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62화 (962/963)

962화. 하늘을 뒤덮는 불꽃 (2)

“자, 여기서 쉬었다가 가세.”

“이렇게 여유로이 가도 괜찮은 겐가.”

“조사들께서 깨달으신 불법의 흔적으로 가득한 곳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었네. 그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었지만, 세상 공기가 그리워질 때도 많았지.”

“속도 편하군. 일국의 황제가 위험한 이때에.”

“허허.”

껄껄 웃는 노승, 무허에게 그리 말했지만 사실 그가 중간중간 쉬었다 가자고 하는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걸 탁무자는 모르지 않았다.

우우웅.

탁무자의 관자놀이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슬쩍 불거졌다.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속으로는 구멍이 난 상단전을 다스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보세.”

무허가 일어나 탁무자의 등 뒤로 돌아갔다.

탁무자가 쓰게 웃었다.

“도가 무공을 익힌 놈이 땡중의 진기로 숨 쉬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하군.”

“마도(魔道)도 아닌데 무엇이 그리 씁쓸한가. 도가나 불가나 한 끗 차이야. 민감한 상단의 신기(神氣)까지 영통하는 걸 보면 모르겠는가.”

무허의 손이 탁무자의 명문혈에 닿았다.

그들 정도의 경지라면 굳이 신체 접촉 없이도 기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는 것은 탁무자의 내부 상황을 더 섬세하게 읽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우웅.

무허의 손에서 일렁이는 황금빛 진기가 탁무자의 몸을 덮었다.

“후우우.”

탁무자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떤가? 괜찮나?”

“두어 번 받아 봤지만 정말 대단하구먼. 구멍 뚫린 상단전의 외벽 앞에 두꺼운 금빛 진기가 막을 치고 있어.”

탁무자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원무치상법(元武治上法)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었는데.”

원무치상법은 그가 기우희에게 전수해 준 무당의 비기였다.

비기라고는 하나 구결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진결이라,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고서는 타인에게 유출될 일도 없다. 그만큼 신비로운 공부였다.

“상단전 그 자체를 다스리는 것은 원무가 더 나을 걸세. 다만 방벽을 쌓고 튼튼히 하여 단전을 보강하는 것은 반야(般若)를 따라올 무공이 없지.”

무허가 말하는 반야는 곧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을 뜻했다.

무상대능력과 함께 소림의 이대능력이라 불리는 반야대능력은 숭산 최고, 최강의 비기였다.

차기 신권(神拳)에 가장 가깝다는 범오가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반야대능력을 얻은 것과 같이 무허 역시 진즉에 반야대능력을 깨우쳤던 것이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많은 양을 주입했네. 보름은 갈 게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말이지.”

“그렇다네. 상단신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세워 둔 금성철벽이 빠르게 녹아 가겠지.”

탁무자가 입맛을 다셨다.

“왠지 시한부 인생이 된 것 같구만.”

“기분 좋지? 나도 오랜 시간 그리 살아 봤는데 나쁘지 않더군. 내 인생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어.”

“우울한 얘기는 하지 마세.”

무허가 껄껄 웃었다.

“통천진인의 마안(魔眼)으로도 자네를 보지 못할 걸세. 안심해도 좋아.”

“다만 자네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는 있겠지.”

“그건 어쩔 수 없지.”

탁무자가 힐끔 무허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봐 온 친구가 이렇게 마른 몸으로 돌아오니, 제아무리 탁무자라도 충격을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오히려 지옥기를 제어하기 위해 은거하기 전, 굴강한 근육으로 뒤덮였던 그때보다 지금이 더 강해 보였다.

실제 내공도 더 줄어들고 행동도 조금 느려졌는데도 강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무(武)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탁무자조차도 무허의 변화를 명확히 볼 수 없었다.

‘무언가 또 깨달음을 얻은 것인가.’

그때, 한가로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던 무허가 물었다.

“신화교주의 돌발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탁무자가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지. 진짜 신선이 아닌 바에야.”

“통천이 그랬다면서. 신화교주가 천자를 죽이려 한다고.”

“그 때문에 우리가 가고 있는 거 아닌가. 자네와 함께 갈지는 몰랐지만.”

“정말 죽이려는 것일까?”

“음?”

무허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소문에 따르면 삼교의 수괴들은 하나같이 강호 정점의 무력을 쌓은 이들일세. 성격들이야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각 종교의 수장이고 지닌바 무력도 굉장하니 자존심도 무척 강할 거라고 예상해 볼 수 있네.”

“그렇겠지.”

“그런 그가 직접 천자를 죽이러 온다? 물론 일국의 주인인 만큼 누구보다도 품격이 있는 상대겠지만, 그만한 종교의 수장이라면 천자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여길 수도 있을 텐데.”

탁무자의 눈이 반짝였다.

“자네는 통천의 말이 거짓이라고 보는 겐가?”

“황궁으로 오는 것까지 거짓말은 아니겠지. 실제로 오고 있기도 하고.”

“하면?”

“내 말은, 우리가 너무 사태를 단순하게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말일세.”

“흐음.”

“우린 신화교주가 얼마나 강한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도 모른다네. 통천은 그가 황제 시해를 계획하고 있다 했지만,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믿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네. 신화교가 명백히 우리의 적이었다는 것.”

“그건 그렇지.”

“실제로 신화교에서 나온 무장들과 세작들로 인해 중원이 많은 피를 보았어. 사전에 그들을 찾아 제거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황궁을 시작으로 중원의 이 할 이상은 놈들의 수중에 떨어졌을지도 모르네.”

무허가 쓰게 웃었다.

“정말이지, 어찌 인간은 그렇게들 만족을 모르고 사는지.”

“나도 그랬고 자네도 그랬네.”

“허허, 그렇지.”

무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나는 통천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는다네. 마기(魔氣)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지옥기를 제어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마(魔)와 연관된 이들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신뢰하기가 어렵다네.”

“굳이 자네 같은 경험이 없어도 마도를 신뢰하기는 힘들 거네.”

탁무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가? 몸은 좀 풀렸나?”

“물론이지.”

“자, 그럼 쏜살같이 달려가 볼까.”

훅!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황제의 눈이 깊어졌다.

“신화교의 중원 진출을 허가받겠다?”

“허가라는 말은 어감이 좀 그렇군.”

기천웅이 턱을 괴었다.

깊고 푸른 눈, 거대한 가마 위에 앉은 모습에서는 나른함과 위엄이 공존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한 조직, 그것도 종교의 수뇌부로서 오랜 세월을 살았으니, 그러한 위엄은 무공의 경지가 쌓이기 이전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원의 기름진 땅에서 살아 보겠다, 여기가 더 살기 좋아 보인다…… 뭐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난 한 번도 대륙 땅을 밟아 본 적 없는 사람일세. 확실히 공기는 이쪽이 좋긴 하더군.”

“짐이 그대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리라 믿는다.”

“어쩔 수 없겠지.”

“하물며 다짜고짜 황궁으로 와서 성문부터 박살을 냈으니, 지닌바 능력의 증명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과격한 인사가 아니더냐.”

“어느 정도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 줄 필요도 있다고는 생각했지. 말하자면 마지막 속풀이라고나 할까.”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진심인가.’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은 그에게도 있다.

그것은 타고난 신통력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랜 세월 황궁의 정치판에서 몇 마디 대화와 눈빛만으로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는 능력을 길렀다.

단 하루도 안심할 수 없는 일상. 심지어 그는 황궁 밖 세상에 나가 대륙의 실상을 확인해 본 몇 안 되는 황자 중 하나였다. 오죽하면 산적 무리에 습격까지 당해 봤겠는가.

그렇게 연마된 심안(心眼)은 신통력을 타고난 이들의 심안보다도 더 날카로울 때가 많았다. 당장 일세의 고수인 연씨 부자들과 대화할 때도 그들의 의도를 읽지 못했던 순간은 거의 없었다.

한데 이 작자는?

‘진심이긴 한데.’

그는 신화교주 기천웅의 말에 녹아든 진한 진심을 느꼈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하는 걸 보면 딱히 대륙에서의 삶을 꿈꿔 온 것은 아닌 듯했다.

그것부터가 놀라웠다. 삼교가 대륙을 노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의 기름진 땅, 풍요로운 환경 때문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 까닭이었다.

‘역시.’

황제는 얼마 전, 그러니까 청동화로에서 사람의 형상이 불타오르는 기괴한 술법을 봤을 때부터 떠올랐던 의심을 하나씩 풀어냈다.

“그대는 신화교의 수장이 맞느냐.”

곡경이 힐끔 황제를 바라보았다. 왜 당연한 사실을 재차 확인하려는 것인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렇지.”

“우헌 태감의 정체를 모르더군.”

“…….”

“그렇다면, 신화교의 무장이라는 놈들이 이 땅에 숨어들어 판을 쳤던 것도 모르고 있겠군.”

“…….”

“만약 저 무림의 협사들이 그들을 제때 몰아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중원 땅의 삼 할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알고 있느냐?”

“…….”

“그대의 딸도 중원에 있다. 사생아라고 들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

처음이었다.

묵묵히 황제의 말을 듣고 있던 기천웅의 눈빛이 일순 변한 것은.

“우희를 말함이로군.”

“기우희.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우희, 우희라…….”

나른함으로 가득했던 기천웅의 얼굴에 한 줄기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못난 아비 때문에 어릴 적부터 상처가 많았지.”

“…….”

황제의 눈이 깊어졌다.

못난 아비? 설마하니 사교의 수장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기천웅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본교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나?”

“모른다.”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어떻게 신화교의 주인이 되었는지도 모를 것이고.”

“…….”

황제는 말없이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기천웅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기천웅은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무엇을?’

지나온 길을? 아니면 신화교의 주인이 되려고 아등바등했던 과거를?

그도 아니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스르륵.

기천웅이 가마에서 내려왔다.

빤히 눈을 뜨고 보고 있었음에도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손에 든 커다란 술잔은 그대로였다. 신발을 신지 않아 맨발로 땅에 내려섰는데, 흙바닥을 디뎠는데도 발이 더러워지지 않았다.

곡경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가마에서 내려온 기천웅의 키는 굉장히 컸다. 저 정도면 요즘 젊은이들보다도 더 큰 것 같았다. 꽤 큰 키인 연호정과 비슷하거나 그보다도 조금 더 큰 듯했다.

어깨로 내려온 금빛 머리카락은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모여 거꾸로 뒤집힌 불처럼 보였다.

기천웅이 저 멀리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황궁보다도 훨씬 더 먼 북동쪽. 얼음으로 뒤덮인 기이한 나라에서 온 불꽃의 남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일국의 주인이 되었나?”

“……?”

“아마 치열한 정쟁을 거쳐 그 자리에 올라섰겠지.”

“…….”

“그래도 자식이 자네를 잡아먹으려 하진 않으니, 피 튀기는 골육상쟁 속에서 권력을 쟁취한 이로서는 천운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황제의 눈이 흔들렸다.

기천웅의 눈이 흐려졌다.

“불은 하나지. 무게가 없는 현상 그 자체를 뜻하네. 언제나 하나로 합쳐지길 원하는 불은 끊임없이 제 몸을 불리다가 어느 순간 재만 남기고 사라져 버리지.”

“…….”

“나는 내 대(代)에서, 더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싶지 않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