥슥.
어느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상혁을 보며, 혁찬은 야릇한 감각을 느꼈다.
‘상혁 선배···.’
상혁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유는 혁찬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재미를 믿으라는 것.
상혁은 마치 당연하게도 그것이 정답인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혁찬이 나아가야할 길을 하나하나 짚어주었고 그 결과물이 지금의 ‘기공 무림전’이었다.
그리고 그 작업을 하는 내내 상혁은 혁찬이 쓴 시나리오를 보며 계속 한 가지를 강조하곤 했었다.
‘컨셉으로 끌어들이고 스토리로 사로잡아라.’
그것이 상혁이 혁찬에게 주문한 요구사항이었고 혁찬은 상혁의 요구사항을 120% 만족하는 스토리를 만들어내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교감하는 사이, 영길은 어느새 체험판의 개발 진행 중인 파트로 진입했다.
갑자기 바뀌는 그래픽.
캐릭터 스탠딩 이미지가 컬러 도형으로 변화되고 일러스트가 콘티 이미지로 변경되었다.
완성도 높은 게임에서 갑자기 알파버전 이하의 엉망진창인 게임이 되었지만 영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스토리에 완전히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영길은 체험판 종료를 알리는 창을 클릭하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혁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걸 진짜 중학생들이 만들었다고요?”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신과 민준이 가이드를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발 프로세스에 관한 부분이다.
자신들은 단순하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혁찬은 자신의 재능을 개화하여 멋진 시나리오를 써 왔고 희진은 그것을 매력적인 일러스트로 승화시켰다.
그렇게 회귀한 상혁과 민준의 개발력과 혁찬 일행의 재능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게임.
그것이 ‘기공 무림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플레이한 영길은, 자신이 혹시 대한민국 게임시장의 역사를 바꿀 개발자를 눈앞에 두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우주 명작’ ‘전설의 갓겜’ 수준의 게임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은 게임이다.
어쩌면 기댓값이 너무 낮았기에 더 대단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영길은 자꾸만 부풀어 오르려는 자신의 기대감을 냉정함으로 억누르며, 상혁에게 말했다.
“이정도 체험판이면 '익스트림 발리볼' 캐릭터를 제공해주지 않는다고 하셔도 저희 쪽에서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네요. 일본 동인 게임판에서도 이정도 퀄리티는 못 봤습니다.”
“뭐 그렇게 말씀하시면 캐릭터 제공은 없었던 걸로···.”
“어허이! 그냥 해본 말입니다! 칭찬으로 한 말인데 삐딱하게 받으시네요?”
상혁이 웃으며 말하자 영길도 웃으며 되려 붙잡았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머지 계약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럼 공략 정보는 어떤 식으로 제공해주실 건가요?”
“이게 '익스트림 발리볼'의 전체 스킬 커맨드 표입니다.”
상혁은 미리 프린트된 기획서 일부를 정리해서 넘겼다.
“그리고 이건 신 캐릭터 파일이고요.”
“설치는 어떻게 하죠? 폴더에 붙여 넣으면 되나요?”
그 부분에 대한 대답은 민준이 맡았다.
“'익스트림 발리볼'은 구동 시 파일 체크 기능이 있기 때문에 파일을 게임이 설치된 폴더에 붙여 넣고 게임을 구동하면 자동으로 버전업됩니다. 아니면 구동 중에 디스크 로드 기능을 썼을 때 세이브 디스켓이 아니라 패치 디스켓이면 자동으로 버전업을 하는 기능도 있고요.”
“아, 미리 버전업을 상정해서 만들어 두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할수록, 영길은 자신의 앞에 앉은 소년들이 고등학생이 아니라 노련한 개발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국내의 여러 개발팀과 인터뷰를 진행한 그가 볼 때 오히려 당시의 현업 기획자들보다 이 고등학생들이 더 전문성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영길은 인터뷰를 마쳤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번 건은 저희 제안을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번들 제공에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상혁이 먼저 감사인사를 하자 영길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는 오히려 제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잡지만을 위해서 캐릭터도 제공해주신다고 하고, 또 번들로 제공할 체험판도 주신다고 하시니···.”
“대신 홍보 기사만 확실하게 써 주시면 됩니다.”
“다음 호에 바로 '익스트림 발리볼' 완벽 공략 특별호에 ‘기공 무림전’ 소개 페이지도 확실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럼 윈윈이네요.”
그렇게 인사를 마친 영길은 동아리 부실을 나와 회사로 돌아가는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자료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뭘 겪은 거지? 귀신한테 홀렸나?”
마법같은 시간이었다.
고등학생들이라고 하길래 가볍게 만날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번들용 자료부터 기사거리까지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넋이 나간 영길을 태운 채로, 택시는 ‘PC 동호인’ 출판사를 향해 힘차게 바퀴를 굴렸다.
***
1998년으로 회귀하고 나서, 민준과 상혁이 개발자로써 가장 갑갑한 부분 중의 하나는, 게임에 대한 피드백을 받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상업용 게임의 경우 판매량으로 대략적인 인기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고, 혹은 패치 다운로드 수를 통해서 불법복제를 포함한 총 유저수를 추산한다던가 하는 방법이 가능하다.
인터넷과 PC방이 보급된 이후에는 PC방 점유율이라는 지표가 게임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고,
온라인 게임이 대세가 된 이후에는 동시접속자수가 국민게임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으며, 모바일 시장으로 게임시장의 트렌드가 옮겨간 후에는 앱스토어 마켓 순위가 게임의 인기를 개발자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98년도에는 딱히 그런 플랫폼이 나오기 전이기에 인디 개발자는 자신의 게임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 알기가 매우 힘들었다.
아마도 피○츄 배구의 개발자인 일본인은, 바다 건너 이웃 나라에서 자신의 게임이 초중고생 사이에서 얼마나 센세이셔널 한 인기를 끌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98년은 개발자와 유저간의 소통이 어려운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회귀한 민준과 상혁도 마찬가지 조건이었기에 두 사람은 빅히트 게임의 개발자 치고는 자신들의 게임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들이 다니는 선문고등학교의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익스트림 발리볼'의 세이브 디스켓을 들고 다니기는 했다.
그리고 얼마 전 게임잡지사에서 기자가 찾아와 '익스트림 발리볼'에 대한 기사를 싣고 싶다며 찾아오기도 했고.
그러나 상혁과 민준은 그것이 단순하게 지엽적인 성공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하는 사람들만 하는 정도의 게임. 그리고 그런 게임을 우연히 기자가 발견해서 인터뷰를 온 것이다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상혁은 이번 게임잡지 번들 이슈가 '익스트림 발리볼'의 대략적인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민준에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광화문에 가자고 제안했다.
“교보문고에 가자고?”
“거기서 잡지가 얼마나 팔리는지 보면 대충 우리 게임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흠···. 가능은 하겠지. 사실 인터넷이 가능한 환경이었으면 동시 이용자를 체크하는 기능을 넣었을 텐데 기본적으로 '익스트림 발리볼'은 로컬 플레이를 기준으로 개발했으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인기 있는지 한번 보자는 거야.”
“뭐, 인기 있다고 하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그게 딱히 도움이 되나?”
마침 코딩할 것도 있었던 민준은 귀찮은 마음에 상혁의 말을 넌지시 돌려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상혁은 이미 확인할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일단 혁찬이팀에서 만드는 게임의 체험판이 풀리는 거기도 하니까 겸사겸사 확인하자는 거지.
애당초 '익스트림 발리볼'의 개발 목적은 인지도를 쌓는거 였잖아. 그럼 얼마나 쌓였는지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
“그럼 혼자 다녀와.”
민준은 깔끔하게 거절하고는 읽고 있던 프로그래밍 서적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상혁이 민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이보!! 우린 언제나 함께라고!! 아이보!!!”
“으악! 뭐하는거야!?”
“같이 간다고 할 때까지 안놓을거야 아이보오오오!!”
상혁은 ‘몬스터 헌트 월드’라는 초 인기게임에 나오는 파트너 캐릭터 접수원의 흉내를 내며 민준을 조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나온 그 게임의 접수원은 주인공을 파트너라는 의미의 ‘아이보’라고 부르곤 했는데, 묘하게 짜증나는 구석이 있어 게이머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캐릭터였다.
“으아아 그만해 PTSD 돋는다고!”
“그럼 간다고 해!”
“아, 귀찮다고!”
그때, 부실문이 열리며 서연이 들어왔고, 상혁은 민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상태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선배님들 뭐하세요?”
“흠 흠!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은 학교 일찍 끝났네?”
“오늘 저희 반은 5교시 수업이에요. 근데, 무슨 이야기 중이셨어요?”
“아, 이 치사한 녀석이 교보문고 같이 가자는데 안 간다잖아.”
“거긴 왜요?”
“오늘 PC동호인 발매일이니까, 얼마나 팔리나 보러 가려고 했지.”
상혁의 말에 서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선배님 저랑 같이 가요!”
“어? 너랑?”
“영길 기자님이 제 일러스트가 표지에 실릴 거라고 하셨거든요! 저도 보고 싶어요!”
서연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민준은 상혁의 손을 탁 하고 쳐냈다.
그리고는 냉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책을 보며 말했다.
“그럼 둘이서 데이트 잘 다녀오도록.”
“이 새끼가 누굴 범죄자로 만들려고···.”
“가요 선배님!”
상혁이 반박하기도 전에, 서연이 다가와 상혁의 팔짱을 끼고 부실 밖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민준은 그런 상혁을 향해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올 때 메로나.”
“꺼져 자식아! 같이 가주지도 않는 배신자 녀석!”
선문고에서 광화문까지는 거리가 꽤 있는 편이었지만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기에 상혁은 오래 지나지 않아 광화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상혁은 교보문고엔 처음 오는 거라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서연을 데리고 게임 잡지가 있는 코너로 바로 이동했다.
그리고 도착한 게임 잡지 코너에서, 서연과 상혁은 입을 떡 벌리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줄은 뭐지?”
두 사람이 바라보는 방향. 그곳에는 PC 동호회 잡지를 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