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35화 (935/963)

935화. 진실 (2)

쌍두룡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크윽!”

피할 수도 없는지라 그 무공을 그대로 받아 낸 야혁은 너덜거리는 양팔을 보고 침을 삼켰다.

티티티팅!

홍련궁의 시위가 화려한 음색을 토해 냈다.

퍼버버벅!

야혁이 서 있던 땅에 네 개의 구멍이 뚫렸다. 파괴력을 줄인 대신 관통력을 살린, 이제는 더 이상 깊어질 곳이 없을 만큼 깊어진 무형탄의 위력이었다.

훅!

무형탄을 피한 야혁을 향해 몸을 날린 막원이 역수로 쥔 단검을 휘둘렀다.

퍽!

야혁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피범벅이 된 양팔로 막원의 팔을 막았다. 힘으로는 광혈교에서도 수위를 다투는데도 한 팔로 내리찍는 막원의 칼을 막기가 힘들었다.

후우웅!

언제 날아왔는지 새하얀 도복을 펄럭이며 구름을 쓸 듯 움직이던 옥청이 검을 뻗었다.

검 끝에서 올올이 풀려 나온 검망이 단숨에 야혁을 휘감았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온몸에 거미줄 같은 상처가 났을 일격이었다. 그러나 야혁의 단단한 피부는 도가 신공 최고위에 거하는 혼원기의 검기로도 뚫기 힘들었다.

마공과의 상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대단한 일이 아닌가 싶지만, 야혁의 마기가 너무 강해서 혼원기의 힘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탓도 있었다. 두 사람의 격차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도가 신공의 힘은 야혁의 내부를 위협적으로 뒤흔들기 충분했으며, 시기적절한 공격이었던 덕에 야혁은 팔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푹!

“크으윽!”

막원의 단검이 야혁의 어깨에 꽂혔다.

그때, 당관이 외쳤다.

“물러나시오!”

파악!

막원은 당관의 말에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촤르르르륵!

막원 앞, 야혁을 둘러싸는 거대한 빛 덩어리가 있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 빛 덩어리는 수많은 암기로 이뤄진 빛의 벽이었다.

사방 어디에도 피할 길이 없었다. 암기들 주변에는 제왕독공의 독기까지 깃들어 있어, 시시각각 야혁의 육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결국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쾅!

하늘 높이 날아오른 야혁.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묵비가 시위를 놓았다.

무형탄의 깨달음으로 위력은 줄었지만, 더 빠르고 날카로운 일격을 손에 넣은 신궁.

구룡파천궁의 용아포가 그대로 야혁의 몸에 적중했다.

콰앙!

폭음과 함께 튕겨 나간 야혁이 이십여 장 밖으로 날아가 바닥에 쓰러졌다.

츠츠츠츠.

사방에 퍼트린 독기를 모조리 회수한 당관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다. 제왕독공의 비술부터 만천화우까지, 한순간 내공 소모가 엄청난 기예들을 수도 없이 퍼부은 결과였다.

“후욱!”

한차례 숨을 몰아쉰 당관이 막원에게 물었다.

“끝난 것이오?”

“아직.”

쓰러진 야혁을 보는 막원의 눈이 은백색으로 번뜩였다.

“정신을 잃지 않았소. 많이 약해졌지만, 여전히 강한 마기를 품고 있군.”

“기가 질리는군.”

천하제일 독공에 천하제일 암기술, 혼신의 힘을 다한 신궁의 일격에 당한 것도 모자라 도가 최고 신공으로 내부가 흔들리고 백병신군의 칼까지 맞았다.

그러고도 전투 불능 상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이건 무극수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그만큼 야혁의 생명력이 상식을 초월한다는 뜻이었다.

“끝냅시다.”

팔을 빙빙 돌리는 당관의 손에 어느새 비수 세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때, 막원이 손을 들었다.

“기다리시오.”

“왜……?”

“덤빌 수 있었다면 내가 곧장 따라가 목을 따 버렸을 것이오.”

“그게 무슨 뜻이오?”

옥청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증폭되고 있습니다.”

“뭐?”

“마기가 증폭되고 있어요. 불안정한 상태로, 계속.”

“나는 아무것도…….”

화아아아아악!

그 순간, 쓰러진 야혁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옥청의 말이 맞았다. 야혁의 몸에서 터져 나온 그 검붉은 마기는 종전과 전혀 다른 사이함으로 가득했다.

당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일 싫어, 저런 끝도 없는 비술 같은 거. 개 같은 놈이, 차라리 진즉에 꺼내든가.”

모두가 동감하는 말이지만, 욕이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옥청이 빠르게 말했다.

“마도 무림에는 기괴한 비술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처럼 내공을 두세 배로 부풀리는 비술도 있다더군요. 다만…….”

“부작용이 있겠지.”

실제로 저 마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 본연의 생명력이었다.

어떻게 해도 뚫기 힘든 상황인데 심지어 당가의 독에 중독되어 버렸다. 시시각각 힘을 잃어 가는 와중, 평소라도 신중히 막았어야 할 궁술에 직격당해 내상까지 입었다.

돌아갈 수도, 이대로 뚫고 갈 수도 없는 상황.

그렇다고 도주할 수도 없다. 도주는 곧 죽음이니까.

결국 야혁이 택한 것은 자신의 생명을 깎아 적을 해치우는 방법이었다.

“크아아악!”

야혁이 내지른 괴성에 당관과 묵비, 옥청은 물론 막원까지도 움찔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의 끝까지 도달할 듯한, 가히 엄청난 사자후였다. 불가의 사자후와는 다른 마귀의 울음소리, 듣기만 해도 사지에 힘이 빠질 것 같은 마성(魔聲)이었다.

치이이익!

피범벅이 된 야혁의 양팔에서 허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연기에서 익숙한 독기가 느껴졌다. 체내에 침투한 당가지독을 증폭된 마기의 힘으로 뽑아내 버린 것이 분명했다.

“내 진짜…….”

촤르르르륵!

바닥에 흩어진 암기들을 다시 한번 빨아들여 허공에 띄운 당관이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끔찍하다, 끔찍해. 너무 치사한 거 아닌가? 마도 놈들은 다 저런 치사한 수법들을 갖고 있는 건가?”

“다는 아닐 겁니다. 아마도…….”

“대답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잖은가!”

촤르륵! 촤르르륵!

당관의 몸 주변으로 암기들이 원을 그리며 돌았다. 총 세 개의 얇은 원은 끊임없이 부딪치며 찬란한 불꽃을 토해 냈다.

‘독은 쓸 수 없어.’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저 마귀 놈의 몸에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 제 생명력까지 깎아 기존의 마기를 몇 배로 끌어올린 놈에게 독이라고 통하겠는가.

그렇다고 융해삼생공을 쓸 수도 없으니, 남은 것은 혼신의 힘을 다한 암기술뿐이었다.

막원이 외쳤다.

“먼저 치겠소!”

파아아앙!

단검 끝에 길쭉한 은백색 진기를 더해 화려하기 그지없는 광검(光劍)을 만든 막원이 질주를 시작했다.

당관이 소리쳤다.

“제발 좀 뒈져라!”

피피피핑! 촤르르륵!

십여 발의 무형탄과 수십 개의 암기가 막원을 뛰어넘어 야혁에게로 쏟아졌다.

* * *

“……?!”

연호정은 눈을 끔뻑였다.

‘뭐야?’

순간 머리가 띵했다.

지독한 약물에 취해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한 기분이었다. 순간적으로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웅.

연호정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들린 광룡부가 공명하고 있었다. 마치 주인의 기분을 안다는 듯, 진정하라는 듯 서늘한 진동을 발했다.

‘아!’

그가 부서진 땅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치이익! 치이이익!

뿜어져 나오는 희뿌연 연기 속에는 몸이 반으로 나뉜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고도 남자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깃든 마기가 끊임없이 재생을 촉진하는 듯 절단된 부위가 부글부글 끓으며 무언가를 만들다가 사그라지길 반복했다.

“처음 보나?”

천교홍의 말에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의 목소리, 아니 존재 자체가 황룡신왕공을 두들겨 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통제되지 않고 의지를 잃어버렸다. 여전히 천교홍의 몸에 깃들어 있지만, 그는 더 이상 마기를 의지대로 발산할 수 없다.

‘이렇게 쉽게 끝난다고?’

천교홍은 지금껏 본 적 없는 힘을 품고 있었다. 회귀 전 사음교주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상극이라지만…….’

그때, 천교홍이 말했다.

“너무 쉬워서 의외인가?”

마치 연호정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천교홍의 말은 날카로웠다.

“기억을 잃은 건지 억지로 잠재운 건지 모르겠군. 아니면…… 정말로 사색광인의 후인인가?”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이것저것 들을 것 없이 곧장 뛰어들어 천교홍의 머리통을 짓이겼을 것이다. 그러고는 후방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돕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렸을 것이다.

한데 이상하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천교홍의 말을 듣고 싶었다.

‘아니, 그것도 아니야.’

직감이었다.

지금 천교홍과 대화하지 않으면, 어쩌면 자신은 무언가 큰 것을 놓치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야 한다. 도와야 하지만…….’

연호정은 입을 꾹 다문 채 천교홍의 앞으로 다가갔다.

천교홍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인은 아닌 것 같군. 지옥개문(地獄開門)의 경지는 그 연배에 이를 만한 경지가 아니야. 하긴, 변형된 지옥공이니 개문이 아니라 다른 명칭을 갖고 있겠지.”

천교홍 앞에 선 연호정이 그의 가슴을 향해 광룡부를 겨누었다.

천교홍이 미소를 지었다.

“철저하군. 역시 사색광인이야.”

굳이 위협하지 않아도 공격이나 자폭 따위의 선택지는 없다. 그건 연호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를 위해 광룡부로 천교홍에게 압박감을 전한다. 숙달된 백전노장의 조심성이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사색광인이라 함은, 중원 무림이 전설로 떠받드는 사방무제를 뜻함이겠지.”

“사방무제라…… 생각해 보니 대륙의 짐승들은 그리 부른다는 말을 들어 본 것도 같군.”

“내가 사방무제라고?”

“아닐 수가 없지.”

“사람은 삼백 년을 살 수 없다.”

“지금껏 내 말을 뭘로 들었나? 혈옥을 손에 쥔 이상 이혼(移魂)의 술수를 부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혼.

혼을 옮긴다는 뜻이었다. 사마외도에서 연구하는 꿈과 같은 비술로, 탈혼환백(奪魂換魄)이라고도 한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이놈은 자신을 사색광인, 즉 사부님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연호정은 모른 척 물었다.

“혈옥이 뭐지?”

천교홍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민되는군. 말해 줘 봤자 의미도 없을 것 같고, 만에 하나라도 내가 네놈의 과거 기억을 되살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 같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다면 좋은 일이다?

오히려 반대가 아닌가 싶었다. 모든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면 삼백 년 전 혈교지란을 종식한 그때의 사방무제가 강림한다는 뜻일 텐데, 그것이 어찌 좋은 일일 수 있을까?

“뭐가 됐든…… 좋다.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한 것이지. 후사는 후인들이 알아서 할 터, 어차피 네놈들이 기를 써도 본교의 교주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웃으며 말하지만, 연호정은 그의 얼굴에서 지친 기색을 읽었다.

어쩌면 저승으로 가지 못한 혼을 잡아 두는 것은, 천도를 거스르는 일이기 전에 그 대상에게도 못 할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교홍은 분명 힘들어하고 있었다. 동시에 환희하고 있었다.

이제야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나누지 못한 대화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그런 헛소리는 됐으니 혈옥이 뭔지나 얘기해.”

천교홍의 미소가 짙어졌다.

“좋다. 네놈은 스스로를 사색광인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으니, 나 또한 제삼자로 대해 주도록 하지.”

“…….”

“혈옥이 뭐냐고?”

“그렇다.”

“혈옥은 광세혈교(曠世血敎)의 삼대신물(三大神物) 중 하나다.”

“신물이라고 한 말은 들었다. 듣자 하니 구슬 같은 건가 본데, 그게 뭐라고 신물씩이나 되는 거냐? 이혼의 공능 때문에?”

“신물씩이나 될 수밖에 없지. 혈옥이야말로 혈교의 근원이자 생명의 원천이다. 궁극에 이르면 시간을 거스를 수도 있다는 천고의 보물이 바로 혈옥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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