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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45화 (945/963)

945화. 엉킨 실을 푸는 방법 (5)

“아, 거기에 놔 주세요.”

“알겠습니다, 각주님.”

기우희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휴.’

오늘도 관리할 약재가 산더미 같았다. 과연 무림맹은 무림맹인지라 달마다 들어오는 각종 약재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다행인 것은 기우희 개인의 소양을 끌어올려 줄 교보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소모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림맹의 자금력은 대단했고, 흐름 역시 활발했다. 나가고 들어오는 약재의 양이 어느 정도 일치하니, 너무 늦은 환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호한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니지. 다행이라고만 볼 수는 없지.’

기우희가 한숨을 쉬었다.

‘대체 어디서들 이렇게 다쳐서 오는 건지.’

무림맹에는 여러 개의 전투 부대가 있었다.

주로 활약하는 부대와 고수들의 활약이 워낙 인상적일 뿐, 수많은 맹원이 천하 각지로 뻗어 나가 무수히 많은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왔다.

개중에는 강호가 지속되는 한 절대 뿌리가 뽑히지 않을 산적과 수적 문제를 해결하러 간 부대도 있었고, 민심 안정 차원에서 보내는 부대도 있었으며, 각자에서 터진 문파 경쟁을 수습하거나 느닷없이 출몰한 마두(魔頭)들을 제거하기 위한 부대도 있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임무를 받고 출정했다 돌아오니, 환자가 끊일 날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맹주와 봉공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의선각의 의원, 의생들의 수가 아주 많다는 점이었다.

다만 그렇게 손이 많은데도 이리 바쁜 걸 보면, 확실히 강호 무림의 사건 사고는 보통이 아니었다.

“각주님, 다 되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이제 환자들 보는 것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각주님께서는 이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아니에요. 한 사람이라도 더 손을 보태야 모두가 빨리 쉴 수 있지요.”

“환자들 병세 살피다가 각주님이 병나겠습니다. 지금 사흘 동안 쪽잠 한 번을 안 주무셨잖습니까.”

기우희는 깜짝 놀랐다.

“사흘이요?”

“거 보십시오. 모르고 계셨지요? 한번 집중하면 시간의 흐름마저 잊으시니, 몇 번씩 봤는데도 놀랍습니다.”

“그렇군요. 벌써 사흘이나 지났군요.”

어쩐지 몸이 무겁다 했다. 눈도 뻑뻑했고, 팔다리에도 힘이 없었다.

의원이 웃으며 말했다.

“정 그러시면 한 시진만 쉬다 돌아오십시오. 각주님의 실력이야 천하제일이지만, 그리 피곤한 상태로 환자들을 대하다가는 그들이 불안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었다. 환자를 대할 때의 기우희는 미소 이외의 표정을 짓지 않았으며, 피곤한 모습을 보인 적 또한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말하지 않으면 절대 쉬지 않을 것이다. 제법 오랜 시간 그녀와 함께해 온 의원은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쉬게 하고 싶었다.

기우희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조금만 쉬다가 올게요.”

“며칠 동안 쉬셔도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기우희는 거처로 들어왔다.

“후우.”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기우희는 청동화로에 불을 밝혔다. 여름이지만 이곳 자체가 산자락인지라 해가 저물면 제법 서늘했다.

겉옷을 벗어 걸어 둔 기우희가 의자에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침상에 눕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하루를 꼬박 잘 것 같았다.

‘사흘이라니.’

기우희가 눈을 감았다.

‘점점 시간이 길어지네.’

어릴 적부터 하나에 집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그녀였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제대로 집중할 때면 어릴 적보다 훨씬 더 주변을 인식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집중한 대상에게 완전히 빠져들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도 하루를 꼬박 새운 것이 최대였는데, 이제는 사흘이 되도록 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있다.

‘정상이 아니야.’

그녀는 의원이었다. 자신의 이러한 상태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기우희는 편안히 몸을 이완시킨 후 정신을 집중했다. 이대로 자고 싶었지만, 머리를 한 번 비운 연후에 숙면을 취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침정입심(沈靜入深) 각인호(覺人呼) 선정개안(仙貞開眼) 일여공부언(一如空府堰)…….’

기우희가 외우는 구결은 바로 검선 탁무자가 그녀에게 가르쳐 준 원무치상법(元武治上法)이었다.

원무란 곧 원무신, 진무신(眞武神)을 뜻하며 그것은 무당산을 의미한다. 즉, 원무치상법이란 무당산신의 힘으로 상단전을 다스리는 법이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이름이지만, 공부의 난이도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기우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원무치상법을 외우며 자신의 상단전을 다스렸다.

실제로 원무치상법으로 상단전을 가다듬자, 예전보다 눈이 훨씬 더 밝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특히 예전과 달리 어떤 일이 발생해도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게 되었고, 다급한 순간에도 바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상단전을 가다듬으며 중단전까지 탄탄해진 것이다.

‘어르신께 큰 은혜를 받았어. 실제로 효과도 좋았지. 한데 왜 갑자기 사흘이나……?’

집중이 엄청나다고 사흘을 버티기는 힘들다. 그것은 정신력의 문제 이전에 몸의 문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다. 딱히 예전보다 내공이 늘거나 대단한 신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츠츠츠.

그녀의 정수리에서 은은한 아지랑이가 새어 나왔다. 사흘 동안 쌓이고 쌓인 두뇌의 피로가 빠르게 제거되고 있었다.

피로를 이렇게 인위적으로 뽑아내는 것 역시 의술에 있어선 좌도(左道)에 가깝다. 피로가 쌓였으면 풀릴 때까지 푹 자고 쉬며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 최고였다.

‘어쩔 수 없지.’

기우희는 탁기가 사라진 자신의 상단전을 살펴보았다.

‘아!’

기우희는 상당히 놀랐다.

상단전을 이렇게까지 제대로 살핀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그새 신기(神氣)를 가두고 있는 단전의 외벽이 예전보다 두껍고 탄탄해졌다.

처음 원무치상법을 배웠을 때와는 천지 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이 다 삭은 목판으로 대충 지은 집이었다면, 지금은 밀도 높은 돌을 깎아 두른 성벽과 같았다.

아직 끝을 보려면 멀었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성장했을 줄은 몰랐다. 기우희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정말 대단한 공부구나.’

몸이 튼튼하지 않으면 사흘 동안 집중할 수 없었겠지만, 상단전이 이 정도로 탄탄하다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기우희는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대단하지만, 오히려 좋지 않아. 몸과 정신의 균형이 크게 흐트러졌으니 앞으로는 나 역시 무공을 배우는 편이 좋겠구나.’

원무치상법의 상단 운기를 중지한 기우희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그때였다.

“……?!”

기우희의 동공이 일렁였다.

‘저건?’

제법 떨어져 있는 청동화로에서 누런 불씨가 일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불씨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색이었다. 누런 불씨는 점점 금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타오르는 화로의 불꽃까지도 물들였다.

화아악!

“헉!”

깜짝 놀란 기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르르르르륵!

점점 기세를 올리던 황금빛 불꽃이 한순간 천장에 이르도록 거대해졌다.

놀라운 것은 불꽃이 그리 커졌음에도 침구나 천장, 탁자와 의자에 불이 붙지 않는 것이었다.

불은커녕 검댕조차도 없었다. 황금빛 불꽃의 온도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낮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거대해진 황금 불꽃은 점차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두 줄기로 올라온 불꽃은 떡 벌어진 어깨를 이루었고, 타오르던 불씨는 자연스레 떨어지며 머리카락을 이루었다.

어깨와 머리, 상반신은 있되 양팔은 없었다. 하반신은 타오르는 불꽃으로 충분했다.

기우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거대해진 황금빛 불꽃, 그리고 장대한 체구의 사내.

“……오라버니.”

불꽃이 연신 타오르고 있었기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충 봐도 굉장히 선이 굵은 얼굴이었다. 중원인들이 홍모인이라 부르는 서역인의 외모였다.

“오라버니께서 어떻게 저를……?!”

불꽃이 입을 열었다.

실제 불꽃이 말을 하진 않았지만, 기우희는 그 불꽃의 의지를 소리로 인식할 수 있었다.

“잘 지냈느냐.”

“…….”

“어찌 말이 없느냐.”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불꽃의 거인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평안이라? 처음 듣는다, 그런 말은.”

“…….”

“어떠냐? 대륙에서의 삶은. 무식한 야만인들의 세상을 떠나고 싶진 않으냐?”

떨리는 눈으로 오라비를 보던 기우희의 표정이 이내 담담해졌다.

“어찌 저를 찾으셨나요.”

여유와 강단을 품은 목소리였다.

불꽃의 턱이 올라갔다.

“무도한 대륙의 원숭이 놈들과 어울리더니 예의까지 잊은 것이냐?”

“적어도 오라버니와 내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대화할 만한 사이는 아니라는 걸 기억할 뿐이지요.”

불꽃의 거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기우희가 서늘한 눈으로 불꽃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금화(金火)를 꺼 버릴 듯 차갑고 건조한 눈빛이었다.

거인이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볼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나는 지금 왜 나를 찾았느냐 묻고 있어요.”

“…….”

“내 개인 신상이 궁금했던 거라면 이만 사라져 주세요.”

“그럴 수는 없지.”

거인이 고개를 저었다.

“너를 찾기 위해, 그리고 화화술(化火術)을 쓰기 위해 한 말이 넘는 성화분(聖火粉)이 쓰였다.”

역시.

기우희는 오라비가 어떻게 자신을 찾았는지, 어떻게 신화교 최고위 술법을 써먹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교의 신물을 써 가면서까지 날 찾은 이유는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교로 돌아오너라.”

기우희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교를 떠났어요.”

“명령이다.”

기우희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그들은 명백한 남매지간이었다. 하지만 명령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과 그 단어에 지배받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배가 다른 자식. 피가 다른 자식.

신화교에 있어 자신은 어쩌다가 신이한 능력을 타고난 천한 핏줄에 불과했다.

“이만 가세요.”

“네가 교로 돌아온다면, 너를 새로운 성녀(聖女)로 세울 것이다.”

기우희는 깜짝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성녀라는 이름이 오라버니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가벼운 것이던가요?”

“언사를 주의하거라. 또 한 번 예의를 무시한다면 너를 결코…….”

“볼일은 이것으로 끝이겠지요?”

“…….”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일 생각이라면 더 이상 들어 줄 이유가 없군요. 이만 사라지세요. 그리고 두 번 다시 나를 찾지 마세요.”

기우희가 탁자 위에 놓인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 안에는 제법 많은 양의 물이 들어 있었다.

화화술을 썼다지만 아직 완벽하지 못했다. 기존의 청동화로를 끌 만한 양의 물만 뿌리면 화화술도 무효가 될 것이다.

그때, 거인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막아야 한다.”

“……?!”

“네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러니 교로 돌아오거라.”

기우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쪽 사정에 대해선 전혀 몰라요. 그러니 더는…….”

“아버지께서 황궁을 공격하려 하신다.”

“……!”

“우리는 아직 경거망동할 때가 아니야. 그러나 교내에 아버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너의 영력이라면 일시적으로나마 아버지를 막을 수 있다. 나머지 일은 우리가 처리할 터이니 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기우희의 얼굴에 엄기가 어렸다.

“제게 삼교는 적입니다.”

“……?!”

“훗날 만나게 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당신에게 칼을 겨눌 터이니 기대해 주시지요.”

기우희가 화로에 물을 부었다.

치이이익!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꽃이 확 사라지고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비로소 기우희의 얼굴에 초조함이 일었다.

‘황궁이라고?’

그녀가 몸을 돌렸다.

‘맹주님께 알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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