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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38화 (938/963)

938화. 진실 (5)

“허억! 허억!”

당관이 무릎을 꿇었다.

단언컨대 지금껏 어떤 싸움에서도 이렇게까지 진력을 소모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가주가 되기 위한 시험에서도 이렇지는 않았다. 물론 그때는 무공보다 심력 소모가 훨씬 더 심했다.

지금은 둘 다였다. 심신 모두가 극도로 지쳐 버렸다.

‘그래도 잡았다.’

가지고 있는 모든 암기를 쏟아부었다. 그 암기의 폭풍에 직격당한 야혁의 등판은 그야말로 벌집이 되어 있었다.

사실은 저 정도로 끝나선 안 되었다. 아예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려 나갔어야 정상이었다.

그만큼 적의 육신이 단단하다는 방증이었다. 다행히 이번 일격은 제대로 통했는지, 쓰러진 적에게서 이전의 초월적인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털썩!

당관이 그 자리에 허물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가주님!”

묵비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숨을 몰아쉰 당관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호흡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으니 내공도 뚝뚝 끊어지고 머리는 핑 돌았다.

옥청이 긴장한 눈으로 야혁을 바라보았다.

‘끝났나?’

벌집이 된 야혁의 몸에서는 여전히 불길한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이제 갓 내공을 익힌 어린아이 수준의 내공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 있어.’

우우웅!

당관과 묵비가 고개를 돌렸다. 옥청의 검에서 혼원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옥청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대로 끝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도사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야수 같은 마인이 얼마나 지독한 적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당관이 헐떡이며 말했다.

“묵비. 자네는 막원 선배를 모셔 오게. 심상치 않은 공격을 받았어.”

“괜찮으시겠어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이런 순간에도 가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것 같아서 묵비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렇게 묵비가 멀찍이 떨어진 막원에게 향하고, 옥청은 야혁에게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쿨럭!”

야혁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혁련휘가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했다.

옥청의 눈이 흔들렸다.

노인의 양팔은 이리저리 뒤틀려 부러졌고, 왼쪽 다리도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전신에서 불안정한 마기가 일렁거리는데, 다른 마인들과 달리 그 마기에서 진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거기 누구인가.”

혁련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힘을 다 써 버린 당관의 목소리와는 또 달랐다.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 특유의 혼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을 보던 옥청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당의 옥청이라 합니다.”

“무당…… 무당산이라…….”

무당산이라고 하면 그때 땡중이 말했던 한 사람만이 떠올랐다.

검선 탁무자.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 망할 놈의 땡중이 그 자신보다 훨씬 더 드높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으니 지금쯤 등선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게 저물어 가는 거지.’

혁련휘는 여한이 없었다.

비록 말년에 대제자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그 제자를 제 손으로 직접 죽이는 비극을 맞았지만, 그 또한 삶의 일부인 바. 잠깐의 후회는 있지만, 되돌아가고 싶을 정도의 아쉬움은 아니었다.

우웅.

꺼질 듯 말 듯한 마기가 구슬프게 울었다. 이러고도 죽지 않는 걸 보면 자신도 꽤 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괜찮아. 죽어도…….’

그때, 옥청의 입이 열렸다.

“혁련 림주님, 맞습니까?”

확인차 한 번 더 물어보는 것이었다.

혁련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힘도 없었고, 그럴 정신도 아니었다.

옥청이 말을 이었다.

“저희는 무림맹에서 왔습니다. 천효락 공자도 저 뒤에 있습니다.”

왜인지 모르겠다. 그는 이 말을, 쓰러진 이 노인에게 꼭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흐려졌던 혁련휘의 눈이 서서히 빛을 되찾았다.

여한 없는 삶이라 생각했으나, 근처에 자식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또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이렇게 간사한 것이다.

“효락이는 괜찮은가.”

힘없는 목소리에 깃든 진한 정.

옥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친 데 없이 잘 있습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이왕지사 이 꼴을 하고도 죽지 않았으니, 죽기 전에 자식 얼굴 한 번은 보고 싶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최소한의 마기를 제외한 나머지 마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마기였다. 그의 마기는 끊임없이 오장육부와 근골, 신경을 공격하며 돌이킬 수 없는 염증(炎症)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히려 생명이 유지될 만큼의 마기만 남기고 싹 뽑아 날려 버리니, 죽음으로 가는 길이 확연하게 느려졌다.

대신 고통스러웠다.

마기란 그를 살리는 동시에 죽이는 기운이었다. 단단하게 옹이 진 최소의 기운만 남기고 나머지는 흩뿌리니, 근골부터 내장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옥청은 혁련휘의 상태를 훤히 알 수 있었다. 혼원기 덕분이었다.

안타까움에 그를 편한 자리로 옮기려던 순간.

“조심……!”

힘없는 혁련휘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깃들었다.

“예?”

“놈이, 자네의 기운 때문에……!”

순간 깜짝 놀란 옥청이 야혁을 돌아보았다.

치리리리리리링!

등에 박힌 암기들이 모조리 뽑혀 나오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후우우우욱!

야혁의 몸에서 다시 강렬한 마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옥청은 지금껏 살아오며 이렇게까지 놀란 적이 없었다. 제대로 끝을 보겠다고는 했지만 곧 죽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죽지 않은 걸 넘어서 재차 힘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 옥청은 혁련휘의 말을 떠올렸다.

‘내 기운?!’

그제야 옥청은 깨달았다.

당관의 무자비한 암기 세례에 맞아 죽어 가고 있었지만, 야혁의 단전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 안에 남아 있던 기운이 옥청의 선기(仙氣)를 읽고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상생상극, 야혁이 품은 마기의 질이 옥청을 압도했기 때문에 벌어진 지독한 회복력이었다.

상극의 기운이지만, 어느 한쪽의 기운이 상대를 압도하면 언제고 전세가 역전될 수 있다. 혼원결은 그런 면에서 어떤 도가 신공보다도 우위에 있으나, 생명의 원천까지 폭발시킨 야혁의 기운은 옥청의 혼원기를 가볍게 상회하고 있었다.

당연히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옥청이 벼락처럼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엉!

검병을 쥔 옥청의 손바닥에 핏물이 흘러나왔다. 호구가 찢어진 것이다.

‘이럴 수가!’

단번에 목덜미를 내리쳤는데, 그 강도가 엄청났다. 이런 육신에 이 많은 암기를 박아 넣은 당관의 무공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옥청은 재빨리 혁련휘를 안아 들고 거리를 벌렸다.

그때였다.

야혁의 손이 옥청의 소매를 잡아챘다.

찌이이익!

옥청의 소매가 길게 찢어졌다. 찰나만 늦었어도 왼팔이 통째로 찢겨 날아갔을 것이다.

“크으…….”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야혁.

그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혼원기에 대한 반발로 마기가 회복되었지만, 실제로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살아난 그였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그의 정신은 더 이상 인간의 그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리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강력하기 그지없는 단 하나의 의지는 살아 있었다.

야혁이 땅을 박찼다. 방원후, 아니 전대 교주인 천교홍에게로 가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거기 서.”

콰앙!

땅을 박찼던 야혁이 그대로 기울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일 장 길이의 땅을 갈아 낸 그가 으르렁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야혁의 붉은 시야에 한 사내가 포착되었다.

당관이었다.

심신이 극도로 지쳤지만, 그의 허공섭물은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달려 나가려는 야혁의 발목을 낚아채 쓰러트린 것은 당관의 힘이었다.

지친 당관의 얼굴에 무서운 엄기(嚴氣)가 어렸다.

“내 허락 없이는 그곳으로 못 간다, 이 지긋지긋한 무뇌아 자식아.”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지긋지긋한 놈이었다.

“신화교의 무장 놈도 한 방에 죽질 않았지. 그래서 내장을 싹 다 녹여 버렸다. 한데 네놈은 더하구나.”

“크르륵.”

“좋다! 죽을 때까지 죽여 주마!”

버럭 소리친 당관이 제왕독공을 운용했다.

바닥까지 소모했던 내공이 당관의 무지막지한 의지를 받아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콩 한 쪽에 불과했던 내공이 대자연의 기를 흡수, 강력한 독정(毒精)을 거쳐 제왕독기로 치환되었다.

그 속도가 그야말로 벼락과도 같았다. 순식간에 단전의 삼 할을 채운 당관의 두 눈에서 암녹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야혁의 본능이 당관의 살기를 포착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성마를 돌파한 마인의 정신력마저 흔들 만큼 날카롭기 그지없는 상단신기의 힘을.

콰앙!

야혁의 속도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기가 질리는 속도요, 내구도였다. 오히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달리는 터라 이전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훅!

당관의 몸이 야혁을 스치고 지나갔다.

펑!

야혁의 어깨에 박힌 비수가 폭발하며 그의 오른쪽 고막을 터트렸다. 얼굴 곳곳에도 폭발한 비수 조각이 박혀 새하얀 연기를 피워 올렸다.

“으아아아!”

독이었다. 제왕독기가 한껏 담긴 비수였다.

푸화악!

당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비수를 박아 넣느라 제대로 피하질 못했다. 그의 옆구리 살점이 너덜거렸다. 야혁의 손톱에 찢겨 걸레짝이 된 것이다.

등줄기를 훑는 고통. 그러나 그 고통도 무서운 위압감과 파멸적인 살기로 잊혔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도, 그의 이성은 냉정을 유지했다.

‘이대로는 안 돼.’

쩌저정! 펑! 쾅!

앞서 혁련휘의 손톱에 갈라진 틈에 삼양신장을 갈겼다. 야혁은 고통스러워했지만, 이어진 그의 몸통 박치기에 당관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눈앞이 번쩍거릴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이 일격을 받아 내고도 죽지 않은 건, 첨예하게 날 선 정신력으로 허공섭물을 발휘, 야혁의 돌진을 늦췄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대로는 안 되지.’

퍼어엉!

야혁의 양손이 당관이 있던 자리를 찍어 내렸다.

반경 삼 장 범위의 땅에 실금이 갔다. 한바탕 부서지고 폭발했던 땅이 또 한 번 신음을 흘리며 아파했다.

어느새 하늘 높이 날아오른 당관.

야혁의 고개가 당관에게로 향했다. 완전히 일그러진 야혁의 얼굴은, 진실로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 그 자체였다.

허공에 떠올랐으니 허공답보로 이동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삼 할을 쌓은 제왕독기가 벌써 일 할밖에 남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허공답보를 펼쳤다간 후속타를 막을 수 없다.

그럼 죽는다.

‘어떻게 하지.’

차가운 이성이 수십 가지의 방법을 훑고, 분석하고, 폐기했다.

‘방법이 없다.’

떨어지기 시작한 몸뚱이.

야혁은 그마저도 기다릴 수 없었는지, 한껏 오므렸던 몸을 폭발적으로 펼쳐 당관을 향해 쏘아졌다.

당관의 얼굴에 낭패가 어렸다.

‘방법이…….’

피하면 죽는다. 피하지 못해도 죽는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빌어먹을! 시원하게 욕해 놓고 고작 여기서 끝인 거냐!’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죽더라도 이놈 모가지는 날려 버려야 했다. 물론 목숨이 아깝지만, 그렇다고 사람이길 포기한 짐승 하나 처리하지 못한다면 사천당가의 주인으로서 위엄이 서지 않는다.

‘좋다.’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

당관은 죽음을 각오했다. 여기서 죽더라도, 이 망할 짐승 놈은 끌고 가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순간 당관의 머리에 한 줄기 벼락이 내리쳤다.

‘……?!’

야혁의 돌진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날아오는 세 자루의 비수가 보였다.

그 비수들은 자신의 허공섭물로 인해 날아오는 것이었다. 내공이 아닌, 순수한 의지만으로 끌어온 기예였다.

‘비수가……?’

내가 왜 비수를 끌어들였나.

저 비수들은 어찌 한 줌의 내공도 없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가.

그때, 당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연호정의 환상과도 같은 무공이었다.

상상한 바를 그대로 구현하는 무신(武神)의 깨달음.

‘내가 비수가 된다면.’

번쩍!

당관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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