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6화. 진실 (3)
연호정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눈빛 역시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시간을 거슬러?’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차라리 궁극의 의술로 죽은 사람을 살려 냈다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일 것이다. 실제로 과거 어느 때에는 지독한 약물과 비술, 극에 이른 의술의 합작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강시(殭屍)를 만들어 냈다는 얘기도 흔했다.
당장 연호정의 주변만 봐도 모용군의 수하로 일하고 있는 자가 바로 멸문한 진주언가의 후손이었다. 진주언가는 강시술의 장점을 따와 더 강력한 무공과 신체를 얻으려다가 패망한 비운의 가문이었다.
즉, 그 정도는 이 강호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을 역행하는 것, 거스르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이란 물질도 아니고, 기(氣)와 같은 애매모호한 개념조차도 넘어선 무언가다. 천하의 어떤 기술로도 시간을 역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그것은 진실이고 진리였다.
하지만 연호정만큼은 그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자신이 수십 년 전으로 회귀했기 때문이었다. 환경만 같은 다른 세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시간을 역행한 경험이 있기에 그것이 어불성설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시간을 거스른다고? 그런 헛소리로 몇 명을 속인 거냐?”
천교홍이 웃음을 터트렸다.
뜻밖에도 마기를 다루지 않는 그의 웃음소리는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차라리 속인 거라면 우리도 좋았지. 굳이 그걸 찾자고 천하를 뒤질 일도 없었을 테니까. 나아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숨어 살 이유도 없었겠지.”
“……?”
“혈교에 대해 아는가?”
“남들 아는 만큼만 알지.”
“모른다는 뜻이군.”
천교홍이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맑고도 어두운 하늘은 마치 저승에서 올려다보는 하늘 같았다.
“대화는 좋지만, 굳이 후인들에게 해가 될 만한 정보를 줄 필요는 없겠지.”
“흥미가 식는군.”
“삼백 년 전의 전쟁으로 인해 우리 혈교는 찢어졌다.”
“안다.”
“혈교를 지탱하는 세 개의 귀족 가문이 있었지. 말이 지탱이고 귀족 가문이지, 실질적으로 혈교를 움직이는 것은 삼공가였다. 혈교 본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저 신(神)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더 우월한 존재가 되기 위한 연구를 거듭했을 뿐.”
그런 정보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뜻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연호정에게는 분명 쓸데없는 정보였다. 아무도 모르는 신비 단체에 대한 정보는 이야깃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그래도 혈교주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혈교를 움직이는 건 삼공가였지만, 혈교주를 논외로 두고는 존재할 수 없는 곳이 혈교였지.”
“그런데 왜 찢어졌지?”
“혈옥 때문이다.”
“……?!”
“삼백 년 전, 아니 그보다도 더 전이겠지. 혈옥은 혈교주의 이혼(移魂)을 거부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낱 물건이 의지를 갖고 있다는 뜻인가?
그보다 거부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지금껏 혈교 역사에 혈옥을 완전히 개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혈옥을 완전히 개방했다면 이미 천하가 우리의 것이 되었을 테지.”
천교홍이 말하는 천하는 중원 정도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천하다. 하늘 아래 모든 것, 끝이 보이지 않는 모든 땅이 혈교의 것이 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혈옥의 힘을 다 끌어다 쓰면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그것을 가능케 한 사람은 처음 혈교를 세운 초대 교주뿐이었지.”
“초대 교주…….”
“초대 교주께서는 약관의 나이로 처음 마공을 배우셨다. 애초에 마공이라는 개념조차도 없던 시기에, 무공 한 줌 모르던 분이 불현듯 마공을 깨치고는 불과 이십 년 만에 맞수를 찾기 힘든 경지에 오르셨지.”
“……!”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무공 한 줌 모르던 사람이 불현듯 마공을 깨달았다?
당연히 불가능한 얘기다. 나아가, 약관에 이르도록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 자가 이십 년 만에 천하 최강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 말에서 자신을 보았다.
남들의 눈엔 연호정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족한 재능, 여물지 못한 자아를 갖고 있던 청년이 불현듯 성격을 고치고 가문의 절학을 순식간에 대성한 것도 모자라, 연원을 알 수 없는 무공을 배우곤 급격하게 강해졌다.
이십 년은커녕 십 년도 걸리지 않아 무신(武神)의 경지라는 무극지경에 도달했으며, 지금은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절대자로 만인의 열광을 받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늘이 내린 재능이 아니라면, 진정 하늘을 다스리는 신의 계시가 아니라면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분께서 실제로 혈옥을 이용, 시간을 역행한 건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간 역행이 아니라면 그처럼 신화 같은 일을 벌이진 못했겠지. 하긴, 그분의 이야기에 감화되어 교도가 된 사람도 많았지만.”
“…….”
“그때 이후로 혈옥은 혈교의 삼대신물이 되었다. 삼대신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지.”
천교홍의 눈이 깊어졌다.
“그걸 네놈이, 아니 사색광인이 훔쳐 달아난 것이다.”
“…….”
“이혼의 권능이라고는 하나, 그것도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혈교의 천년 역사에 혈옥을 이용, 삼 대(三代) 그 이상을 통치한 분은 없었어. 물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이지.”
삼 대.
한 사람의 수명이 일 갑자, 육십 년이라고 쳐도 삼 대면 백팔십 년이다. 즉 하늘이 내린 수명을 거부하고 천도를 거스르는 술법을 이용, 새 몸으로 갈아타 이전 세대와 똑같이 혈교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객잔에서 술 마시다가 들을 만한 허구의 이야기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삼백 년 전의 혈교주가 혈옥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렇다. 그분은 최초의 일 대였어. 역대 혈교주 중 단 한 번의 이혼도 써먹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 하나였다.”
연호정의 얼굴에 얼핏 복잡한 기색이 흘렀다.
혈옥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이건 정말 천도를 거스르는 마물 그 자체였다. 문제는 그 마물이 자신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역천(逆天). 연호정은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때, 사색광인이 혈옥을 훔쳤지.”
“……도대체.”
연호정이 떠듬떠듬 물었다.
“사색광인이 혈교에서 어떤 직위를 가졌었기에 혈옥을 훔칠 수 있었던 것이지?”
천교홍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관련 없는 삼자로 대한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연호정을 사색광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색광인 본인이 아니면 저 무공과 실력을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
그는 상대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을 사색광인이 듣기를 바라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색광인은 혈옥을 다루지 못했던 그 혈교주의 장남이었다.”
“……!!”
“그것도 역대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괴물이며, 약관에 이르러 혈교의 모든 마공을 집대성한 불세출의 천재였지.”
연호정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사부님…….’
사색광인, 사방무제.
나아가 황룡제라 불리던 그분은 삼백 년 전 홀연히 나타나 혈교지란을 종식한 고금 제일의 무신(武神)이자 중원의 영웅이었다.
그분께서 삼백 년 동안이나 살아오셨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처음에는 그랬다.
다만, 근래 들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황룡을 열 때, 과거 당신께서 어린 자신에게 얘기해 줬던 내용을 보면 분명 삼백 년 전의 인물이 맞았다.
문득 연호정은 싸우기 전 천교홍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본교, 아니 혈교 최악의 배신자! 천년 혈교의 발자취를 지워 버린 악마! 역사를 뒤바꾼 도둑놈이자 파멸의 씨앗!’
‘혈옥(血玉)을 훔쳐 달아난 것만으로도 만고의 역적이라 할 만하거늘, 죽지도 못한 반쪽짜리 마귀가 되어 이리 나타나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이놈!’
최악의 배신자. 역사를 뒤바꾼 도둑놈.
그렇다. 남은 혈교 잔당의 입장에서 사부님은 충분히 그리 불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연호정은 의아했다.
사부께서는 혈교 사상 최고의 천재요, 괴물이라 불리던 분이라고 했다. 그런 분께서 왜 혈교를 뛰쳐나와 오히려 그들에게 칼을 겨누셨을까?
무수히 많은 민초에게 있어서 스승은 만세에 길이 남을 영웅이지만, 평생을 혈교의 후계자로 살았던 사람이 느닷없이 집안을 배신하고 칼을 겨눈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필시 어떤 사정이 있을 듯했다.
‘사신공도 이상해.’
스승께서는 말씀하셨다. 본인이 고대 최강의 전투술이었던 사신무(四神武)의 계승자이며, 사신무의 계승자들은 사신무장(四神武將)이라 불리며 전장을 전전했다고.
천교홍 말마따나 스승께서 혈교의 모든 마공을 집대성한 분이었다면 굳이 사신무를 익힐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사신무를 익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신기(四神氣)는 하나하나가 성스러운 기운의 총화인지라, 마공을 연성한 자는 결코 익힐 수 없는 신공절학이었다.
뭔가가 있다.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무언가가.
천교홍의 말이 이어졌다.
“단순히 거기서 끝났다면, 그래. 그걸로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 어떻게든 혈옥을 회수하기 위해 날뛰었겠지만, 우리 모두가 이렇게 증오로 똘똘 뭉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러나 사색광인은 마도 무림 역사상 최악의 마공이라는 오색지옥공을 뜯어고쳐 천하 모든 마공의 상극이라는 괴공을 만들었어! 그가 만든 무공은 불가의 무공이나 도문의 신공과는 완전히 달랐다! 상생상극의 이치조차 넘어선, 철저하게 마공 파훼를 위한 파마(破魔)의 칼날이었다!”
천교홍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대를 이어서라도 우리를 뿌리 뽑겠다는 의지가 아닌가! 배은망덕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뿌리를 인정하지 못하는 소인배의 뒤틀린 욕망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놈들 입에서 배은망덕이니 소인배니 하는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군.”
“뭐라고 생각해도 좋다. 사색광인은 도를 넘었어. 넘치는 재능으로 오히려 혈교에 칼을 겨누다니, 만 번 죽어 마땅한 대죄가 아니고 무엇이랴.”
“오히려 멋진 선택이 아니었나 싶군. 너희같이 정신 나간 광신도들을 풀어 뒀다간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천교홍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희 눈에는 그리 보일 수도 있지.”
“어떤 대단한 이유가 있어도 너희가 한 짓은 변호받을 수 없어.”
“그런 식이라면 사색광인 역시 마찬가지겠지.”
천교홍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무시무시한 귀신의 표정, 두 눈 가득 피어오르는 귀화(鬼火)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마공을 파훼하는 무공을 만들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나 역시 광혈에 속해 있지는 않았겠지.”
“뭐?”
“사색광인은 혈교주의 장남이었다. 그렇다면 차남은 어디로 갔기에 혈교의 주인이 되지 못했을까?”
“……?!”
“배신감에 치를 떤, 동시에 짙은 욕망에 사로잡혔던 사음과 신화가 그 핏줄에게 죄를 물으려 할 때, 그 핏줄을 데려와 혈교의 정통성을 지킨 것이 바로 광혈마가(狂血魔家)였다.”
연호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알겠는가? 내가 바로 사색광인 네놈 때문에 죽을 뻔한 천씨 일가의 후예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