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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44화 (944/963)

944화. 엉킨 실을 푸는 방법 (4)

후우우웅.

선기가 꿈틀거렸다.

안개처럼 흐르는 선기는 끊임없이 통천진인의 몸을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통천진인은 선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자신이 품은 마기(魔氣)가 육신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는 명확했다.

스스로 궁구하여 얻은 마기가 아닌 바에야, 제아무리 막강한 힘이라도 이 무시무시한 선기 속에서 멀쩡할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체내에 드리워진 마기가 쪼그라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고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가만히 통천진인의 눈을 바라보던 탁무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나야말로 이해할 수 없소이다. 그만한 힘을 지니고도 고작 나 같은 쭉정이 하나 때문에 이 텁텁한 곳에 갇혀 지내다니.”

“자네가 귀신에게 홀리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다네.”

“그런 내가 이제 사라져 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이오?”

우우우웅.

탁무자의 동공이 하얗게 빛났다. 선도 무학의 최고봉, 무당파의 진산비기 중 하나인 태극선법(太極仙法)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극에 이른 반선의 깨달음으로도, 태극선법의 신기(神氣)로도 통천진인의 진의를 알기 어려웠다.

차라리 대화를 통해 알아보는 것이 훨씬 더 빠를 것 같았다. 비록 마도에 빠졌다고는 하나, 통천진인의 상단전은 탁무자 자신에 비해도 한 치의 모자람이 없었다.

오히려 구멍이 뚫려 버린 자신의 상단전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철옹성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한 정신력을 갖고도 타락하다니, 타고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자의 말로구나.’

탁무자가 입을 열었다.

“신화교주를 잡아 달라?”

“잡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네들이 어떤 경로로 오는지, 어느 정도의 전력을 퍼부을지, 그네들의 무공 특성은 어떠한지 전부 알려 준다면 말이오.”

“설마하니,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했나?”

통천진인이 큭큭 웃었다.

“내 목숨을 내놓겠다는데 그마저도 믿기 힘들다면…….”

“자네 목숨이 뭐라고?”

“……?”

“고작 자네 하나가 뭐라고 내가 그걸 따라 줘야 하지?”

통천진인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검으로 신선의 경지를 구축했다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구려.”

“스스로 마도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그것에 현혹되어 천리(天理)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자의 허언은 어떻고?”

“…….”

“그런 걸 보면 애초에 천기를 읽은 자네의 행위 자체가 역천이긴 했던 모양일세. 하기야 한낱 인간의 신분으로 감히 운명의 흐름을 보고 발설했으니, 자네의 끝이 이 모양이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네.”

탁무자답지 않게 신랄한 어휘였다.

이런 말을 뱉는 탁무자의 마음 역시 편치는 않았다. 그러나 역천의 화신과도 같은 도사 앞에서 나다운 것만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하여 상대의 존재 자체가 이런 언행을 유발하였으니, 실로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듯했다.

“당신과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소. 재미있구려.”

“나는 몹시 재미가 없다네.”

“어쨌든, 나의 목숨과 신화교주의 목숨을 함께 묻어 달라는 제의는 거절하시는 거요?”

탁무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떠나서, 자네가 왜 신화교주를 죽이려 하는지가 의아하네.”

“…….”

“신화교주의 무공이 최소한 사음교주와 동수라고 한다면, 자네들은 일인 군단 하나를 그냥 무너트리겠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사람마다 사정은 있는 법이오.”

“사람이라면 말이지.”

“…….”

“신화교주만 죽게 된다면야 그럴 수 있겠지. 그러나 신화교주가 죽게 되면 그 범인을 찾고자 교도들이 발광할 테고, 자연스레 나를 찾아내겠지.”

“설마 그들이 무서운 게요?”

“무섭다마다. 심지어 아무 죄도 없는 본산의 도동(道童)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으니, 아니 신중할 수가 없지.”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일 줄은 몰랐소.”

“자네가 모르는 것이 어디 그것뿐이겠나. 하늘만 볼 줄 알지 사람은 볼 줄 모르는 건 타락하기 전에도 똑같았어.”

통천진인이 움찔했다. 탁무자의 이 발언에 강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츠츠츠.

통천진인의 몸에서 은은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순간 탁무자의 두 눈에 무시무시한 정광이 번뜩였다.

“감히!!”

쩌어어어엉!

탁무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일갈이 무시무시한 폭풍이 되어 통천진인의 몸을 휩쓸었다.

그의 몸은 멀쩡했지만,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마기는 탁무자의 대성 일갈에 모조리 흩어져 날아가 버렸다. 날아간 마기는 봉우리 전체를 휘감은 선기로 인해 순식간에 정화되어 밖으로 흘러 나갔다.

우우우우웅!

신광을 뿜는 탁무자의 눈동자.

도를 좇는 도사의 신분이라고는 하나, 그의 모습은 지옥의 악귀들을 짓밟는 불가의 명왕(明王)과도 같았다.

통천진인의 몸이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제아무리 그가 뛰어난 술사요, 절대의 마기를 품에 안은 고수라지만, 한 자루 검으로 전설을 만든 검선의 기파 앞에서 멀쩡할 수는 없었다.

탁무자가 담담해진 얼굴로 말했다.

“말씀해 보시게. 내가 신화교주를 없애 버리면 자네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지.”

“내가 죽는데 무슨 이득이 있겠소? 다만 내가 모시는 신과 그 신도들…….”

“본산에는 많은 비술이 있다네. 그 비술 중 하나를 설명하자면, 이 풍성하기 그지없는 봉우리의 선기를 떼어 마에 물든 혼을 영영 지워 버리는 것이지.”

“……!”

“불가식으로 말하자면 육도 윤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물론 부처나 아귀조차도 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야. 존재의 소멸, 영육의 완전한 죽음이라고나 할까?”

통천진인의 눈이 깊어졌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내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자네가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게.”

“설령 그게 진실이라도, 당신은 그 비술을 펼칠 수 없소이다. 한 영령(靈靈)을 완전하게 소멸시킨다는 것 자체가 역천이니까.”

“그러니 나도 목숨을 걸고 있지 않은가?”

“……?!”

“설마하니 내가 아무 대비도 없이 자네를 이곳에 오르도록 허가했다고 생각하는가?”

“……!!”

“자네와의 싸움은 무공의 대결이 될 수가 없지. 결국은 혼의 대결이요, 술력의 싸움이거늘 자네처럼 독하게 타락한 자를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면 다 늙은 목숨 하나가 아까울까.”

탁무자의 여유로움은 변하지 않았다.

탁무자가 통천진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 힘든 것처럼, 통천진인 역시 탁무자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싸움은 평범한 대화일 수밖에 없었다. 속고 속이는 대화, 창칼을 뽑아 든 싸움보다도 훨씬 더 첨예할 수도, 말도 안 되게 쉬울 수도 있는 싸움.

통천진인의 볼이 꿈틀거렸다.

“만인의 존경을 받는 검선께서 나 하나 잡자고 돌아가셔야 쓰겠소? 고작 나 하나 따위에 목숨을 거시겠다?”

“고작 자네 하나지만, 자네 하나 때문에 신음할 천하를 생각하면 아쉬울 거 하나 없네.”

“그대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구려. 진심으로 믿고 싶어질 정도로 거짓말을 잘하는 것 같소.”

탁무자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온화한 그 미소는 도사보다 부처를 닮아 보였다.

가만히 탁무자를 보던 통천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속아 드리겠소.”

순간 탁무자의 눈이 반짝였다.

‘속았군.’

처음으로 통천진인의 거짓을 포착한 그였다. 그만큼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통천진인이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기괴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신화교주는 혈신의 교리를 벗어났소이다.”

“혈신의 교리가 무엇이기에?”

“그것까지는 알려 하지 마시오. 다만 확실한 것은, 신화교주가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변했다는 것이지.”

사실인가, 거짓인가.

탁무자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저 발언만큼은 사실일 것이다.

“고작 그런 이유 하나로 그만한 전력을 없애 버린단 말인가?”

“고작이 아니지. 더군다나 신화교주 역시 우리가 자신을 마뜩잖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함께할 때는 전력이지만, 멀어지면 위협이 아니겠소이까?”

탁무자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자네의 제안을 따를 수 없지. 자네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를 우리가 왜 없애 버리겠는가.”

“그를 죽이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을 것이고, 내가 죽지 않으면 가장 먼저 무당산을 공략할 것이기 때문이오.”

탁무자의 눈이 깊어졌다.

“그냥 이 자리에서 내가 자네를 죽여도 되는데 말일세.”

“그대는 내가 바보라서 이 자리에 맨몸으로 왔다고 생각하시오?”

탁무자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그였다.

“당신 손에 죽게 된다면 내 몸에 깃든 마기가 새로운 숙주를 찾아 날아갈 것이오. 그리고 그 숙주는 필시 가까이 있는 누군가가 되겠지.”

탁무자를 보던 통천진인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숲이 하나 있구려. 당신의 사형제들이오?”

“그렇다네.”

탁무자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통천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하나 당신에 이르지 못하였군. 혈신의 마혼(魔魂)이라면 반 각이 지나기 전에 물들일 수 있겠소.”

“그간 뭘 들었나? 자네의 영육을 없애 버릴 비술을 갖고 있다 했거늘.”

“그게 진실이라 하더라도 역천임은 부정할 수 없는바. 괜히 같은 마(魔)가 되려 하지 마시고 적당한 선에서 교섭하는 것이 어떻소이까?”

서로가 원하는 바를 깨끗하게 이루고 가자는 뜻이었다.

탁무자가 고개를 저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네.”

“…….”

“자네 영육을 흩어 버리는 거야 내 결심 빼고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천하에는 나 아니어도 불철주야 평화에 이바지하는 이가 많으니, 자네와 나는 무저갱에 이르도록 서로를 견제해 보도록 하세.”

통천진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진정 끝을 보자는 것이오?”

“누가 먼저 시작한 승부인가? 협상은 결렬되었네.”

“답답하지도 않은……!”

“내 진정.”

후욱!

통천진인의 가무잡잡한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탁무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혼원기는 옥청의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한번 기세를 드러내는 순간 통천진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전력을 다하는 것이 아닌데도 술력이 하늘에 닿았다는 통천진인의 육신과 마기까지 봉쇄해 버리는 절대자의 능력이었다.

“이 자리에서 네놈의 영과 육을 흩어 내 먼지만도 못한 존재로 만들어 줘야 성이 차겠느냐?”

“……!”

“마지막으로 말한다. 협상은 결렬이니, 네놈에게 어울리는 절벽으로 가서 풀이나마 뜯어 먹으며 살고 있거라. 모든 전쟁이 끝난 후 쪼그라든 마혼을 지상에서 소멸시켜 주겠노라.”

무시무시한 압박감이었다. 연호정이나 사제들에게 보여 주던 모습을 생각하면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위엄이었다.

부르르 떨리는 눈으로 탁무자를 노려보던 통천진인이 이내 피식 웃었다.

“좋은 선물만 드리고 가는구려.”

신화교주를 마뜩잖게 생각한다는 정보를 말함이었다.

“이 봉우리는 삼풍진인께서 말년에 깨달은 모든 지혜와 선기를 담아 놓은 무당 제일의 봉우리니라. 신성한 곳에 왔으니 입장료라고 생각해 두거라.”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입장료외다. 천하 흐름의 향방을 바꿀 수도 있을 정보이거늘.”

“거짓말은 그쯤 하면 되었느니라. 협상 결렬의 수를 생각해 두지 않았을 리 없을 터.”

“…….”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우리 둘 중 하나는 이승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야.”

통천진인의 몸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봉우리에서 사라져 가며, 통천진인이 말했다.

“당신과 나는 앞으로 절대 만나는 일이 없을 것이오.”

훅!

그렇게 통천진인이 사라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술법이었다.

탁무자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밤하늘은 여전했다.

“……이보게, 땡중. 조만간 나누기로 한 업(業)을 자네에게 다 맡기게 될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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