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37화 (937/963)


937화. 진실 (4)






푸스스.


돌무더기를 뚫고 올라온 손이 천천히 건물 잔해를 밀어젖혔다.


주르륵.


눈과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다행히 청각은 멀쩡했다. 정신이 없어서 윙윙대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것만 빼고는 괜찮았다.


진짜 문제는 내공이었다.


‘벌써…….’


수십 명의 내공을 빨아들여 강제로 섞어 쓴 대가는 참혹했다.


오장육부가 마기의 침습을 받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선 내공을 쏟아부어 진정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 내공이 마기인지라 고통이 줄어드는 와중에도 점점 마기에 오염되고 있었다.


‘재미있어.’


마공으로 이룬 성취 이전에, 마공에 관한 연구만큼은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에서도 손에 꼽힐 거라 자부했다.


그랬던 자신이 평생 다뤄 왔던 마기 때문에 죽어 가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참으로 우스운 마지막이란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직이다.’


마지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쿠르릉.


돌무더기를 헤치고 일으킨 몸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이렇게나 몸이 무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 있었다.’


그는 떠올렸다. 과거 한 무승과 만났었던 때를.


우연인지 운명인지 알 수 없었던 만남이었다. 그자도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았었고, 자신 역시 평생에 한 번 만나 볼 수나 있을까 싶었던 존재가 바로 그였다.


정파의 거두.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


그 태산북두가 키워 낸 당대 소림 최강의 고수가 그였다.


노인은 그와 싸우고 싶었다.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만나니 호승심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무승과 싸울 일은 없었다.


정확히는, 육신의 강함을 겨룰 일은 없었다. 오히려 차를 한잔하며 서로가 지닌 깨달음을 나누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호승심을 느끼긴 했지만, 동시에 상대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당시의 자신과 무승은 우위를 점하는 것이 무의미한 상황이었다. 이 세상에 진정한 동수(同手)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얄궂게도 두 사람은 똑같은 경지를 거닐고 있었다.


그때, 무승과 오랫동안 무론을 나누었다. 하루 만에 끝났는지 며칠간 계속되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론이 끝났을 때, 노인은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노인은 무승과의 마지막 대담을 떠올렸다.






‘참으로 얄궂지 않소?’


‘무엇이?’


‘빈승은 아직 불법의 끝자락도 잡지 못했지만, 몸으로는 느끼고 있소. 저 하늘의 존재를.’


‘그렇게 다 미쳐 가는 거지. 불법을 배우는 자가 하늘을 논해?’


‘허허, 그도 그렇소이다. 솔직히 하늘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소. 다만 이건 알겠소. 곧 우리의 시대가 저물게 되리라는 것.’


‘시대는 언제나 변화를 꾀하지.’


‘그러나, 우리의 시대가 저물어도 모두가 바라는 전설은 그대로일 거라는 생각이 드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내가 죽어도, 내 자리를 대신할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오.’


‘그 또한 세상의 섭리지. 마도(魔道)를 걷는 내가 가장 증오하는 섭리.’


‘그대도 마찬가지요.’


‘…….’


‘그대가 죽어도, 당분간 하늘은 민중이 원하는 신화(神話)를 줄이지 않을 것이오. 늘리지도 못하겠지만.’


‘딴에 땡중이라고 선문답을 하려는가?’


‘선문답이 아닌 담백한 사실을 말하고 있소.’


‘내가 죽으면, 내 자리를 대신할 누군가가 태어날 거라고? 너희가 마선이라 부르는 이 자리를 대체할 자가?’


‘탁무라는 도호를 쓰는 이가 있소. 검선이라 불리지. 그는 많은 것을 보는 대신, 육신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는 처지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빈승보다 훨씬 더 높은 깨달음을 안은 그 도인은 이리 말했소. 세상은 독존(獨尊)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천하에 그림자가 짙어지기 시작하면, 반드시 그림자를 밀어내는 광휘가 세상에 날 준비를 한다고.’


‘소림과 무당의 큰 어른이라는 자들이 쌍으로 미쳤군.’


‘그대가 지금 그것을 느끼지 못한대도 괜찮소. 그대는 마(魔)를 버리고 무(武)로 나아갈 작정이니까. 무의 길을 걷다 보면, 그대도 언젠가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될 것이오.’


‘백보신권 한 자락이라도 보여 줄 게 아니라면 이만 꺼지시게. 더 있다가는 내가 먼저 주먹을 날릴 것 같아.’


‘허허.’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땡중의 말을.


하지만 몸으로는 이해했다. 그 땡중의 말마따나 머리로는 몰라도 몸은 이미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희는 시대의 교두보가 될 거라고.


천하가 천하답게 변모하기 위해 너희는 기능하고 있는 거라고.


노인은 그때 처음으로 말 못 할 좌절감을 느꼈다. 자신의 존재가 새 시대의 교두보가 된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직감으로 느꼈기에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다.


그것이 흐름이라는 것을.


심지어 누구의 의지도 아닌 나의 의지로 인해 지난 삶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하늘의 뜻 따위는 살핀 적 없다. 정파 놈들이 말하는 협행에 목을 맨 적도 없고, 저급한 욕망에 눈을 돌린 적도 없다.


오로지 강함 하나.


그는 강함의 끝을 원했다. 끝을 보지 못해도, 구도자로서 살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하는 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누군가의 교두보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에 기분 상할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모든 좌절은 물론 마(魔)에서조차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냐.”


우우웅! 우우웅!


흡정으로 모은 잡마(雜魔)의 진기가 마구 날뛰었다.


더 이상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은 편했다.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눈이 멀자 더 명확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분명 이곳에 존재하는데.”


스러진 나의 자리를 대신할 자가.


‘효락이는 아니다.’


누군가가 있다.


눈도 멀었고 후각도 상실했다. 조만간 청각도 잃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하늘의 뜻을, 아니 하늘의 뜻인지 뭔지 모를 섭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권신(拳神)과 검선(劍仙)처럼, 신과 선이 보는 영역으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자리가 비었다고 한들 자격도 없는 자가 올라설 만큼 만만한 태사의는 아니지. 필경 이 근처에 있는 누군가는, 성마지경에 오를 만반의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우우우우웅!!


잡마진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시시각각 죽음에 가까워졌지만, 당장의 활력이 돋았다.


쿵.


가볍게 한 발을 내디디자 대지가 흔들리는 듯했다.


실제로 땅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발걸음이 지닌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 미래가, 심안(心眼)으로 보는 세상을 흔들고 있었다.


노인은 걸었다. 걸어야 할 곳으로 걸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바로 죽어 가는 자신의 핏줄, 선대의 향기가 풍기는 곳이었다.


걸어가며, 그는 생각했다.


‘괜찮은 삶이었다.’


마지막 싸움만큼은 자신이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지막 상대라 생각했던 광혈의 전대 교주는 오색지옥공을 근원으로 하는 중원의 한 고수에게 패배했다.


그래도 괜찮다.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방원후인 채로 광혈 본단까지 가서 당대 교주에게 더 강한 힘을 부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무책임한 생각이 아니었다.


사람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 제 생을 산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도, 식물도 살아 숨 쉬는 동안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고 있다.


그렇게 각자가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고 살면, 섭리는 그때 움직이는 것이다.


‘…….’


노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선대의 혈육에게 가려고 했는데, 문득 더는 발이 나아가지 않았다.


육신이 붕괴되고 있었지만, 그는 차분했다.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 짓는 시점이었다. 급할 필요 없었다. 이대로 무너진다면, 그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의 운명은 허무하게 무너지는 종막을 선사하지 않았다.


‘저기다.’


노인이 땅을 박찼다.


박찼다 싶은 순간, 어느새 그의 신형이 신마림의 본산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의 발이 향하는 곳에는 싸움이 있었다.


하늘인지 뭔지 모를 존재의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쓰러져 죽는 것은 혁련휘다운 죽음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아!”


무시무시한 야수의 함성이 들렸다.


온몸이 경직될 정도로 막강한 힘을 품은 괴성이었다. 마기의 양 또한 엄청났다.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콰앙!


“크으윽!”


필살의 의지로 야수의 앞을 막은 누군가가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 역시 성마에 이른 고수임이 분명했다. 튕겨 나가면서도 기어이 야수의 가슴에 벼락과도 같은 검상 세 개를 남겨 놓았다.


그래도 야수는 달렸다. 오히려 피를 쏟아 내니 더 광분하는 듯했다.


‘네놈이구나.’


노인이 손을 들었다. 야혁의 우악스러운 손과는 달리 뼈밖에 안 남아 있었지만, 강철보다도 단단하고 보검보다도 날카로운 흑색 손톱만큼은 몹시 닮아 있었다.


“되다만 반쪽짜리 마인 놈이 기어이 살아남았구나!”


야혁의 목소리는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말없이 일장을 내질렀다.


펑!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질풍처럼 달려든 야혁은 그 기묘한 일장을 피하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갔다.


콰콰쾅!


땅을 갈며 물러난 야혁이 놀란 눈으로 혁련휘를 바라보았다.


순간 야혁의 눈에 더한 충격이 어렸다. 어느새 혁련휘가 그의 옆에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혁련휘의 손톱이 바위처럼 단단한 그의 어깨 근육을 뚫었다.


부우우우우욱! 푸화악!


좌측 어깨부터 팔뚝까지 다섯 줄기의 고랑이 파였다.


피부와 근육을 가르고 뼈까지 긁어 낸 일격이었다. 야혁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야혁의 오른손이 혁련휘의 왼손 손목을 잡았다.


혁련휘의 왼팔이 부드럽게 아래로 향했다.


콰앙!


야혁의 얼굴이 땅에 처박혔다.


어떻게 처박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야혁조차 어리둥절한 듯 멍하니 머리를 들어 혁련휘를 올려다보았다.


툭!


혁련휘의 오른손이 야혁의 목을 움켜쥐었다.


‘죽일 수는 없군.’


이 몇 번의 공격으로 마기가 바닥나 버렸다. 놈의 목을 움켜잡았지만, 더는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이걸로 끝인가.’


그때, 혁련휘는 문득 시야가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안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데, 잃었던 시력이 일순간 돌아왔다.


그 흐릿한 눈이 누군가를 포착했다.


야혁의 등 뒤, 무섭게 돌진하는 누군가.


온몸에 신묘한 광채를 두른 중년 사내 하나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오고 있었다. 온몸에 독기가 가득했는데, 그 독기보다도 함께 움직이고 있는 암기들에 더 눈이 갔다.


그 남자를 확인한 순간.


바로 그 순간, 혁련휘는 확신했다.


‘저자로구나.’


압도적인 내공. 엄청난 허공섭물의 기예.


성마의 코앞에 도달한 경지인데, 그 경지에 어울리지 않는 무공을 구현하며 달려든다.


‘자네가 바로 내 자리를 대신할 또 하나의 성천인가.’


혁련휘가 눈을 감았다.


비록 적을 죽이지 못했지만, 시원하게 몇 수를 나누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본림에 잘 왔네. 덕분에 내 자식들이 사네.’


혁련휘의 두 눈에서 오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후우우우우우웅!!


야혁의 목을 잡은 손에서 강력한 흡인력이 발생했다. 마지막 흡정마공이었다.


혁련휘가 외쳤다.


“죽이게!!”


피피피피피핑!!


수백 개의 암기가 야혁의 등판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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