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5화. 깨달음이란 (5)
황궁으로 가는 길은 빨랐고, 엄숙했으며, 고요했다.
강호 최고 복마전으로 향하는 길. 그곳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하물며 서로가 한 번 본 적도 없는, 오래도록 서로를 증오했던 정파와 사파의 연합군이었으니 분위기가 잔뜩 날이 설 수밖에 없었다.
폭풍전야의 긴장감이랄까.
묵룡부의 무사들과 팽가의 패왕대원들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진군했다.
“다들 긴장한 것 같소.”
침묵을 깬 것은 선두에서 말을 몰던 연위였다.
연위의 말에 팽무강이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겠지. 아무래도 위험한 임무인 데다가…….”
팽무강이 힐끔 묵룡부의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양천이 끌고 온 무사들 대부분이 정예였다. 게다가 정파 무림인들과 불편한 동행을 하는 도중이니 자연스레 흩날리는 기도도 엄청나게 어두웠다.
패왕대원들 역시 특유의 패기 넘치는 기도가 파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긴장이 다소 과한 느낌이랄까. 돌멩이 하나만 떨어져도 즉각 대도를 뽑아 휘두를 것 같았다.
팽무강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놈들아.”
패왕대원들이 팽무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깨에 힘주고 가다간 칼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쓰러지겠다. 눈은 왜 그렇게 치켜떴어? 뭐가 불편하다고.”
팽무강은 좋은 수장임이 분명했다.
조금의 농담이 깃든 그의 말을 들은 대원들의 얼굴이 대번에 어색해졌다. 그러고는 잔뜩 굳었던 기도를 서서히 풀어 내기 시작했다.
팽무강이 콧방귀를 뀌었다.
“멀었다, 멀었어. 차라리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게 더 나아 보인다, 이놈들아.”
패왕대원들이 헛기침을 했다.
대원들을 보던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팽가주를 향한 대원들의 신뢰가 굉장하오.”
“신뢰는 개뿔. 뒤에서 덩치 크고 힘만 센 노친네라고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소.”
그때, 침묵하던 양천이 입을 열었다.
“무림에서 덩치 크고 힘이 센 건 칭찬 아니겠소.”
두 사람이 양천을 바라보았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게 팽가식 제왕학이오?”
팽무강이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왕학이라기엔 거창하고, 그냥 평생을 이렇게 살았습니다.”
“친구처럼 유연한 관계, 보기 좋소이다.”
정과 사를 대표하는 대장들이지만, 연위와 팽무강은 양천을 철저히 선배로 대했다.
공무랍시고 딱딱하게 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닌 말로 양천이 아니었다면 무림에 피곤한 일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더하여 휘하 무사들 간의 분위기 조율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사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양천은 자신보다 명성도, 무공도, 나이도 낮은 후배들이지만 그 위치를 존중해 주었다.
수장들끼리의 대화로 인해 무사들의 딱딱했던 분위기가 더 유연해졌다.
연위가 웃으며 물었다.
“미리 서신이라도 보냈어야 했는데, 여러모로 후배가 늦었습니다.”
“허허, 세상사 바쁜 일이 한두 가지겠소. 하물며 일가의 주인에다가 무림맹의 봉공이 아니시오. 혹여라도 마음에 두지는 마시오. 외려 건실한 자제를 제자랍시고 두게 되었으니 내 쪽에서 먼저 연락했어야 했소.”
연호정 때문일까, 아니면 연위의 위치 때문일까.
양천은 평소보다 훨씬 더 유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평소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파격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부드러움이었다.
연위 역시 양천이 자신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거친 아들 녀석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거칠긴 엄청 거친 녀석이외다. 다만 그 녀석 덕분에 내 목숨이 성할 수 있었으니 작게는 생명의 은인이오, 크게는 흑도 무림의 홍복이라 할 만하오. 귀하의 아들에게 큰 빚을 졌소이다.”
“성품이 좋은 아입니다. 다만 말투가 거칠고 일을 급진적으로 진행하는 버릇이 있어, 자칫 선배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가끔 볼기짝을 때려 주고 싶긴 하더군.”
연위가 민망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양천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녀석의 괴물 같은 재능이 어디에서 나왔나 했더니만 역시나 부친의 피에서 나온 모양이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오. 보아하니 그곳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지닌바 깨달음은 나보다도 더 높은 것 같소이다.”
팽무강이 놀란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깨달음에 어찌 우열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일파의 대종사도, 이제 막 무공을 배운 어린아이도 같은 깨달음을 얻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대가 생각하는 무도(武道)로구려.”
“세상 모든 깨달음이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양천이 빙긋 웃었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것. 정파 무공에 달통하셨소이다.”
“선배님께서는 달리 생각하십니까?”
연위는 순수하게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오히려 그의 그런 태도가 양천에게는 꽤 신선했다. 이 경지에 들어선 자들은 서로의 것을 공유하려 들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연위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무론을 주고받으려 했다.
단순히 자신에게 무언가를 받아 가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본래 성격이 그러한 듯싶었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나눔의 경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치를 내려놓은 연호정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파 무공과 달리 우리 무공은 더 빠르고 더 강한 위력을 추구하오. 하여 소위 깨달음이라는 것도 더 직관적이고 어느 정도 정형화된 단계라는 게 있소이다.”
“아!”
“한없이 자유롭기에 강하면서도 약한 것이 그대들이오. 또한, 바라보는 곳이 좁기에 오르는 것이 쉬우면서도 좀처럼 넓어지지 못하는 게 우리들이오.”
“……!”
“흑도와 백도, 정파와 사파는 제각기 많은 결함을 갖고 있소이다.”
독특한 시야였다.
적어도 연위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양천의 말은 연위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잠시 멍해진 연위의 얼굴. 양천이 피식 웃었다.
“몇 마디 평범한 말도 크게 받아들일 줄 아는 도량. 과연 판관검더러 중원 검맥의 자존심이라 하는 이유를 알겠소이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 연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들이 그 말을 들으면 웃을 것입니다.”
“남들 눈치나 보고 사는 사람은 아니라서 괜찮소이다.”
“어쨌거나 독특한 사상이로군요. 덕분에 크게 배웠습니다.”
“사람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가 출중하시오.”
양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놈들이라고 우리가 가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아직 조용하구려.”
팽무강의 눈이 깊어졌다.
“온다는 건 유추할 수 있어도 어느 정도의 병력이 치고 들어올지는 모를 겁니다. 병력의 질을 확인할 수 없으니, 차라리 힘을 모아 더 빠르게 황궁을 공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단한 안목이시오.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소.”
“아무래도 몇 번 놈들과 부딪쳤다 보니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속도를 올리는 게 낫지 않겠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팽무강이 연위를 힐끔거렸다.
“연가주가 조금 더 신중히 가자고 하는 바람에요.”
연위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양천이 물었다.
“연가주께서는 어찌 여유를 두고 계셨소?”
“중원 무림의 병력 일부가 황궁으로 간다…… 그것은 저들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팽가주 말마따나 저쪽은 병력을 분산하지 않고 황궁 그 자체를 노릴 확률이 높습니다.”
“화력 집중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긴 하오. 거리도 워낙 떨어졌으니까.”
“다행히 황제 폐하 곁에는 강호 최고수 중 하나가 있지요.”
양천의 눈이 반짝였다.
“귀군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이번 혼인 건까지 해서 오랜만에 봤었지. 과거보다 실력이 더 늘었더군. 하지만 상대가 신화교주라면…….”
“황궁은 그 자체로 전략적 요충지이자 거대한 미로입니다.”
“……?!”
“마음 같아서는 황궁까지 단숨에 날아가고 싶지만, 황궁 측에서도 나름대로 작전을 세워 두고 있을 것입니다.”
“작전이라니?”
연위가 품에서 작은 서신 하나를 꺼내 양천에게 건넸다.
“과거 황궁 사태로 인해, 황궁에는 무수히 많은 개방도가 모여 있습니다. 강북 무림과 가장 빠른 연결망을 구축해 놓은 상태지요.”
“……!!”
“황제 폐하의 안위가 걸려 있으니 영물에 준하는 전서응을 사용합니다. 평균 이틀, 빠르면 하루 반나절 만에 연락이 닿지요.”
양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팽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래도 우리가 빨리 가서 도와드리는 것이…….”
“한번 외인의 침습을 받은 황궁은, 강력한 독과 화탄을 사방에 비치해 두고 있소.”
“……?!”
“그 독과 화탄의 양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오. 특히 독탄의 경우, 한번 터지면 연쇄 폭발로 인해 황궁 전체가 맹독으로 둘러싸이게 되오.”
“허어!”
“독의 위력은 당가의 오대극독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소. 특히 폐하의 어전과 곳곳에 비치된 안가에는 당가의 무형지독(無形至毒)에도 크게 뒤지지 않는 극독이 비치되어 있다 하더이다.”
무형지독은 당가의 자존심으로, 한 줌으로 수천 명을 즉사시킬 수 있는 독액을 뭉쳐 만든 희대의 마물이었다.
당장 무극에 오른 절대고수도 무형지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공의 극치에 이르렀으니 어떻게든 뽑아내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무극의 고수가 움직이지 못하고 해독에만 힘쓰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물건이 무형지독이다.
“하지만 놈들은 기본적으로 열양공을 익히고 있소. 대개의 경우 독은 불과 상극이라, 전신으로 불을 뿜는 수준의 고수들이 들이닥치면 위력이 반감될 텐데.”
“화탄까지 막기는 힘들겠지.”
“……!!”
“거기에 광혼귀군까지 폐하 곁에 있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급하게 가느라 체력을 깎아 먹지 말고, 여유롭게 가며 최대한 힘을 온존해 두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오. 놈들이 황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우린 그때부터 달리면 되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것은 황궁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안위. 그렇다면 연가주 말마따나 우린 최대한 힘을 비축한 후, 곧장 폐하께 향하면 되는 것이로군.”
멍하니 연위를 보던 팽무강이 피식 웃었다.
“그 좋은 정보를 혼자 알고 계셨소? 덕분에 나만 속앓이를 했잖소?”
“말씀드리려 했는데 알아서 하시라며 눈 감고 잠부터 자려고 한 사람이 누구요?”
“쿨럭.”
“그리고.”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저 멀리 몇 개의 작은 산봉우리가 보였다.
“저기만 넘어가면 곧 하북이오. 황궁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그전까지는 흑백의 무사들끼리 서로를 도울 수 있도록 분위기를 잘 조율하는 것 또한 우리가 할 일이오.”
팽무강이 양천을 바라보았다.
양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연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양천이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나오면 어쩌나 하고 고민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본 양천은 도무지 흑도의 수장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잔잔하면서도 호쾌한 면모가 있어서 대화 상대로 부족함이 없었다.
연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놈아. 네 쪽은 잘되고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