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1화. 깨달음이란 (1)
등 뒤로는 구국의 영웅을 상징하는 고검(古劍)을 메고, 느슨하게 낀 팔짱 사이에는 굴강하기 그지없는 장검을 품었다.
덩그러니 놓인 바위 위에 서서 널따란 북쪽 평야를 바라보는 연위의 모습은 대나무 같기도, 한 자루의 검 같기도 했다.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고 흩날리는 검향(劍香)은 차가웠다.
하늘을 보며 세상을 느끼던 연위는,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그 계집은 본가를 칠대세가로 인정하지 않던데요.’
‘여물지 못한 아이의 철없는 발언일 뿐이다. 그것을 남궁세가 전체의 의지로 판단하는 것은,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며 득의양양한 것과 다를 게 무엇이냐?’
‘저는 남궁세가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면?’
‘중요한 건 그 상황이고, 누구에게 잘못이 있느냐입니다.’
‘본질을 직시하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느닷없이 변해 버린 장남이, 객잔에서 남궁세가의 자제를 박살 내고 돌아와 나누었던 대화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당시 연위는 몹시 놀랐다.
언젠가부터 열린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 둔 채 세상을 증오하며 자기 자신을 놔 버린 아이.
엄한 아버지 앞에서 말 한마디 쉽게 못 하던 그 아이가, 이름값 높은 안휘의 패자 남궁세가의 자제를 두들겨 패고 돌아와서는 당당하게 잘못이 없음을 피력했다.
변화는 그 전부터 있었지만, 유독 놀란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뭔가가 달라졌다.
그전부터 뭔가 이상했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연위는 장남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그 반항기 가득한 눈이라니.’
그날의 아들을 떠올리자 피식 미소가 새어 나왔다.
연호정은 떳떳했고,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동시에 아버지를 향한 애정 어린 반항도 있었다.
애증이 아니라 애정이다. 돌이켜보면, 장남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증오하거나 미워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다시 ‘되돌아온’ 이후에는 그러했다.
‘회귀라.’
연위는 또 한 번, 장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네가 기나긴 인생을 살다 돌아왔다는 것도, 기실 믿고 안 믿고를 따질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호정아.’
‘……예.’
‘고생 많았다.’
‘…….’
‘본가가 멸문하고 세상에 홀로 나가, 저 독한 흑도의 무뢰배들 속에서 이 악물고 버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 것이냐. 필경 이 애비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
‘네 기억 속의 나는, 도저히 부모라 부를 수 없는 천하의 망종이었을 것이다. 그런 애비를, 다시 과거로 돌아와 하나하나 이해해 주기란 정녕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연위의 눈이 흐려졌다.
그는 아들의 고백을 믿지 못했다.
가문이 멸문하고 세상에 나가 수십 년을 살다가 과거로 되돌아왔다니? 객잔에서 허구의 이야기를 팔아 먹고사는 매화자들도 말이 되냐며 혀를 찰 만한 얘기였다.
그토록 황당한 얘기였기에 아들도 오랫동안 그 말을 하지 못한 것이리라. 누구에게 털어놓아도 믿지 못할 이야기이니 차라리 홀로 묻고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위는 지독한 혐오감을 느꼈다.
아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자신 때문이었다.
설령 자신 때문이 아니라 한들, 그처럼 신비로운 비밀을 간직한 아들의 답답함을 몰라준 자신은 분명 아비다운 아비라 할 수 없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자신을 놀리는 거라 생각했다. 혹여 정쟁을 벌이는 모용군의 첩자를 교란할 생각으로 밑도 끝도 없는 농담을 던지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들은 진지했고, 동시에 불안해했다. 세상 모두가 배신해도 절대 배신하지 않을 든든한 방패가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할까 봐 떨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았다면 절대 그런 모습을 보여 줘선 안 되었다. 최소한 믿어 주는 척이라도 했어야 했다.
결국 아들의 진지한 눈빛과 마음을 들여다보며, 세상은 정녕 알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찬 곳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아들을 믿었다.
그리고 그때, 연위는 자신이 완성되었음을 느꼈다.
그 뒤로도 여러 실수를 반복했고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정체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지금의 자신을 존재하게 한 결정적인 분기점은 바로 그때였다.
‘이 녀석아.’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네 녀석 덕분에 이 애비가 쉬이 꿈꾸기 힘든 경지에 발을 디뎠다.’
연호정은 연지평과 달랐다.
연지평이 날아오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강호를 살아감에 있어 진정 제 몫을 하겠구나 하고 안심한 게 고작 몇 달 전이었다.
그래서일까? 연지평은 아직도 어린애 같았다. 혼인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이상하게 지평을 보면 어릴 적 뽀얀 피부에 커다란 눈을 끔뻑이던 그 시절만 떠올랐다.
하지만 연호정은 달랐다.
분명 자식이지만, 천하의 대소사를 주무르며 새외의 침공자를 맞아 고군분투하는 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믿음직스럽기 짝이 없었다.
연위는 자신이 연호정을 자식이자 친구처럼 여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당관이 자신의 등을 맡길 만한 친구라면, 연호정은 함께 나아가는 친구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더는 연호정의 과거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수십 년을 살다 돌아왔으면 어떻고, 그게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아들은 아들인 채로 완벽한 존재다. 세상 모든 부모에게 그럴 것이다.
연호정은 그 영역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이 믿고 의지하며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애비더러 쉬지 말라고 이 경지까지 끌어올려 주었으니 어찌 내 시간이 필요하다며 방만하게 굴 것이며, 어찌 천하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고 나 혼자 잘살겠다 배 두드리며 웃겠느냐.’
연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두운 밤, 반짝이는 별빛들이 유독 아름다웠다.
“누굴 그리 생각하시는 게요?”
“음?”
팽무강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마음에 드는 처자라도 생겼소? 새장가라도 가시게?”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정색하거나 난처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연위는 달랐다.
“좋은 혼처라도 있소?”
“헐! 연가주가 새로 장가를 든다고 하면 중원 천하의 어여쁜 여인들이 단체로 줄을 설 거요. 강동에서 화북까지 줄을 설지도 모르오.”
“허허, 농담이오.”
“나도 아오. 하지만 뭐, 혼자 사는 것보다는 함께 사는 게 좋지 않겠소? 늘그막에 외롭지도 않고. 강호에서 은퇴해 천하를 방랑하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그 생활, 나는 동경하오.”
팽무강은 한 번씩 이렇게 짓궂은 말을 한 후, 묘하게 마음에 남는 말을 덧붙여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곤 했다.
연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평생에 사랑한 여인은 죽으나 사나 한 명뿐이오.”
팽무강이 과하게 목을 움츠렸다. 팽무강식의 소름 돋는다는 표현이었다.
“영웅은 삼처사첩도 마다하지 않는다던데?”
“나는 영웅도 아닐뿐더러 그 말도 다 옛말이오.”
“옛말은 무슨. 우리처럼 칼날 위를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이세를 낳는 것보다 중한 일이 어디 있소?”
“그러니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데에 힘써야 하지 않겠소?”
팽무강이 피식 웃었다.
“이건 뭐 대화가 안 되시는구만.”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은 외롭고, 또 남들이 부러워지는 순간도 오겠지. 그러나 먼저 떠난 내 아내와 장성한 아들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노년을 잘 보낼 수 있을 것이오.”
“쩝, 그렇게 진지한 대답을 들으려고 던진 농담은 아닌데 말이오.”
“그러니까 내게서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오. 난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오.”
팽무강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더 건드리고 싶어지는데?”
연위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팽무강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부럽소이다. 두 아들이 어엿하게 장성한 것 말이오.”
“무슨 말씀을. 팽가주의 아들들도 잘 컸지 않소?”
“잘 컸다고? 그렇지, 잘 컸지. 몸뚱이는.”
“허허, 대호와 만호 두 아이 모두 성품이 좋고 호탕하여 훗날 강호의 큰 기둥이 될 인재들이오. 누가 봐도 그렇소이다.”
팽무강이 콧방귀를 뀌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소이다. 어째 작은애보다 큰애가 더 경망스러워졌소, 요즘은. 역시 사람은 작은애처럼 피똥 싸면서 굴러 봐야 철이 드는 법이오.”
다소 과격한 발언이었지만, 연위 역시 일부분 인정했다.
실제로 연호정도 세상에 나가 크게 성장했으며, 연지평 역시 안전한 가문을 떠나 의정군과 함께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보고 느껴야 나 자신의 인생도 되돌아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제 아들들은 제때 나가서 잘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본연의 성품은 어디 가지 않을 것이오. 사실 심리적인 압박감으로만 본다면야 만호가 어찌 대호만큼 되겠소이까.”
사람마다 느끼는 힘듦과 압박의 질은 전부 제각각인 법이다.
다만 농담처럼 하는 말에도 큰아들에 대한 걱정이 엿보이기에, 연위는 그렇게 말했다.
팽무강이 한숨을 쉬었다.
“하긴, 내가 그 나이일 때는 사고란 사고는 다 치면서 살았으니 나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말이오.”
자식이 나보다 나아도 걱정되는 게 부모다. 팽무강 역시 어쩔 수 없는 부모였다.
한숨을 푹푹 쉬던 팽무강이 돌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연가주는 새장가 갈 생각이 없는지 몰라도, 멀리서 오는 사람은 지금쯤 심장이 두근거려서 밥도 잘 넘어가지 않겠소이다.”
연위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투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러겠소?”
“어허? 남녀지사에 명성이고 무공이고 다 의미 없다는 거 알면서 그러시네.”
“궁금하시오?”
“궁금하고 말 것도 없소. 당연히 그러겠지, 뭘.”
“흐음.”
“……솔직히 궁금하긴 하오. 가슴 두근거려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서.”
“그럼 직접 물어봅시다.”
“음?”
그 순간, 팽무강은 잘 정돈한 머리카락이 일제히 곤두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연위와 팽무강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팽무강 옆에 도열해 있던 패왕대 역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남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다가오는 이들. 하나같이 말을 탔는데, 그 수가 물경 일천은 넘는 듯했다.
팽무강이 휘파람을 불었다.
“힘 좀 썼구만?”
“딱 적당한 숫자 같소.”
너무 많은 병력을 동원하면 황제의 의심을 살 것이요, 너무 적은 병력을 데리고 오면 성의 문제로 입방아에 오를 수 있다.
저런 걸 보면 단순히 무공만 강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일천 병력.
그 중앙에는 시커먼 전포를 입은 한 중년 사내가 있었다.
“워어.”
푸르륵.
말들이 요란하게 투레질을 하다가 이내 진정하고 멈춰 섰다.
익숙한 듯 말을 진정시키고 내린 사내가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순간 연위와 팽무강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떠올랐다.
특히 연위는 더더욱 긴장했다. 명목상으로나마 아들의 사부이기도 했지만, 상대의 진짜 힘을 팽무강보다 훨씬 더 잘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하다!’
아무런 기세도 뿜지 않는다. 심지어 존재감마저 한껏 죽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일천 개의 화탄을 품고 있다. 그 화탄들이 모두 폭발하면 일대가 지옥이 될 것이다.
깨달음 높은 연위조차도 감탄과 긴장을 하게 만드는 존재.
“반갑소. 나 묵룡부주 양천이오.”
황궁을 지키기 위해 손을 잡은 정사(正邪) 거물들의 만남,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인들의 눈빛을 달아오르게 했다.
대삼교전(對三敎戰)의 서막을 올릴 주역들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