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어자피 세상은 인맥이랑 빽
“야, 우리가 뭐 잘못한 거 있냐?”
현주를 따라가면서, 민준이 상혁에게 묻자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학생수첩에서 학교 교칙 다 확인해봤는데 게임 만들지 말라는 교칙은 없었다.”
“그럼 뭐지? 혹시 등급 심사 안 받았다고 그것 때문에 부른 건가?”
“게임물 등급 관리 위원회는 지금 시점에서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2006년에 출범일걸? 애당초 도박 게임인 파도이야기 때문에 생긴 조직인데, 아직 파도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아씨, 그럼 뭐지?”
“굳이 시비 걸릴 만한 거리라면 왜 친구들 성적을 떨어트릴 만한 요물을 만들어서 뿌렸냐 이런 거 아닐까?”
그러나 학생지도실에 도착한 현주는 분명 무언가 자신들을 벌주기 위해 불렀을 거라는 두 사람의 예상과는 다르게,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캐비넷에서 쿠키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음료는 뭐로 할래? 녹차, 커피, 오렌지주스 있는데.”
“전 커피요.”
“저도.”
뜬금없이 선생님이 타주는 커피를 마시게 된 두 사람은 잔을 홀짝이며 학생 지도실 안을 둘러보았다.
‘뭔가 언밸런스하네.’
지도실 한쪽에는 보기에도 살벌해 보이는 하키스틱, 야구 배트, 가느다란 플라스틱 회초리가 마치 무기 장식장처럼 줄지어 놓여있고 반대로 한쪽에는 각종 다과와 음료가 있는 트레이가 있었다.
그건 무언가 묘한 비대칭적인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의 시선이 몽둥이 쪽에 가 있는 걸 본 현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 몽둥이들은 뭔가 위압감을 주니까 캐비넷 안에 넣어놓자고 했는데 학생주임 선생님이 저게 있어야 잘못한 애들이 압박감을 느낀다고 안 치운다고 하더라구.”
“저희한테 저걸 쓰려고 부르신 건 아니죠?”
“내가? 에이, 그런 건 아니야. 난 상담이 주 업무거든.”
정신연령이 40이 넘은 상태에서 28살 선생님에게 두들겨 맞을 걱정은 덜었다는 생각에 상혁과 민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층 여유로워진 태도로 현주와의 대화에 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상혁이 현주를 보며 말했다.
“처벌이 아니라면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뭐죠?”
“우선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정말로 너희들이 ‘익스트림 발리볼’을 만든 게 맞니?”
“예.”
“혹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던가? 학원 선생님이라던가, 대학교 형이라던가···.”
“아뇨. 저희 둘이요. 뭐,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반 친구들을 써서 리소스 제작을 하긴 했지만, 제작 자체는 저희 둘이서 했다고 봐야죠.”
“원래 게임 제작 같은걸 배웠었던 거야?”
“아뇨. 그냥 둘 다 독학해서 공부했어요.”
“독학으로 그 정도···. 후, 아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으니 질문은 그만하고 용건을 말할게. 선생님이 너희 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그러나 현주가 나머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혁은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싫습니다.”
“엥? 아직 얘기도 안했는데?”
“어차피 뭔가 컴퓨터 관련 업무 아닌가요? 저희는 하청은 이제 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청?”
“아, 아니 심부름이요.”
“아···. 말하는 게 꼭 회사원같구나?”
“아빠가 회사 다니셔서요.”
사실 상혁의 아버지는 건설현장에 다니시지만, 상혁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뒷조사를 할 것 같지도 않아서.
“어, 음···. 확실히 부탁이니까 심부름이라면 심부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컴퓨터 관련 업무인 것도 맞죠?”
“컴퓨터 관련이기는 한데···.”
“그럼 저희는 안 할래요. 뭐 학교 운영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던가 그런 건 싫거든요.”
그러자 현주가 정말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민준은 그녀의 태도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학교 관련 업무는 아닌가 봐요?”
“어? 어떻게 알았어?”
“보통 선생님들은 학교 관련된 거면 학생한테 무조건 시켜도 된다고 생각하시니까요.”
민준의 말에 현주는 조금 뜨끔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표정을 바로 하고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민준이 말대로, 내가 부탁하려는 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일이라서···. 솔직히 너희한테 부탁해도 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민준은 그 ‘개인적인 일’이라는 단어에 흥미를 느꼈다. 28살 여선생이 개인적인 일로 게임을 제작하는 고등학생을 불러서 부탁할 일이라는 게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볼게요.”
“진짜로?”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두 사람이 정말로 상상도 하지 못할만한 내용이었다.
“사실은 내 사촌동생이 지금 중 3인데 학교에서 게임 제작 동아리를 하고 있거든.”
“기획자?”
“프로그래머?”
상혁과 민준이 동시에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림 그린다던데?”
“그래서요?”
“1학년때부터 친구랑 같이 하기 시작했다는데, 3학년이 되도록 2년 넘게 아무것도 못 만들었다지 뭐야?”
“뭐, 보통 동인개발이면 흔한 일이긴 하죠.”
“그래서 너희가 가서 게임 하나라도 완성할 수 있도록 가서 도움을 좀 줬으면 하는데?”
“저희가요?”
“너희는 이걸 두 달 만에 만들었다며?”
현주는 익스트림 발리볼의 디스켓을 들어올렸다.
“너희 정도 전문가라면 어려운 일은 아닐 거 같은데, 어때?”
그녀의 경험상 저 시기의 남학생들은 띄워주기에 극도로 약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점은, 상혁과 민준의 안에 들어있는 두 사람의 영혼이 중2병에서 방금 벗어난 호르몬 넘치는 남고생의 영혼이 아니라 볼꼴 못 볼꼴 다 본 40살의 중년 아저씨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어째서?”
“익스트림 발리볼이야 저희가 취미로 만든 거지만 선생님이 부탁하신 건 일이 되어버리니까요.”
“그걸 어떻게 좀 안될까? 2년이나 노력했는데 결과도 못 낼 거 같은 사촌 동생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래.”
“흐음···.”
그때, 고민 중인 상혁의 어깨를 민준이 툭툭 두드렸다.
상혁이 돌아보자, 민준은 고개를 까딱이면 상혁을 바깥으로 불렀다.
“선생님, 잠깐 둘이 이야기 좀 할게요.”
“응? 아냐. 그럼 내가 잠깐 나가 있을게. 이야기 끝나면 말해.”
현주가 아예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자, 둘은 1:1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민준이 한 말은, 상혁에겐 조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거 하자.”
“뭐? 이거 그냥 케이스만 다른 거지 하청이나 마찬가지잖아? 그것도 공짜로 해야 할 텐데? 난 니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서 거절한 거라고.”
“뭐, 대가야 조율하면 되는 거고, 솔직히 지금 중학생 레벨에서 만드는 게임이 그리 복잡할 것 같지도 않은데···.”
“쉽다 어렵다의 문제가 아니지 않아?”
“뭐, 솔직히 말하자면 원래 회귀하던 때만 하더라도 절대 코딩은 안할 생각이었지만, 니 말대로 같이 게임 만드는 건 나름 즐거웠다고. 오히려 완성하고 나서 요즘은 아예 지루할 정도야. 어차피 차기작 제작 들어갈 때 까지 시간이 있으면 이런 것 한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아하···!”
상혁은 씨익하고 웃으며 민준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요즘 할 게 없어서 몸이 근질거리니까 이 제안을 받자는 거네?”
“뭐, 딱 잘라 말하면 그렇지.”
“좋아. 뭐···.어디 회사일을 대신 해주는 것도 아니고, 잠시 다른 동인팀 들어가서 작업을 지도하는 거라면 나름 재미있을 것 같긴 하네.”
“내 생각에도 그래.”
“그럼 받는 걸로 하겠는데, 댓가는 받아야겠어.”
“댓가?”
“공짜로는 하기 싫다고.”
그렇게 말한 상혁은 밖으로 나가더니 현주를 안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현주에게 두 사람의 결정을 알렸다.
“조건만 맞으면, 저희가 손 써 볼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
“어?! 정말? 해줄 거야?”
“조건이 맞으면요.”
“조건?”
상혁은 현주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선생님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대신 상혁은 자신이 게임을 만드는데 있어서 선생님이라는 직위로 지원 가능한 범위의 것들을 원했다.
좋던 싫던 어차피 앞으로 2년 반 가까이 고등학생으로 지내야하니 그동안 편하게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라도 갖추고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정식으로 게임 동아리 설립을 처리해주고 내가 담당 선생님이 되어달라는 거지?”
“예. 그러면 2주마다 있는 동아리 특별활동 시간에 하루를 풀로 쓸 수 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주 5일제는 2004년부터 실행되었기에 현재 상혁과 민준은 토요일에도 학교에 나와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니는 학교의 경우 전교생을 대상으로 강제적인 부활동 가입이 이루어지고 2주에 한 번씩 토요일에 하루 전체를 부활동에 쓸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물론 ‘게임 제작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컴퓨터 활용부’에 들어가 토요일에 팔자에도 없는 한컴 타자연습을 하거나 윈도우 폴더 만드는 법 등의 강의를 억지로 들어야 했다.
상혁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주에게 거래를 제안했고 현주는 잠시 고민 후에 상혁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 내가 할 수 있는 걸 알아볼게.”
“그리고 어차피 특별활동으로 할 거면 컴퓨터실을 쓰고 싶은데요.”
“거긴 이미 컴활부가 쓰고 있는데?”
“하지만 게임을 만들려면 컴퓨터가 필요해요. 저희 두 사람 집에도 컴퓨터가 있지만 노트북은 아니거든요.”
“좋아. 하지만 컴퓨터실은 힘들어. 차라리 다른 교실에 컴퓨터를 2대정도만 설치해달라고 요청해볼게.”
“그런 게 가능해요?”
“뭐, 학교 재단이 우리 할아버지 거니까. 그 정도는 뭐, 뭐야? 그 표정은?”
“더러운 어른의 세계를 목도한 순수한 고등학생의 표정인데요?”
“너희도 크면 잘 알게 되겠지만 어차피 세상은 인맥이랑 빽이란다.”
“뭐, 크지는 않아도 그 부분은 엄청나게 잘 알고 있어요. 단지 진짜로 ‘이사장 손녀’ 같은 존재를 보게 되니까 신기해서 그러죠···.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해주시면 저희는 더 바랄 게 없네요.”
“그럼 해 주는 거다?”
“어디로 찾아가면 되는지 적어주세요. 그리고 저희 간다고 미리 사촌 동생한테 연락 부탁드립니다.”
거래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두 사람은 김현주 선생의 사촌 동생이 있는 중학교에 가서 게임 제작을 돕고, 선생님은 두 사람을 위해 부실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단지 두 사람의 예상을 조금 벗어난 점은, 이사장 손녀라는 현주 선생의 힘이 조금 상상 이상이었다는 점뿐이었다.
거래가 이루어진 다음 날 바로 빈 교실에 최신형 컴퓨터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상혁은 입을 떡 벌리고 민준을 향해 말했다.
“와, 더러워···. 말 한마디 하면 최신형 컴퓨터가 그냥 생기는 거네?”
“뭐, 어차피 지금 시즌엔 컴퓨터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우리 졸업할 때쯤엔 고물 되겠지만 말야···.”
“그래도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컴퓨터보단 압도적으로 좋아 보이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상혁아.”
민준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렇게 선생님이 선불로 일을 처리했으니 우리가 빼도박도 못하고 게임을 완성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는 거지.”
“흠···.”
가볍게 훈수 정도만 두고 직접적으로 개입은 안 할 생각이었던 상혁은 민준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일단 가서 상황을 보자고. 그 문제는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민준이 그렇게 말하자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 말대로, 겨우 중학생을 상대하는 일일 뿐이다.
“그래. 가자. 우선은 2년 동안 삽질만 했다는 팀 상태부터 좀 확인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