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give and take
1998년의 열악한 컴퓨터 환경은 게임의 배포에도 많은 제약을 주고 있었다.
상혁과 민준이 주로 활동하던 2020년에야 온라인 게임 플랫폼도 활성화되어있고 심지어 개발 중인 게임의 제작비를 ‘얼리엑세스’라는 이름으로 미리 팔아 땡길 수도 있었지만 1998년에 그런 걸 기대하는 건 완전히 무리였다.
애당초 독자들의 구매력도 그리 높지 않았기에, 정품 가격으로 29,000~49,000원 정도의 높은 가격을 게임에 지불 할 수 있는 구매력 있는 게이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1990년대 후반 PC게임 잡지에서 정품 게임을 번들로 제공하게 된 이후로, 2000년대 초에 걸쳐 촉발된 번들 CD경쟁 사태는 2000년대 초 패키지 게임 시장에 악영향을 끼친 요소 중의 하나로 회자 되곤 했다.
1만원 초반대 잡지를 한권 사면 2~3만원짜리 정품 게임을 공짜로 준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렇기에 당시엔, 게임을 살 돈이 없는 아이들이 게임 잡지를 사서 안에 부록으로 제공된 게임을 즐기는 게 하나의 문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출혈경쟁이 대부분 그러하듯 게임 잡지 역시 잡지 기사의 퀄리티나 이번호에 실리는 내용보다는 ‘이번 호의 번들 부록은 무엇인가.’ 가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주요 요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올해 3년차 게임기자인 박영길은 작금의 과열되어가는 번들 CD 경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자 중 한명이었다.
힘들게 쓴 기사나 공략보다 번들 CD가 무엇인가가 발매량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는데, 그걸 좋아할 기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자 영길의 옆을 지나가던 1년차 기자 차진우가 말했다.
“선배 또 꿍해 계시네요? 번들 계약 못 따내셨어요?”
“차라리 못 따냈으면 좋겠다. 기사만 가지고 승부하던 시절로 돌아가게.”
“그래도 판매량은 많이 늘었잖아요?”
“야,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를 게임 기자라고 할 수 있겠냐? 번들 영업사원이나 마찬가지지.”
누구보다 게임을 사랑하는 게이머의 한 사람으로서, 좋은 게임을 발굴해 게이머에게 소개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던 영길은 지금의 사태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로서는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번 달 번들을 놓치면 다른 잡지에 독자를 왕창 뺏길 테고, 그러면 편집장의 불호령이 떨어질게 뻔했다.
그렇다고 카피 당 몇 천원 떨어지지도 않는 게임잡지 번들에 최신 게임을 무상으로 제공하려는 게임사는 없다.
결국 몇 년 지난 게임을 번들로 제공하게 되는데, 영길은 그런 구조가 대한민국의 게임산업을 후퇴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달 게이머들에게 가장 이슈가 되는 게임이 최신 게임이 아니고 지난달 번들로 제공된 6~7년 된 게임이라는 게 정상은 아닌데···.”
안 그래도 다음 호 역시 번들 게임이 준비되어있었다.
그러나 영길은 이 일을 하면 할수록 게임 업계를 뒷받침하고 지원해야할 게임 잡지가 역으로 게임업계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우울한 기분이 들면, 괜시리 주변에 시비를 걸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이다.
“야, 차진우. 너 원고 안 써? 뭔 게임을 하고 있어?”
“다음호 원고는 다 썼습니다. 뭐, 어차피 일본 쪽 원고 번역하기만 하는 건데요. 진즉에 끝냈죠.”
“그렇다고 게임하고 있으면 되냐?”
“선배, 저희는 게임 잡지 편집부인데요?”
영길이 심통부리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영길의 태클을 받아넘겼다.
사실 영길이 한 것은 시비라기보다는 그냥 정해진 패턴을 반복하는 꽁트 같은 행위라고 볼 수 있었다.
하는 사람도 악의를 품지 않고 받는 사람도 딱히 기분나빠하지 않는 장난스러운 행위.
그런 행위 와중에, 영길은 진우가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이 자신이 본 적 없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그건?”
“아, 이거요? 선배 이거 안 해보셨어요? 요즘 한창 인기인 ‘익스트림 발리볼’이잖아요.”
“처음 보는데? 와, 그래픽 구린 거 보소···.”
형편없이 낮은 해상도에 조잡한 도트 이미지가 역으로 영길의 눈길을 끌었다.
“컴퓨터랑 1:1하는 거야?”
“아뇨 이거 IPX 지원 돼서 랜선만 연결되어 있으면 호스트가 방 파놓은 데로 들어가서 같이 게임 할 수 있어요.”
“오, 신기하네?”
익스트림 발리볼은 조금 더 영길의 관심을 끌었다.
“피○츄 배구 변형판 같은데?”
“거의 비슷해요. 캐릭터가 16종 있고 전적에 따라 선택 가능한 캐릭터가 늘어나는 거랑 캐릭터 성장 개념 있는 거 빼면요.”
“대전 게임 아냐? 그럼 컴퓨터 바뀌면 처음부터 다 다시 키워야 하잖아.”
“이건 디스켓에 세이브 저장하는 기능이 있어서 괜찮아요.”
“그거 나도 보내줘.”
진우는 책상에 있던 디스켓 하나를 집어 영길에게 넘겼다.
“디스켓 한 장밖에 안 해?”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한 장이더라고요. 압축되어있긴 하지만요.”
“흐음···. 좋아.”
처음엔 기분 전환삼아 시작한 게임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게임들의 기사를 작성한 영길은 곧 자신이 받은 이 디스켓 한 장짜리에 담긴 노하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틀.
영길이 익스트림 발리볼을 플레이하고 진우에게 다시 말을 걸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이틀이었다.
“진우야···.”
“선배, 어제 대체 어디가···. 우와앗! 얼굴이 왜 그래요?”
“익스트림 발리볼 하느라 잠을 못 잤다.”
“아, 저도 그거 처음 할 때는 캐릭터 해금하느라 똑같이 밤 샜었죠. 하하하···.”
“이거 15번째 캐릭부터는 단순 대전으로는 해금이 안 되는 거 같은데?”
“그게 뭔가 숨겨진 조건이 있는 것 같은데 공개가 안 되어있어서 커뮤니티에서도 계속 질문 올라오는 것 중에 하나에요.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구해?”
“그 개발자가 고등학생 두 명이라는데 처음에 게임 업로드 할 때 카페 알바생한테 전 캐릭터가 해금된 디스켓을 줬다나 봐요. 그 세이브 복사해서 쓰는 게 지금 알려진 유일한 방법이에요.”
“개발자가 고등학생이라고!?”
“처음 킬 때 팀 로고 화면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선문고 게임제작 동아리’라고 쓰여 있잖아요?”
영길은 진우의 말에서 기자로서의 감각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게임은 고등학생들이 만들기엔 수준이 너무 높지 않아?
‘뒤에 다른 지도자가 있던가. 아니면 어딘가의 게임을 베꼈던가, 그것도 아니면···.’
만에 하나, 정말 만의 하나의 경우의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정말로 우리나라 게임판에 천재 개발자가 등장한 것이거나.’
영길은 재미있는 기사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 잠깐 취재 좀 다녀올게.”
영길이 바로 가방을 집어 들어 어깨에 메며 말하자, 진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붙잡으려 했다.
“예? 선배, 어제 출근 안 하셔서 편집장님 엄청 화나셨는데?”
“외근 갔다 그래!!”
그렇게 소리 지른 영길은 편집부가 있는 건물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
“그러니까, 너희들이 처음부터 게임을 만들었다. 이거지?”
선문고 게임 제작 동아리 부실에 들어온 영길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특별한 인상을 받았다.
굳이 딱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학교 동아리라기보다는 뭔가의 개발팀 같은 느낌의 공간.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기획서들과 일러스트, 게임 타이틀이 들어있는 정품 박스들이 동아리보다는 작은 게임 회사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저희 3명은 중학생이고 지금 선배님들의 지도를 받아서 다른 게임을 만드는 중이에요. ‘익스트림 발리볼’은 저희가 합류하기 전에 여기 두 분이서 전부 만드신 거고요.”
“정말로 이 정도 게임을 둘이서?”
“뭐 이 정도라고 부를 만큼 헤비한 게임은 아니지만요.”
대화를 하면서도, 상혁은 지금 타이밍에 갑자기 기자가 찾아온 것에 대해 의아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혁찬네 팀이 게임의 체험판을 완성하기 직전인 상황에서 잡지사 기자가 취재를 온다는 것 자체가 뭔가 운명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희 쪽에 바라시는 건 뭔가요? 인터뷰?”
“응.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게임을 만든 고교생 개발자 두 사람에 대한 기사를 싣고 싶은데, 허락해 줄 수 있니?”
영길이 말하자 상혁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내용의 기사인데요?”
“뭐, 어떤 게임에서 모티브를 받았다던가, 아니면 게임 개발은 어떻게 배우게 된 건지, 왜 게임 개발에 뛰어들게 된 건지 같은 거?”
‘2020년에 과로사해서 눈떠보니까 1998년이라 전생에 배운 지식으로 게임 개발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영길이 물어보는 것들은 상혁들에게 참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것 들이었다.
“저희는 저희 게임 말고 저희 자신들에 대한 정보는 노출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혁의 곤란한 표정을 읽었는지, 민준이 대답을 대신하자 영길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유명해지면 너희들이 만들고 있는 다음 게임에 대한 홍보도 될 테고, 우리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 같지 않니?”
영길이 포기하지 않고 말하자 이번엔 상혁이 답변했다.
“개발자는 게임으로 보여줘야죠. 저희의 배경이나 과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럼 기사에 실리는 것 자체가 싫은 거야?”
영길의 질문에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게임에 대한 기사라면 좋죠. 만약에 괜찮으시다면 저희 쪽에서 익스트림 발리볼에 대한 공략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15,16번째 캐릭터의 해금에 대한 정보를 포함해서요.”
“정말이냐!?”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상혁은 영길에게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들릴만한 제안을 추가로 던졌다.
“원하신다면 PC 동호인 번들용으로 신규 캐릭터를 6개 더 추가해드리죠. 잡지를 산 사람들은 신규 캐릭터를 더 받을 수 있게요.”
상혁이 제안한 것은 2020년에는 흔한 개념인 잡지에서의 DLC 제공을 말한 것이었다.
게임 잡지가 괴멸해버린 2020년의 한국에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지만 일본계열 잡지에서는 게임사와 콜라보해서 자주 잡지 전용 DLC 특전을 제공하곤 했고 상혁은 그 개념을 영길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그것은 영길에게 상상도 하지 못했던 충격으로 다가왔다.
“잡지 전용으로 캐릭터를 추가해주겠다고??!”
사실 상혁 입장에서는 추가로 개발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추가할 6개의 캐릭터는 개발과정에서 밸런스 테스트까지 모두 마쳤지만 디스켓 한 장이 가지는 용량 한계 때문에 업로드 판에서 삭제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영길은 생각했다.
만약 지금 인기 절정인 이 게임의 전용 캐릭터가 번들로 제공되고, 사람들이 애타게 알고 싶어하는 공략정보까지 다음호 잡지에 실을 수 있다면···.
“흐흐흐흐흐···.”
영길의 머릿속에 다음 호 번들로 일본 유명 게임을 따냈다며 거들 먹 거리던 ‘PC피플’ 기자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봐야 5년 전 게임. 상혁이 제안한 이정도 떡밥이면 충분히 PC피플의 판매량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
영길은 갑자기 하늘에서 자신에게 복덩이를 던져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복덩이를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제안한 상혁은 단순하게 호의로 그 모든 것을 제안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give and take.’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상혁은 흥분한 영길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말만 하시죠! 제가 뭘 해주면 될까요? 제 권한으로 가능한 건 최대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흥분한 영길의 말투는 어느새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