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화. 깨달음이란 (10)
두두두두.
천하의 명마들을 탄 정사 연합군의 진군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팽무강의 눈이 번뜩였다.
“저기!”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무수히 많은 개방도가 모여 있었다.
개방도라고 하면 생각나는 거지의 차림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훨씬 말쑥한 차림들, 평범한 일꾼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히히히힝!
서서히 속도를 늦춘 일행이 재빨리 말에서 내렸다.
개방도 중 하나가 말했다.
“급박한 상황이니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황궁 측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최소의 인원을 제외하고 모두 물러났습니다. 최고 등급의 정보가 아니면 활동하지 않기에 아직 어떠한 정보도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그 말인즉 아직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연위가 양천을 바라보았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예.”
파아아아앙!
양천과 연위, 팽무강을 선두로 일천이 훌쩍 넘는 병력이 일제히 신법을 펼쳤다.
여기서부터는 체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장기적인 이동이라면 말이 낫지만, 황궁과 가까운 지금은 극속의 신법으로 최대한 빨리 거리를 줄이는 게 이득이었다.
그렇게 일행의 시야 저 멀리 황궁의 거대한 성벽이 나타났을 때.
쾅!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폭음 너머로 부서진 성벽의 잔해들이 하늘을 날았다.
연위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폐하.’
제국검을 쥔 그의 손에 매서운 진기가 감돌았다.
* * *
황궁 내부가 무척 넓었기 때문에, 실제로 북성까지 걸어가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황제는 여유로웠다. 굳이 천천히 걷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와 보조를 맞춰 걷는 곡경은 무형의 기를 사방으로 퍼트려 거미줄 같은 기망을 형성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황제는 유유자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떠한 말도 없이 잘 닦인 길을 걷는 그의 모습은, 비록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절대자의 풍모를 연상케 했다.
타고나기를 만인지상의 권력자로 태어난 것일까.
황제의 뒤를 따르며, 곡경은 이 세상에 무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 시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걸었을까.
마침내 저 멀리 북성이 보였다.
철컹! 철컹!
갑주를 입은 황궁의 정예 무장들이 앞다투어 황제의 좌우로 늘어서서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무장들의 우렁찬 목소리는 하늘에 낀 구름을 걷어 내고 어수선한 대지에 지진을 일으켰다.
본래도 용맹하기 그지없는 무장들이었지만, 황제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니 그 사기가 밑도 끝도 없이 올라갔다.
그것은 무장들과 병졸들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저 성벽 위에 서서, 어느새 오십여 장 앞으로 다가와 진을 치고 있는 적군을 노려보던 금헌태의 얼굴도 점점 상기되었다.
‘진정 오셨구나.’
화아아악!
등 뒤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사기.
끓어오르는 열탕과 같은 군기는 삽시간에 북성 전체로 퍼져 수비대 정예들의 눈빛을 용암처럼 달구었다.
곡경의 얼굴에도 격동이 일었다.
‘대단하시다.’
그저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무사들의 사기를 하늘 끝까지 끌어올렸다.
황제라는 위치나 권위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 자체가 뿜는 존재감이, 절대자로서의 굳건함이 무사들 모두에게 전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무공 한 줌 배운 적 없는 사람이 어찌 저런 힘을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극에 이른 술사라도 이렇게까지 사기를 끌어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자(天子).’
하늘 아래 유일무이한 존재.
인간 세상의 정점이자 신민을 하늘과 연결시켜 주는 교각이며, 그 자체로 제국을 상징하는 천외천의 신인이다.
황제의 비범함을 가장 가까이서, 누구보다 오랫동안 봐 온 곡경에게도 지금 이와 같은 광경은 처음이었다.
“계단이 많군.”
황제는 무장들에게 수고한다느니, 그대들을 믿겠다느니 하는 뻔한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치하나 해 주려고 온 길이 아니었으니까.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던 황제가 시선을 돌려 뻥 뚫린 성문을 바라보았다.
그사이에 치웠는지 부서진 성문의 잔해는 보이지 않았다. 뚫린 성문을 황궁 수비대의 이인자와 수백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막고 있었다.
황제는 시커멓게 그을린 벽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그대로군.”
그는 뒷짐을 진 채 성벽 계단을 올랐다.
놀랍게도, 오랜 시간 주색으로 몸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을 텐데 반나절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을 걸었는데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나아가 계단을 오르면서도 숨 한 번 헐떡이질 않았다. 성벽의 높이를 생각하면 이는 대단한 일이었다.
황제가 비로소 성벽에 올라서자 금헌태가 몸을 돌려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전시 상황이라 예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고생이 많네.”
“황공하옵니다.”
“일어나게. 적이 앞에 있지 않나.”
금헌태가 몸을 일으켜 다시 적을 바라보았다.
고작 오십여 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일천의 병력.
기실 저 정도 병력으로 황궁을 집어삼키려 든다는 건 황궁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
그러나 무사들 중 누구도, 심지어 황제조차도 저들을 비웃지 않았다.
거대한 불덩이를 날려서 일격에 성문을 부숴 버린 이가 있었다. 그 정도 능력이라면 일천 병력이라도 무시는커녕 긴장해야 마땅했다.
제국군의 군용 전술은 대인전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지, 불을 뿜는 괴수를 상대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곡 호위.”
“예, 폐하.”
“보이는가?”
곡경의 눈이 적진의 후방, 거대한 황금빛 가마를 향했다.
가마의 크기는 상당했다. 족히 십여 명은 편안하게 탈 수 있을 만큼 넓었는데, 온통 푹신하고 부드러운 비단으로 뒤덮여서 보기만 해도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시선을 조금 내리니 웃통을 벗은 서른 명의 장정들이 가마를 지고 있었다. 하나같이 근육질로 건장한데, 특이하게도 양 팔목과 발목에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좌우와 후방엔 기괴한 투구를 쓴 이십여 명의 무사들이 거대한 깃발을 든 게 보였다. 깃대는 황금색이었고 펼쳐진 깃발은 붉은 바탕에 시커먼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소소하면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 위압감의 절정은, 가마에 반쯤 누운 듯 앉아 있는 사람에게서 나왔다.
“예. 보입니다.”
곡경의 눈이 흔들렸다.
‘저자가 신화교주?!’
놀랍도록 신비로운 자태였다.
붉은 비단을 깔고 앉은 사내는 서역인이었다. 금빛 머리카락과 유독 하얀 피부, 그리고 푸른 눈이 인상적이었다.
워낙 생김새가 다르다 보니 나이를 유추하기 어려웠지만, 겉으로 보이기로는 많아야 서른을 넘기지 않은 청년 같았다.
그야말로 한창때의 나이. 하지만 곡경은 사내의 나이가 보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강하다!’
어떠한 기세도 풍기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생기는 풍부하지만, 딱히 위험한 기세나 열양공 특유의 화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존재감만큼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마치 또 다른 일국의 황제처럼, 드넓은 천하에 오직 나 홀로 고고하다는 분위기를 잔잔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풍기고 있었다.
차림은 피부보다도 더 하얀 옷을 입었는데, 펑퍼짐하여 가슴골이 다 드러났다.
팔다리는 중원인들보다 더 길었고 골격도 컸다. 그러나 완벽하게 단련되어, 둔하다기보다는 날렵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한 손에는 투명한 술잔을 들고 있었으며, 그 잔에서는 반투명한 푸른 불꽃이 바람에 따라 넘실거렸다.
곡경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위험하다.’
어떠한 기세도 느끼지 못했지만, 본능이 경종을 울린다.
저 남자는 위험하다.
그것은 눈빛에서 유추할 수 있는 성격이나 성품, 혹은 느닷없이 황궁으로 진군해 온 의외성 때문이 아니었다.
품고 있는 힘이 곡경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았기에, 도리어 신화교주의 위험성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반박귀진(返璞歸眞).’
그렇다.
신화교주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이였다.
억지로 기를 갈무리하여 평범하게 보이도록 한 게 아니라, 이룬 경지가 너무나도 높고 진기의 밀도가 너무나도 깊어서 곡경 정도의 수준으로도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반박귀진이라 할 수 있을까.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력을 몸에 담고 있는 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싸움은 가능해.’
짧은 시간, 곡경은 가마 위의 청년과 자신의 전력을 냉정하게 비교했다.
답은 금세 나왔다.
싸움은 가능하지만,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청화공주와의 혼인 건으로 양천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간 더 깊은 경지를 구축한 그를 보며 내심 무척 놀랐었다.
저자는 양천보다 더했다.
무림맹에서 만났던 삼제 중 둘, 검제와 도제보다도 강할 것 같다. 이룬 깨달음이 달라 비교하기 힘들지만, 단독으로 싸운다면 천하 무공의 정수를 얻었다는 도검의 제왕들도 밀릴 것 같았다.
‘일신이선 정도가 아니면 일대일 대결로 승기를 잡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곡경은 그렇게 확신을 내렸다.
“어떤가.”
어느새 얼굴이 굳어진 곡경과 달리 황제의 표정은 여일했다.
“자네가 보는 적의 수괴는?”
곡경은 가감 없이 대답했다.
“현재 황궁 내에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자네도?”
“그렇습니다.”
금헌태는 물론 무장들 모두가 깜짝 놀라 곡경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자존심 강한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차원이 다른 강자가 맞긴 한 모양이네.”
“싸움은 성립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자의 무공을 보지 않은 이상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지요. 그러나…… 아마도 패배할 겁니다.”
자존심을 떠나 황제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냉정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금헌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궁에는 어떤 적이라도 물리칠 수 있는 수단이 많습니다.”
“음.”
“곡 호위께서는 폐하를 끝까지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그럴 것이네.”
그때였다.
“대화들은 끝났나.”
나른하면서도 엄청난 울림을 지닌 목소리였다.
젊고 청아한데도 낮고 강렬했다. 그 먼 거리에서 담담하게 뱉은 말이 성벽 전체를 울릴 정도로 컸다.
“중원의 공기가 무척 맑군.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자네들이 마시는 공기를 한껏 들이켜고 있었기 때문이야. 내게는 이 자체가 새로움이요, 즐거움이지.”
묘한 목소리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몸에 힘이 빠진다.
섭혼술 같은 사술 따위가 아니었다. 타고난 목소리가 그러했다. 듣기만 해도 강제로 긴장이 풀리는 소리, 무공은 아니지만 이 또한 음공(音功)의 한 종류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공기나 맡겠다고 이 먼 길을 찾아온 것은 아니지.”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이국의 미청년, 치명적인 미소였다.
그가 반투명한 푸른 불꽃을 피워 내는 술잔으로 황제를 가리켰다.
“그대가 이 진흙 부스러기 같은 집의 주인인가?”
금헌태는 물론 무장들 모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무서운 목소리,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기이한 목소리였지만, 누구도 공포에 젖은 사람이 없었다.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려한 용포에 굴강하기 짝이 없는 용안(龍眼)이라, 필경 그대가 황제인 듯한데 어찌하여 대답이 없는가?”
“묘한 녀석이로세.”
“……?”
“짐과 대화를 나누는 영광을 누리고 싶었다면 전서 하나 보내면 됐을 것을, 무엇 하러 이놈 저놈 다 끌고 와 사람을 귀찮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