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2화. 대종사(大宗師) (7)
훅!
찬연한 불꽃을 드리우며 일어난 거대한 황룡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황금빛으로 가득했던 연호정의 눈도 본래대로 돌아왔다.
천하를 뒤집어엎을 것 같은 위엄은 사라졌지만, 연호정의 힘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불살랐던 힘을 갈무리한 몸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위태로운 기운을 흘려 대고 있었다.
“혈옥?”
연호정의 말에 천교홍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시침을 잡아뗄 생…….”
퍼어어엉!
천교홍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벼락처럼 내쏜 권풍에 오른쪽 어깨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그의 몸에 집약된 마기를 생각하면 기습이라고 한들 맨몸으로 당한 것 자체가 불가해한 일이었다. 천교홍 역시 멀쩡한 정신이 아니라는 뜻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우두둑.
천교홍의 어깨가 제멋대로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본래대로 붙어 버렸다.
단순히 마공의 성취가 깊다고 저런 일이 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불사를 추구하는 마(魔)의 특성에, 본인의 생명력까지 갉아서 복구하는 능력이었다.
즉, 제 수명을 시시각각 깎아 먹고 있음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애초에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호정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군.”
“스스로의 기억을 봉인해 둔 것이냐? 아니면 모른 척하는 것이냐?”
“닥치고 목이나 이리 내거라. 한 방에 썰어 주지. 목이 달아나고도 회복할 수 있는지 확인해 주마.”
천교홍의 눈이 깊어졌다.
‘뭐지?’
그는 상대가 사색광인임을 확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색광인은 삼공가(三公家)는 물론 혈교본신(血敎本身) 역사상 최초로 오색지옥공을 안정적으로 연마한 괴물이었다.
그러나 오색지옥공은 인간의 마공이 아닌지라, 안정적으로 연마할 수는 있어도 지속적으로 경지를 끌어올리다간 무조건 심신에 타격을 받는다. 당연히 그 끝은 죽음이었다.
사색광인이 하늘이 내린 천재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오색지옥공의 구결과 법문을 글자 하나 단위까지 분해하여 재창조한,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일을 해낸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시전자의 심신을 무시하고 끊임없이 힘을 불려 종국에는 살아 있는 마귀가 될 수밖에 없는 지옥공에서, 철저하게 힘과 깊이만을 뽑아내 되레 심신의 극한을 추구하는 무공으로 변모시켰다.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걸로 끝이었다면 혈교 휘하 모든 마인은 그를 역사상 제일의 천재라고 불렀지, 최악의 배신자라고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천적.’
사색광인은 재창조한 지옥공을 마기(魔氣)를 분해하는 파훼공(破毁功)으로 만들었다.
무학 자체의 지고함만으로도 고금을 논할 정도인데, 그 무공을 연성하면 마공을 익힌 자를 손쉽게 짓누를 수 있다.
시전자의 능력 이전에 무공 자체의 본능이 그러했다. 특정한 마공을 파훼하는 걸 넘어 천하 모든 마공의 천적이었으니, 혈교 입장에서는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할 최악의 공부였다.
‘다른 마공은 몰라도 마제공을 파훼할 수 있는 것은 변형된 지옥공뿐이다. 변형되었다 한들 그 수준은 여전히 지고하여, 하늘이 내린 재인(才人)이 아니면 연성할 수 없는 무공이라 했다.’
당연히 눈앞의 저놈은 사색광인일 것이다.
육신을 보면 반로환동(返老還童)을 거친 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서른 전후의 연배라는 것인데, 저 나이에 지옥공을 익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색광인이 분명하다. 필경 혈옥으로 육신을 갈아탄 것이야.’
스륵.
천교홍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곧바로 공격하려던 연호정이 움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상할 만큼 빈틈이 많았는데, 일순간 모든 빈틈이 사라진 것이다.
천교홍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놈은 사색광인이다.”
“마음대로 생각…….”
“설령 사색광인이 아니더라도 ‘그’ 지옥공을 익힌 이상 살려 둘 수는 없지.”
화아악!
천교홍의 몸에서 무지막지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잠잠했다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마기는 그야말로 재앙 같은 위압감을 선사했다. 마공과 천적인 황룡신왕공을 익힌 연호정조차 순간적으로 서너 걸음을 물러날 정도였다.
마기의 밀도도 놀라웠지만, 천교홍이 이룩한 경지 자체가 대단했다. 처음보다 힘이 떨어진 것이 분명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기세를 드리운다.
한옆에서 천교홍을 살피던 혁련휘의 눈에 재차 강한 살기가 어렸다.
빈틈이 있어도 쉬이 공격하지 못한 것은 그 역시 천교홍의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교홍은 전투 의지를 다졌고, 그렇다면 남은 일은 하나뿐이다.
파아아앙!
연호정이 움직이기 전, 혁련휘가 천교홍의 근접 거리로 다가왔다.
혁련휘의 손이 천교홍의 중단을 향해 뻗어졌다. 마선(魔仙)의 진신절기, 진천마라장(振天魔羅掌)이었다.
콰르릉!
폭음과 함께 혁련휘의 몸이 튕겨 나갔다.
훅!
어느새 혁련휘의 코앞까지 도달한 천교홍이 스산하게 웃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무학이라도 그따위 잡스러운 기운으로 구사하는 이상 삼류만도 못한 법이다.”
천교홍의 좌장이 혁련휘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혁련휘가 서둘러 팔을 교차했다.
쾅!
화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저 멀리 건물 하나를 부수고 날아갔다.
번쩍!
사선으로 휘둘러진 광룡부가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켰다.
그 충격파에 천교홍의 신형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허공에서 퍼져 나오는 황룡기가 곧장 이동해야 할 천교홍의 신형에 제약을 걸었다.
연호정이 힘차게 광룡부를 내질렀다.
휘둘러 베는 게 아니라 검처럼 찔러 들어간다. 광룡부의 칼날에 맺힌 황룡기가 마구 회전하며 천교홍의 시야 전체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천교홍이 쌍장을 내질렀다.
콰르르릉!
연호정의 신형이 주춤했다. 천교홍은 무려 다섯 걸음이나 뒤로 밀려 나갔다.
재차 광룡부를 휘두르려던 연호정은 순간 대경했다.
쾅!
가슴 앞에서 터진 장력에 그가 울컥 피를 토했다.
황룡기가 일어나며 체내로 침투하는 마기를 무섭게 해체했다. 약간의 내상 이외의 피해는 없지만, 전신이 삐걱거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다시 광룡부를 휘두를 틈은 없었다. 연호정의 좌장이 전방으로 향했다. 금룡번천장이었다.
퍼어어엉!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천교홍의 양손이 번천장력을 짓누르듯 휘감아 터트렸다.
놀랍기 그지없는 한 수였다. 천적, 상극이 분명한 무공을 정면으로 방어하지 않고 중간에서 휘감아 폭발시켜 충격을 삼 할 이하로 줄여 버렸다.
천하의 연호정조차도 저런 수법은 써 본 적이 없었다. 몇 수의 교환만으로 황룡기를 받아 낼 수법을 고안해 낸 것, 실로 마도의 대종사다운 기발한 발상이었다.
천교홍의 발이 대지를 찍어 눌렀다.
콰르르르르릉!!
무시무시한 진각이었다.
단순히 힘을 끌어올리거나 지력을 이용해 발경을 강화하는 진각이 아니다.
땅이 수직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갈라진 땅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마치 지옥의 유황불이 지상까지 솟구친 것처럼 보였다.
퍼퍼퍼펑!
연기를 따라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진각에 폭발하는 발경을 수직으로 담아 순차적으로 터트린 것이다.
효과적인 공격 수단인지를 떠나, 이것이 인간의 내공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러운 능력이었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휘둘렀다.
콰아앙!
수직으로 내리친 광룡부에는 붕산세의 힘이 담겨 있었다.
폭발하는 발경을 황룡기의 발경으로 뒤덮었다. 자욱하게 올라오는 연기와 발경이 스러지며 거꾸로 천교홍을 향해 몰아쳤다.
하지만 천교홍은 그 자리에 없었다. 놀랍도록 빠른 신법을 구사, 순식간에 연호정의 후측방에서 나타났다.
연호정은 재빨리 왼팔을 휘둘렀다. 팔꿈치로 천교홍의 상단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퍼버버벅!
연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교홍의 주먹이 순식간에 옆구리와 왼팔을 강타한 것이다.
황룡신왕공은 의심할 나위 없는 반마(反魔)의 무공이었지만, 그것도 힘 대 힘으로 겨룰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드높은 경지에 오른 깨달음을 녹여 맞상대를 피하고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콰앙!
연호정이 금룡진악권, 금룡번천장을 연달아 내쳐 천교홍을 밀어 내고 광룡부를 휘둘렀다.
번쩍!
잡아 휘두른 게 전부가 아니었다. 회피를 염두에 둔 공격, 광풍섬(狂風閃)이었다. 회전하는 광룡부가 어검의 비술을 타고 흘러 천교홍의 몸을 노렸다.
천교홍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엄청난 전투 감각이군.’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빈틈을 노려 공격했는데, 그걸 쳐 내고 어검의 비술을 이용해 보법과 신법을 뿌리부터 강제하려 한다.
상극의 무공을 지니고 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상대의 대응에 따라 유연하게 전투법을 바꾸고 있었다. 힘만 믿고 상대하는 반쪽짜리 무인이 아닌 것이다.
‘과연.’
놀랐지만 이내 수긍하게 된다. 전설로 회자되는 사색광인이라면 이 정도 실력은 보여 줘야 했다.
번쩍! 번쩍!
신들린 움직임으로 광풍섬을 회피해 낸 천교홍이 일순간 연호정의 코앞에서 나타났다.
상상을 초월하는 신법이었다. 압도적으로 빠른 것 같지는 않은데,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한 위치에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광혈교의 혈마행공(血魔行功)이었다. 혈교 역사상 대성에 이르도록 연마한 자가 다섯도 되지 않는다는 극상승의 경신술이었다.
천교홍의 주먹이 연호정의 가슴을 후려쳤다.
콰앙!
일발 타격 이후 거리를 벌리려던 천교홍은 순간 당혹감을 느꼈다.
우두둑!
고개를 젖히며 피를 뿜어내는 연호정.
그러나 그의 손은 어느새 천교홍의 오른팔을 잡고 있었다.
천교홍은 본능적으로 오른팔에 마제기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치이이이이익!
천교홍의 오른팔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더 강한 마기는 황룡기의 힘을 무식하게 증대시킬 뿐이었다. 쏟아지는 마제기를 벼락처럼 파훼한 황룡기가 순식간에 그의 오른팔을 뒤덮었다.
처음으로 천교홍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퍼억!
좌수 수도로 오른팔 어깨 부근을 끊어 낸 천교홍이 뒤로 물러났다.
화르륵!
연호정이 쥐고 있던 오른팔이 순식간에 황금빛 불꽃으로 휩싸이더니 그대로 가루가 되었다.
부우웅! 부우우웅!
연호정의 머리 위에선 광룡부가 횡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후욱.”
천교홍이 숨을 몰아쉬었다. 연호정 역시 호흡을 조절했다.
“역시 전설은 어디 가지 않는구나. 이렇게 빨리 대응…….”
그때였다.
연호정의 손이 천교홍을 향했다. 마치 장력이라도 뿜을 것 같은 동작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장력을 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온몸을 꽉 채우고 있는 황룡기였다.
화아아아악!
공격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진기를 뿜어내고 있는데, 언뜻 보면 그저 진기를 마구잡이로 소모하는 것 같았다.
의아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천교홍은, 순간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후욱!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던 풍성한 황룡기가 단숨에 천교홍의 주변을 둘러쌌다.
진기로 공기를 장악했다. 공기 중에 퍼진 황룡기는 서서히 회전하며 천교홍의 몸을 노렸다.
‘이런!!’
파아아악!
혈마행공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난 천교홍.
어느새 빛살처럼 날아간 광룡부가 천교홍의 몸에 작렬했다.
콰아앙!
피범벅이 된 천교홍이 땅에 처박혔다.
연호정이 숨을 몰아쉬며 다가갔다. 홀린 듯 멍하니 천교홍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죽어라.”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터억!
어느새 돌아온 광룡부를 손에 쥔 그가 쓰러진 천교홍을 향해 살기를 피워 올렸다.
“죽엇!!”
번쩍!
시커먼 섬광을 토해 낸 광룡부 일격에 천교홍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