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57화 (957/963)

957화. 깨달음이란 (7)

“…….”

얼마나 지났을까.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명상에 들었지만, 진정 자아 깊숙한 곳까지는 닿을 수 없었다. 그리되면 정녕 세상을 잊고 오랫동안 나만의 세상을 거닐 테니까.

다만 이 선해(仙海)의 봉우리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무당파 역사상 손에 꼽힐 만큼 높은 경지에 오른 탁무자라도 그러했다.

명상에서 깬 탁무자는 벽곡단 세 알을 취한 후 산에서 내려갔다.

워낙 불쑥 솟은 곳인지라 범부는 쉬이 올라올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탁무자는 절벽 끝에서 몸을 날리는 간단한 방법으로 봉우리에서 내려왔다.

스르륵.

마치 날개라도 있는 듯 빠르게 하강하다가 내력을 이용, 서서히 속도를 줄인 탁무자가 땅에 섰다.

“오랜만이군.”

탁무자가 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봉우리 꼭대기는 희뿌연 운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저 운무를 뚫고 내려오니, 그제야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곳에서 내려온 것도, 그리고…….”

고개를 내린 탁무자가 저 멀리 숲속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자네를 보는 것도.”

사라락.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치며 시원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사이.

졸졸 흐르는 개울물 위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걸어오는 한 명의 승려가 있었다.

상당히 왜소한 체구였다. 마르기도 말라서, 가사(袈裟) 안 회색빛 승복조차 몹시 헐렁해 뵌다.

그러나 노승의 존재감은 빈약한 몸과 달리 굉장했다.

저 봉우리 끝을 감싸고 있는 선해처럼 부드러웠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허허로웠다. 동시에, 꿈틀거리는 산맥처럼 단단하면서도 무거운 중심을 지니고 있었다.

탁무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노승의 존재감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아니, 대단해서는 맞았지만, 정확히는 노승의 상태가 생각보다 너무 멀쩡해서 당황했다.

“땡중.”

“잘 계셨는가.”

웃음기 가득한 노승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듣기가 좋았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독경 소리 같다고나 할까.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깨달음 높은 고승의 운율 섞인 목소리가 탁무자의 복잡한 머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다.

멍하니 노승을 보던 탁무자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이제 늙었다고 헛것이 보이는 건가?”

“헛것을 보기에는 자네의 깨달음이 지나치게 높다는 생각 안 해 봤나?”

“그 사람 낯부끄럽게 하는 말투를 보면 분명 내가 아는 땡중이 맞는 듯한데.”

“불법의 끝자락도 못 봤기로서니, 설마 귀신이 되어 찾아오기라도 했겠나.”

탁무자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노승 역시 편안하게 웃었다.

잠시 후.

웃음을 터트렸던 탁무자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졌다.

“어떻게 된 일인가?”

노승이 저 멀리 서쪽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숭산의 어느 고즈넉한 동굴에서 좌선하고 있을 때와 달리, 주름진 눈은 그대로였지만 진물은 흐르지 않았다.

“승천하셨네.”

“뭐?”

“정확히는, 등선을 하신 건지 열반에 드신 건지 모르겠더군. 다만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벗어나 하늘에 이르렀음은 분명하네.”

“……!!”

“그러지 않고서야 이 몸을 갉아 먹고 있던 지옥기(地獄氣)가 어찌 씻은 듯 사라졌겠는가.”

탁무자가 입을 떡 벌렸다.

“등선을 하셨다고?”

“직접 보지 않아 모르겠네.”

“자세히 말해 보게!”

노승이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찾아오셨기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느닷없이 또 다른 황룡(黃龍)의 존재를 느꼈다고 하셨네.”

“……?!”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어. 다만 나는 그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어떠한 열망을 보았네. 그리고 그 열망 속에, 그분을 괴롭혀 왔던 답이 있음을 깨달았네.”

“그래서?”

“가셨지. 그리고 결과가 지금 이렇게 났네. 그 전에 제자를 키워 보시는 게 어떤가 하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쩌면 그 잠깐 사이에 진정 제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를 만나셨을지도 모르겠네.”

“얼마 전이었다면서?”

“자네는 직접 뵙지 못해 모르겠지만, 나는 그분의 능력이 가히 신인(神人)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아네.”

“…….”

“그분께서 원한다면, 반나절도 되지 않아 당신의 모든 것을 타인에게 전수해도 이상하지 않아.”

탁무자의 얼굴에 격동이 어렸다.

“제자를 남기고 가셨다고?”

“말했잖나. 정확히는 모른다네. 다만, 그분은 언제나 후사를 원하고 계셨네. 자신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만한, 선한 천품을 지닌 이를.”

“자네가 그리 말했지. 끝끝내 당신의 삶을 붙잡고 계셨던 이유가 마땅한 후사를 찾기 위함이라고.”

“그분 자신의 뜻이 아니고서야 뉘라서 그분을 이승에서 몰아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신옥이라는 물건은…….”

“깨졌다고 하셨네.”

“깨져?”

노승은 천인룡과 나누었던 당시의 대화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탁무자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신옥, 아니 혈옥이라고 한 그 물건은 마물이자 신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 쉽게 깨질 만한 물건이었다면 자네가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네. 나 역시 이렇게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해서 생각해 봤네. 신옥이 깨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노승이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밖에 없더군.”

“그게 무엇인가?”

“신옥, 아니 혈옥은 본디 이혼의 술수를 가능케 하고, 나아가 모든 능력을 뽑아내면 시간 역행까지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 마물에 담긴 힘이 다 쓰인 것이겠지.”

“……!”

탁무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땡중, 자네 말은 누군가가 그 신옥의 힘을 전부 끌어 썼다는 것인가?”

“누군가가 끌어다 쓴 것인지, 아니면 마물 스스로 힘을 쓴 건지는 모르겠네.”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세상에는 직접 보지 않아도 존재하는 영물이나 마물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신옥이란 물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규격 외야.”

“나 역시 처음 그분께서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그분이 삼백 년을 훌쩍 넘게 살아오셨다는 걸 믿기 힘들었지.”

신옥의 존재만큼이나 천인룡의 존재 역시 규격 외라는 뜻이다.

즉,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수히 많은 신비가 아직도 가득하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네. 무장 어른은 이승을 떠나셨어. 내 몸에 담긴 지옥기까지 몽땅 수거해서. 뭐, 수거한 건지 없애 버린 건지는 모르겠네만.”

“으음.”

탁무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흥분의 감정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그처럼 격동 가득한 감정을 느낀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하면, 이제 나도 세상일에 개입해도 된다는 뜻인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저 봉우리에 은거했던 이유는 지옥기의 다음 그릇으로 스스로를 가꾸기 위함이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음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욕심을 부리다가 상단전에 문제가 생겼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나아가 혈신에 홀린 통천진인의 존재를 깨닫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를 주시해 왔다.

적어도 은거했던 이유 두 가지 중 하나가 해결되었다는 것.

“통천진인은?”

“얼마 전 찾아와서 말 같지도 않은 거래를 제안하더군.”

탁무자 역시 통천진인과의 일을 노승에게 알려 주었다. 무림맹에 연락한 것까지 모두.

“으음.”

노승이 턱을 쓰다듬었다.

“무림맹에서 황궁으로 고수들을 파견했겠군.”

“그랬겠지.”

“통천진인이 신화교주를 죽여 달라고 했다. 그러면 자신이 죽어 주겠다고 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 거래였네. 아닌 말로, 그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일을 거래랍시고 들고 오겠는가.”

“즉, 자네가 생각하기에 통천진인은 오히려 자신의 죽음이 이득이 된다고 보는군.”

“그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건지, 삼교에 이득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네. 잡신에 홀려 버렸으니, 어쩌면 그자가 모시는 혈신이란 존재에게 이득이 될는지도 모르지. 정말 그런 존재가 있다면 말이네.”

“그럼 답은 간단하지 않은가.”

“답?”

노승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오랜만에 나들이 겸 신화교주나 잡으러 가 볼까?”

* * *

드넓은 대륙.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이들은 이 땅에 전쟁이 터지든 말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장이었다.

태어난 이후 줄곧 한마을에 사는 이들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한 채 안정을 택했고, 덕분에 자신들의 피를 이은 후대를 낳아 끊임없는 삶의 순환을 이어 갔다.

힘을 잃은 제국을 되살려 보겠다고 학문에 힘쓰는 문사들은 과거 영광의 국력을 위해 밤낮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관을 노리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농부, 장사꾼, 학자, 무인.

그 외에 자신이 선택한, 혹은 선택을 종용받고 살아가는 무수히 많은 사람은 널따란 대륙 각지에서 자신만의 삶을 영위해 갔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곳에는 또 다른 천하가 있었다.

기름진 대륙의 땅덩어리를 노리는 이들과 그들에 맞서 불철주야 천하를 돌아다니는 이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피와 죽음의 선율 위에서 함성을 질렀다.

침공하기 위해, 막아 내기 위해, 죽이기 위해, 살리기 위해 피땀 흘리는 이들.

비로소,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던 그들의 암전(暗戰)도 끝을 향해 나아갔다.

서로의 빈틈을 노려 가며, 혹은 예측해 가며 싸우는 것도 한계가 있는바.

서로 원하는 것이 분명한 이 상황에서, 물러날 수 없는 이들이 한계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전면전.

먼 훗날, 대삼교전의 시작을 알렸던 사건이 무엇이냐고 논쟁을 벌일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꼽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신화교주의 황궁 침습이었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다른 주장을 펼쳤다. 신화교주의 황궁 침습 속에서, 정확히 어떤 사건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되었는지를 따졌던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대삼교전의 진정한 시작은 바로 신화교 호교신장(護敎神將)의 황제 시해(皇帝弑害) 사건이었다.

* * *

늦은 밤.

홀로 용상에 앉아 어두운 대전을 바라보던 황제는 문득 태사의 우측 화로의 불이 기괴한 색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화르르륵!

청록빛으로 물든 화로 안의 불이 일순 크게 일렁이더니 삽시간에 어전 천장까지 치솟았다.

신비롭고도 기괴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으나 황제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깊어진 눈으로 화로를 바라볼 뿐.

거대하게 피어난 청록빛 불꽃이 점점 어떠한 형상으로 화했다.

그것은 사람의 상체였다. 굴곡진 근육과 무성한 수염, 긴 머리카락까지 선명하게 표현된 불꽃의 거인이었다.

황제는 말없이 불꽃을 바라보았다.

거인이 입이 열렸다.

“황제.”

놀랍도록 선명하고 근엄한 목소리였다.

황제가 턱을 괴며 물었다.

“누구신가.”

태연자약한 황제의 태도에 놀란 것일까.

거인은 잠시지간 말이 없었다.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짐은 그대가 누구냐 물었다.”

거인만큼 근엄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라도 오금이 저릴 만한 목소리와 존재감이 실로 무시무시했다.

거인이 입을 열었다.

“오만하기 그지없…….”

그때, 황제가 한옆에 놓인 술병을 화로에 던져 버렸다.

퍼석! 치이이이익!

순식간에 사라진 청록빛 불꽃.

화로 안이 식어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황제가 용상에 등을 묻었다.

“어디서 귀신 놀음 따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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