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2화. 엉킨 실을 푸는 방법 (2)
툭.
손가락 하나가 떨어졌다.
수백 개의 암기로 육신 전체가 갈려 나간 야혁은 그 자리에서 소멸했다. 정확히 검지 하나만 남기고.
심지어 그 검지도 서서히 가루가 되어 흩날리니, 비로소 지독한 생명력을 지닌 야혁의 죽음이 실감 났다.
“쿨럭!”
당관의 입에서 시뻘건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툭.
다리에 힘이 빠졌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당관은 머리가 핑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기분은 좋았다. 단순히 좋은 걸 넘어, 뚜렷한 성취감과 보람을 느꼈다.
‘이것이…….’
당관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부르르 떨리는 손. 이게 정말 제 손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정갈했다.
내공을 운용하지 않아도 은은한 녹색 기운이 맺혀 있던 손가락이 건강한 사람 특유의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독공을 배우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것이 무극이로구나.’
보는 것은 손이되, 그의 오감은 자신의 심신(心身)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달랐다.
오르기 전에는 대체 어떤 세상인지, 어떻게 그곳으로 올라야 하는지 막막하기 그지없었는데 막상 오르고 보니…….
‘천운이로구나.’
자신이 어떻게 이 경지에 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올랐던 방법은 기억나지만, 하필 그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무극의 경지에 오르는 건 개인의 재능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은 물론 하늘의 계시를 받아야 일 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이해가 갔다.
‘나는 무극에 오를 만반의 준비가 되었지만, 오를 때는 되지 않았었다.’
당관이 주먹을 쥐었다.
하늘의 부름이 필요한 경지라고는 하나, 그 천운을 부른 것은 개인의 의지다.
그는 자신의 어떤 의지가 천운을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어떠한 잡념도 없이, 순수하기 그지없는 의지만으로 천운을 불렀다. 설마하니 자신이 그런 마음을 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괜찮은 것이오?”
당관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곳에는 묵비의 부축을 받고 온 막원이 있었다.
막원이 미소를 지었다.
“축하하오. 설마하니 이런 상황, 이런 순간에 무한의 경지로 올라설 줄이야.”
당관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몸은 어떻소?”
“움직이기가 힘들군. 놈의 마기가 너무 악랄해서 말이오. 그래도 죽지는 않을 것 같소.”
“다행이오.”
죽지만 않으면 된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조심스레 막원을 편하게 앉힌 묵비가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당관이 쓰게 웃었다.
“축하는 무슨.”
무극에 올랐지만, 그렇다고 타고난 천품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진정한 내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당관은 그저 당관일 뿐, 뭔가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은 아니었다.
후우웅.
당관의 몸을 반투명하게 에워싸고 있던 검붉은 진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힘들구나.’
무극에 오르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지만, 누구든 그 경지에 진입하는 순간 육체와 내공이 완전하게 뒤바뀐다. 당연히 소모되었던 내공이 완벽하게 되돌아오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당관은 달랐다.
‘과했다.’
만류귀원신공으로 극단적인 상단신기를 뽑아 써서 야혁을 소멸시켰다.
처음이라 힘 조절이 되지 않았다. 자연스레 차올랐던 내공으로 만류귀원진기를 채우려다 보니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잠시…… 쉬어야겠어.”
정신력으로 어떻게 해 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무리하게 움직이다가는 애써 창안한 만류귀원신공이 폭주를 일으킬 것이다.
웃으며 당관을 보던 막원은 문득 드는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그나저나 연제는?”
“아!”
묵비가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괜찮을 걸세.”
작고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 모두가 혁련휘의 말을 들었다.
혁련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악의(惡意)가 몽땅 사라졌어. 적의 수괴가 죽었다는 뜻이라네.”
“아…….”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앉아 있던 막원은 애써 일어나 비틀거리며 혁련휘 앞으로 다가갔다.
혁련휘의 눈은 투명하기만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막원이 고개를 숙였다.
“강호의 선배를 이렇게 뵙소. 막원이라는 무부외다.”
“백병신군 막원.”
“그렇소.”
“그래, 과연 대단하군. 무뎌진 오감으로도 자네의 생생한 기운을 느낄 수 있어. 그 연배에 그만한 경지라, 몇 년 뒤에는 제왕들도 넘볼 수 있을 것 같네.”
“과찬이시오.”
옥청이 입을 열었다.
“혁련 림주님. 잠시 쉬시지요. 제가 천 공자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네.”
막원이 고개를 돌려 후방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삼백의 기마와 몇몇 고수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싸움은 끝났어.”
잠시 후.
한차례 주위를 둘러본 것만으로도 전투의 양상을 꿰뚫어 본 황석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자네도.”
“그리고…….”
황석태가 웃으며 당관을 바라보았다.
“축하하오.”
당관이 손을 내저었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입을 열 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 또 한 명의 절대고수가 탄생한 시점이었다.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고 모두가 경탄해야 마땅한 순간이지만, 당관을 향한 존경과 축하는 엄숙하게 이뤄졌다.
그를 위해 함성을 지르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싸움이었던 까닭이다.
황석태의 명령을 받은 철기단은 주변을 수색함과 동시에 넓은 범위로 퍼져 호법을 섰다. 혹시 모를 위험을 예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림주님.”
천효락과 화향이 혁련휘 앞으로 다가왔다.
털썩 무릎을 꿇은 천효락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가득했다. 언제나 엄했던 아버지였지만, 이리도 비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는가.
그래도 천효락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남들을 대할 때는 가면을 쓴 것처럼 자유자재의 변화를 보여 주지만, 정작 진심을 드러낼 때는 딱딱하기만 했다.
그리고 혁련휘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들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천효락이 얼굴 없는 이가 된 것은 전적으로 신마림에서의 생활 때문이었다. 혁련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
두 사람은 잠시지간 말이 없었다.
독한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혁련휘였다.
“시린 겨울날이었다.”
“……?”
“날은 그리도 추웠는데 네 몸에서는 생명력 가득한 열이 펄펄 났더랬다. 그것은 단순한 체온이 아니었어. 탯줄을 달고 있던 너의 몸에서는 태양이 숨 쉬고 있었다.”
천효락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혁련휘의 담담한 목소리에선 이전과 달리 힘이 느껴졌다.
“동이 터 오는 새벽이었지. 네 몸에서는 허연 연기가 났다. 너는 새로운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울었지만, 나는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과 거대한 기쁨을 느꼈다.”
“…….”
“네가 태어남과 동시에, 나는 이 세상에 진정 태양이 있음을 알았다.”
“림주님.”
“평생을 울부짖으며 살아왔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이 신마림의 역사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만 살아온 인생이었다.”
“…….”
“네가 태어난 그 순간, 나는 나 스스로 짊어진 숙명의 짐을 벗어 버리고 싶었다. 한 번도 아내라고 불러 준 적 없던 삼생의 처와 널 데리고 따스한 남쪽으로 내려가 평생토록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천효락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혁련휘는 한 번도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타인이 들여다보는 순간 위정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고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스스로 더더욱 엄격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애초에 안전이 보장되지도 않았지만, 다섯 선조가 일군 신마의 숲은 태산보다도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그러나 적어도, 너와 네 동생이 태어나고 몇 년 동안은 음울하고 칙칙했던 내 인생이 그렇게나 좋을 수 없었다. 너희는 내가 신마림주라는 이름의 무게를 버틸 수 있게 해 준 보물이었다.”
일순 혁련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최소한의 마기로 육신을 이승에 잡아 두고 있었지만, 점차 한계를 맞이한 것이다.
천효락이 다급하게 말했다.
“림주님. 그만 말씀하십시오. 더는…….”
“나는 죄인이다.”
“림주님.”
“너희와의 행복한 삶을 떠올릴수록 나의 고뇌는 깊어져만 갔다. 그 정점은 네 어미가 죽을 때였다. 하늘에 이른 무력으로도, 산더미와 같은 재산으로도 고칠 수 없는 중병을 앓다가 죽어 갈 때, 나는 내 안에 무언가가 완전히 부서졌음을 알았다.”
“…….”
“천씨 일가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고 믿었어. 결국 이 저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바에야 내 자식들이라도 행복하게 살게 해 주고 싶었다.”
“…….”
“그러나 성마에 올랐던 나는 알 수 있었다. 마(魔)가 지닌 본연의 힘이 저 어디선가 힘을 키우고 있음을. 그것은 무공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직감에 가까웠지만, 나는 그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천효락이 혁련휘의 손을 잡았다.
혁련휘의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천효락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너희를 품고 신마를 운용하기에는 내 어깨에 드리워진 목숨이 너무도 많았기에 제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렇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스러지게 되었구나.”
눈물을 뚝뚝 흘리던 천효락이 입을 열었다.
“아버…….”
“그러지 마라.”
“……!”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나는 네게 아비라 불릴 자격이 없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천효락을 위해서 그리 말한 것이다.
혁련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다운 삶을 살았다. 후회 많은 삶이었지만, 너희 덕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저승길 선물로는 과하기까지 해.”
“…….”
“네 동생은…… 광혈로 가고 있다. 저 어디인가로, 본림의 무사들과 함께 이동 중이다. 아마 지금 당장은 잡을 수 없을 것이다.”
“……!”
“최선을 다해 네 동생을 구해라. 중왕마공이 십단공에 오르면 너의 육신에 걸쳐진 모든 제약이 벗겨질 것이다. 바로 그때, 파천결을 익히면 된다.”
스스스.
혁련휘의 다리가 조금씩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천효락의 눈물이 혁련휘의 팔뚝으로 떨어졌다. 그 눈물에 닿은 팔뚝이 물에 젖은 모래처럼 허물어졌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더는 신마의 이름에 연연치 말고 너만의…….”
혁련휘는 말을 잇지 못했다.
푸스스스.
온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 혁련휘는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허공으로 사라졌다.
천효락은 말없이 흐느꼈다.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건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뱉은 말이 아닐 것이다. 더는 신마의 이름에 지배받지 않도록, 오롯한 나 자신의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일 것이다.
마지막 가는 그 순간까지도 아버지는 자신의 미래를 걱정해 주었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천효락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흩날리던 가루가 어두운 청해의 하늘을 빙글빙글 돌다가, 비로소 달빛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