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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48화 (948/963)

948화. 엉킨 실을 푸는 방법 (8)

장작불에 연신 부채질을 하던 연지평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황 단주님.”

“옆에 앉아도 되겠나?”

“물론이지요.”

황석태는 연지평이 소부주의 동생이라고 굳이 극진히 대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걸 원하지도 않을 것이며, 부주가 아닌 이상 모시는 사람이 높다 한들 가족에게까지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연지평 옆에 앉은 황석태가 불 위에 놓인 거대한 솥을 바라보았다.

“죽을 쑤고 있었구먼.”

“쌀이 좀 다르더군요. 물을 얼마나 잡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해서, 그냥 죽으로 만드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환자에게는 맨밥보다 죽이 낫지. 그나저나 용케 쌀을 구비해 놨군. 청해에서는 좀 다른 음식을 먹는 줄 알았는데.”

부채질을 멈춘 연지평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가 봅니다.”

가만히 연지평을 보던 황석태가 툭 던지듯 말했다.

“자네 아버지께서는 참으로 든든하시겠네.”

“예?”

“장남은 중원 천하가 인정하는 절대고수가 되었고 차남은 약관을 갓 넘긴 나이로 무종을 돌파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니, 가주님께서는 참으로 복도 많으시네.”

연지평이 얼굴을 붉혔다.

“형님은 그렇다지만,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소부주님과 비슷하군.”

“예?”

“소부주님도 본인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과소평가를 하시고는 했지.”

연지평의 얼굴에 쓴웃음이 맺혔다.

“형님께서도 그러셨군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흑도에서 자신을 낮춰야 할 때는 딱 두 가지 경우뿐이라네.”

“어떤 경우입니까?”

“상대가 자신보다 직급이 높거나 존경받아 마땅할 고수일 경우.”

“보통 그렇지요.”

“혹은, 만에 하나를 위해 내 실력을 감추고 싶은 경우.”

겸양이 아니라 철저한 생존을 위해서 나 스스로를 낮춘다는 것이었다.

적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적이 내 실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결정적인 순간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소부주님은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분이었지. 오히려 부주님께는 자신의 무력을 마음껏 드러내곤 하신다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

딱히 그런 의미로만 생각할 수는 없지만, 겉으로만 보면 충분히 그렇게 해석될 만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맞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철저한 원칙주의자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공평성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죄를 지었다면 약자라고 해서 사정 안 봐준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부주님께 마냥 고개 빳빳이 들고 있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란 말이지. 공적인 일 이외에 사적으로는 아무 의도도 없어 보여. 그런 점이 참 독특했었지.”

“그러셨군요.”

“한 번씩 소부주님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네. 저리 젊은 나이에 어찌 그런 괴물이 되었을까.”

“형님은 천재이십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연지평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황석태가 솥뚜껑을 들고 한옆에 놓인 커다란 주걱으로 죽을 저었다. 한창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이다.

“재능이야 말할 나위가 없지만, 사실 소부주님의 경지나 안목은 단순히 재능으로 치부할 만한 것이 아니라네.”

“…….”

“그냥 사람 자체가 다르다고, 다른 종(種)으로 태어난 모양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친근하지.”

“그렇지요.”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수백 년을 살다 온 무림의 절대고수가 젊은 육신으로 들어간 것만 같은 느낌이라네. 물론 말은 안 되지만.”

연지평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었든 세상에 그런 사람은 다시 없을 걸세. 그리고 자네를 이렇게 보니, 단순히 소부주님만이 아니라 연씨 일가 자체가 뛰어난 피를 잇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

연지평은 과찬이라거나 부끄럽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 괜히 자신 때문에 아버지나 형님의 명예가 실추될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대화 없이 죽을 만들었다.

잠시 후.

“다 되었군요.”

“그렇구먼.”

“제가 떠서 나르겠습니다.”

“아니, 우리 단원들을 시키겠네. 자네는 한 상 차려서 소부주님께 가 보게.”

“형님이 깨어나셨습니까?”

“이각 전에 정신을 차리셨네. 내가 괜히 이곳에 왔겠는가.”

연지평의 얼굴에 반가움이 일었다.

이틀이나 기절해 있던 연호정이 마침내 일어났단다.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죽을 들고 연호정의 임시 거처로 향한 연지평이 움찔했다.

“왔는가.”

연호정의 맥을 짚으며 연지평을 반겨 주는 사람은 당관이었다.

연호정이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연지평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괜한 걱정을 끼쳤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연지평은 그답지 않게 투덜거렸다.

“그거 죽이냐?”

“예.”

“너는?”

“저는 이것저것 주워 먹어서 괜찮아요.”

“가주님 건?”

“죄송합니다. 계신 줄 몰라서.”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것저것 주워 먹었다. 너나 빨리 먹고 기력을 되찾아라.”

연지평이 탁자에 죽 그릇을 놓았다.

연호정이 당관을 보며 말했다.

“그만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기력만 조금 쇠했을 뿐, 멀쩡합니다.”

“그래서 짚고 있는 거다.”

“예?”

당관이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너무 멀쩡하단 말이지.”

연호정이 뜨악한 눈으로 당관을 보았다.

“제가 멀쩡한 게 문제입니까?”

“문제지.”

비로소 연호정의 맥을 놓은 당관이 팔짱을 꼈다.

“막원 선배는 몰라도 나는 안다. 비록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어. 네 녀석이 본래의 기량을 한참이나 넘어선 힘으로 적을 무너트렸다는 걸.”

“무척 날카로워지셨습니다.”

“무극에 이르렀다 한들 사람의 몸뚱이를 뒤집어쓰고 사는 이상 진정 신(神)과 같은 능력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법이지. 너도 그렇다. 특히 무극에 이른 고수는 정신과 육신의 괴리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때문에, 자칫 정신이 이상해지거나 한계를 모르고 힘을 쓰다가 온몸이 박살 날 수도 있어.”

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너는 그렇지 않단 말이지. 분명 다친 흔적은 있는데, 너무 빨리 회복되었어. 며칠만 늦게 봤어도 그런 내상을 입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원래 제 몸이 독특합니다.”

“독특하다는 말로 넘기기에는 해도 해도 너무 멀쩡해.”

“아니면 제가 익힌 무공 때문이겠지요.”

당관이 피식 웃었다.

“뭔 마공이라도 익혔냐?”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지만, 연호정은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여하간 무극에 오르신 걸 축하드립니다. 가주님께서도 한계에 이르렀음을 보긴 했지만, 설마하니 이런 격전 중에 오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너도 그랬잖냐.”

“그래서 남들에게 하지 못하는 겁니다. 죽을 고비를 넘겨서 성장하라는 말 같은 거.”

당관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쉬어라. 이따 저녁에 또 들르지.”

“안 들르셔도 됩니다. 가주님께서도 쉬셔야지요.”

“난 너 같은 약골이 아니다. 한숨 자고 나니까 싹 낫더구만.”

“몸이 괜찮으시면 무공을 돌아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련하시겠어.”

당관이 방에서 나갔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일어나셔도 괜찮습니까?”

“괜찮다. 오히려 이틀 동안 푹 자서 그런지 힘이 남아도는구나.”

“아.”

“잘 먹겠다.”

“아, 예.”

연호정은 곧장 의자에 앉아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아 연호정을 보던 연지평이 한옆에 있던 물그릇을 건넸다.

“식혀서 드십시오. 아직 뜨겁습니다.”

“괜찮으냐?”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연지평은 그 말을 담담하게 받았다.

“물론 괜찮지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몸 말고. 서운한 건 좀 풀렸는가 해서 묻는 거다.”

연지평이 볼을 긁적였다.

“그때도 그렇게 서운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좀 답답했을 뿐이지요.”

“그랬겠지.”

“남들은 다 알고 있었던 걸 저는 여태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다른 법이다. 배운 것도 다르고 성품도 달라. 당연히 남들이 아는 걸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연호정이 죽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중요한 것은 배우기 위해, 깨우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예.”

“축하한다.”

무종을 넘어선 걸 말하는 것이다.

무인이 무종지벽을 넘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그야말로 경사 중의 경사였다. 하물며 연지평의 나이를 생각하면, 몇 날 며칠 잔치를 벌여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연호정의 축하는 담백했다.

그리고 연지평은, 그런 연호정의 모습에서 또 하나 배웠다.

‘형님에게 있어 무공은 목적임과 동시에 삶의 일부다.’

안 먹어 본 음식을 먹어 봤다고, 안 읽어 본 책을 비로소 읽었다고 잔치를 벌이는 사람은 없다.

연호정에게 무종의 돌파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예전에는 아니었을지라도 지금은 그렇다. 그래서 축하도 이렇게 담백한 것이다.

연지평은 그런 형의 태도가 대단해 보였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닳고 닳은 연마와 자기 수양을 거친 모습이기 때문에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이다.”

“예. 각오하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받아들일지, 가볍게 넘길지, 혹은 그 또한 재미라고 생각할지 등등 시련을 대하는 사람의 자세는 저마다 다르다.”

연호정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먹는 데에 열중했다.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연지평은 형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사람마다 어떠한 현상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르니, 너도 너만의 방식으로 시련을 받아들여 성장하라는 뜻이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연지평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체하겠다, 이놈아. 밥상머리에서 그런 뜨끈뜨끈한 말은 하지 마라.”

“언제, 어떤 순간이라도 진심을 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상대방 생각도 좀 해라.”

“받아 주실 걸 알기 때문에 드리는 겁니다.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물을 마셨다. 그새 죽을 다 먹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쉬고 있습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워낙 먼 여행이었으니까요.”

나아가 제때 쉬지도 못하고 생사결을 벌였다. 그럼에도 중경상을 입은 환자 몇 외에 사망자는 없으니, 그야말로 대단한 전과였다.

“천 공자는?”

“아, 천 공자는…….”

연지평이 한숨을 쉬었다.

“많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너도 이만 가서 쉬어라.”

“알겠습니다. 이따 저녁은 같이 드시지요.”

“그러자.”

연지평이 빈 죽 그릇을 들고 나갔다.

홀로 남은 연호정이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는 거친 산과 드넓은 평야가 보였다. 평야가 어찌나 길게 뻗어 있는지, 하늘과 땅의 구분이 쉽지 않았다.

‘추울 텐데 용케 이런 곳에 창을 냈군.’

말없이 세상을 둘러보던 연호정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웠지만 구름이 많지는 않았다. 참으로 묘한 하늘이었다.

‘언제나 끝이 나게 될까, 이 싸움은.’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조금은 더 쉴 생각인 것이다.

그때였다.

“……?!”

연호정은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황룡이 대번에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뭐지? 갑자기 왜?’

우우우우우!!

세상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오직 연호정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소리.

깜짝 놀란 연호정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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