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31화 (931/963)

931화. 대종사(大宗師) (6)

황석태는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저 멀리 신마림의 본진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은 메아리가 되어 이곳까지 들리고 있었다.

목숨 걸고 싸우는 도중에도 집중이 깨질 정도였다. 상상키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부주님.’

황석태는 연호정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가 걱정된다고 하여 벌어진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호정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고, 애초에 철기단은 그런 부대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돌진한다.’

천만다행히도 싸움은 철기단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황석태가 외쳤다.

“철기단은 교로진(巧路陣)을 준비하라!”

쩌저저저저정!

창검이 부딪치며 튀어 오른 불똥 탓에 일대의 공기가 탁해졌다.

진세를 보며 공방을 주고받던 철기단원들이 장창을 양손으로 쥔 채 거칠게 말을 몰았다.

쩌저정! 파바박!

꽉 조이듯 사방에서 일순간 몰아치는 창질에 혈마검객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퍼어엉!

황석태의 적룡창이 거룡창술(巨龍槍術)의 힘을 품고 전방 두 명의 검객을 찢어발겼다.

그것이 신호였다. 혈마진을 둘러싸고 압박하던 철기단원들이 일순 다섯 명씩 한 조가 되어 혈마진의 내부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퍼버버벅!

삼백에 가까운 철기가 육십 개의 조로 쪼개지며 혈마진의 곳곳을 찌르고 들어갔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강하게 압박하던 진법에서 소수로 침투하는 진법으로 바꾸는데, 그 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빨랐다.

혈마검객들은 당황했다. 그들의 검법과 마공은 어떤 대문파의 정예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지만, 철기단처럼 유연한 진법 변화를 경험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퍽! 푹! 콰득!

삽시간에 변화한 교로진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더 강한 힘이 아니라 ‘다른’ 힘으로 변화해 혈마대를 공략하는데, 당황하는 사이 무려 십여 명의 검객들이 목숨을 잃었다.

개개인의 무력은 단연 혈마검객들이 강했다. 애초에 하나하나가 절정고수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바, 단순 전력으로는 대문파 하나를 감당하기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철기단 역시 움직이는 대문파라 불릴 정도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전력은 본래 철기단 병력의 삼 할뿐이었다.

그 삼 할만으로 혈마대를 몰아치고 있는 것은 조직적으로 잘 형성된 진법과 유연한 변화, 강력한 압박감과 수장의 효율적인 명령 덕이었다.

‘그래도.’

황석태가 패율과 부선을 바라보았다.

철기단이 혈마진을 헤집는 순간 두 사람은 멀찍이 물러나 또 다른 빈틈을 찾고 있었다.

패율도 패율이지만, 부선의 무공과 안목도 대단한 것이었다.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패율보다 부족하나, 부족한 경험을 더 뛰어난 재능과 학습 능력으로 채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철기단도 혈마대를 상대로 이렇게 날뛰지는 못했을 것이다. 초절정고수 하나가 전쟁에서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 두 사람이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는 셈이었다.

‘만약 저 둘이 아니었다면 철기단의 사상자가 오십 명쯤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퍽! 퍼벅버벅!

대지에 발을 딛고 화려한 전투를 치르는 이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영역에서.

한 명의 천재 검사가 혈마검객들의 신경을 마구 분산해 주고 있었다.

황석태는 혀를 내둘렀다.

‘소부주님의 혈육이니 보통 재능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그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연지평이 있었다.

공중이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미친 듯한 몸놀림으로 혈마대 곳곳을 찌르고 들어간다.

내치는 검결은 단순했지만, 검에서 뿜어지는 경풍은 절묘하게 혈마검들의 신경을 분산했다. 힘을 실어 쳐 내면 손쉽게 박살 낼 수 있지만 무시하면 제법 타격을 입을 만한 위력의 검경(劍勁)을 수십 번씩 날려 대고 있었다.

내공도 대단하지만 그 섬세한 힘의 조율이 더 대단했다. 저 젊은 나이에 선보일 수 없는 지고한 검도(劍道)였다.

‘소부주님께서 왜 동생분을 희대의 천재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연지평의 재능이 연호정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연호정을 제외하면, 당금 무림에서 단연 최고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무종을 뚫자마자 저와 같은 신위를 보여 주다니, 천하에 누가 있어 저런 능력을 선보일 수 있겠는가.

‘저 몸놀림은 대체……?!’

연지평의 움직임은 역동적이지 않았다.

허공을 밟고, 허공을 터트리며 이곳저곳 움직여 얼마 안 되는 혈마검들의 공격을 피하는데, 그 몸놀림이 꼿꼿한 대나무를 보는 듯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양팔을 동시에 휘두르고 있지만, 마치 왼손으로 뒷짐을 지는 것처럼 보인다. 손에 쥔 검은 병장기가 아니라 붓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꼿꼿한 줏대를 지닌 선한 인상의 학자가 일필휘지로 붓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혈마검객들 몇몇이 검기를 쏘아 내 연지평을 위협했지만, 별로 급하지도 않은 몸놀림으로 피해 내니 그조차도 멋스럽고 고아했다.

‘천종운행비(天縱運行飛)라고 하셨지.’

최소의 내공으로 최대 효율을 내는 연가 최고의 신법.

연호정 역시 저와 비슷한 신법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같은 신법임에도 운용 방법은 전혀 달랐다.

연호정이 속도와 지구력을 신경 쓰는 편이라면, 연지평은 궁극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같은 무공을 두고도 해석이 이렇게나 다르다. 해석이 다른 것은 개개인의 성격 때문이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연지평의 신법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한계일 것이다.’

무극에 진입하지 않은 이상, 신법에 대한 깨달음이 아무리 높아도 오랜 시간 허공을 유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연지평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기도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한 번씩 허공을 박차고 튀어 오를 때마다 엄청난 양의 내공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황석태가 전면의 혈왕검과 그 너머,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혈마검들을 지휘하는 혈천검을 보았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승부를 내야 할 때였다.

히히히힝!

앞발을 들고 용울음을 터트린 기마가 일순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갔다.

황석태가 적룡신창을 양손으로 쥐었다.

퍼퍼펑! 퍼엉!

강력한 창격에 혈마검 셋과 혈왕검이 뒤로 마구 밀려 나갔다.

황석태가 외쳤다.

“원진!”

두두두두두두! 쩌저저정!

교로진으로 혈마대를 한차례 헤집고 나온 철기단이 재차 그들을 둘러싸는 튼튼한 방벽을 만들었다.

한순간 진이 와해되었으니, 옹기종기 모여만 있을 뿐 그럴듯한 기세도 뿜지 못한 채 당황한다.

황석태는 그것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적룡신창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힘을 불리는 신병이기, 혈왕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해라!”

번쩍!

벼락처럼 쏘아진 적룡창에 거대한 힘이 실렸다. 거룡창술, 거룡대포(巨龍大砲)였다.

콰르릉!

혈마검 다섯이 피를 쏟으며 튕겨 나갔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옆구리가 한 움큼 터져 나가는 등, 누가 봐도 전투 불능 상태였다.

쩌어어어엉!

엄청난 탄력으로 날아든 혈왕검이 황석태를 공격했다.

적룡창의 창대로 막았지만, 확실히 혈왕검의 검압은 대단했다. 황석태가 몇 수 위의 경지를 거닐고 있음에도 검의 위력 때문에 순간 주춤할 정도였다.

퍼퍼펑! 퍼어엉!

남은 혈마검은 사십여 명.

황석태가 막히자 패율과 부선이 강하게 치고 들어갔다. 그들의 뒤는 철기단이 봐주고 있었으며, 덕분에 일순간 전혀 다른 환경을 맞이한 혈마검들은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비켜라!”

빠르고 가벼운 창술로 혈왕검의 검력을 튕겨 낸 황석태가 빈틈을 발견하고 곧장 창을 찔러 넣었다.

쾅!

혈왕검이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밀려 나갔다.

‘이런!’

마신(魔身)을 이루었는데도 온몸의 관절이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무공의 무게감이 달랐다. 기마의 힘과 함께 몰아쳤다지만, 한순간 검을 들기 힘들 정도의 압력을 느낀 그였다.

‘피해야……!’

두두두.

황석태는 혈왕검을 무시하고 그대로 혈마검들을 몰아쳤다.

혈왕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나를 무시해?!”

그때였다.

쩌어어어어엉!

내리치는 일검에 천 근의 무게가 실린다.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막은 혈왕검은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아직 황석태의 창격이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와중에 무지막지한 검격을 받아 냈기 때문이었다.

“네놈은?”

혈왕검을 멀리 떨어트려 놓은 자.

그는 바로 연지평이었다.

“후욱!”

연지평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파괴적인 일검을 내치기 위해 온 힘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혈왕검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풋내 나는 애송이! 잘 걸렸다!”

번쩍!

혈왕검의 마검이 연지평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자를 무시하고 들어간 검격이었기에, 피하더라도 꽤 심한 타격을 받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틀렸다.

적어도 검(劍)을 휘두르는 한, 혈왕검에게 있어 연지평은 황석태보다도 까다로운 적이었다.

무종을 뚫기 전이라면 모르되, 뚫고 난 지금의 연지평은 지금껏 이룩한 모든 검도(劍道)를 현실로 구현해 낼 능력이 있다.

더하여, 무극수가 아니라면 어떤 상대의 검로라도 단숨에 파악할 만큼 그의 안목은 대단한 것이었다.

쩌저저정!

혈왕검의 눈이 흔들렸다.

마검격을 피한 이후 가볍게 올려 치고 내려치는, 나아가 좌우 사선으로 빠르게 휘두르는 검격.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 같은데 그 압력이 굉장했다. 검 자체의 위력은 자신보다 낮은데도 뚫고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지평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 당신은 나하고만 놀 수 있어.”

“애송이 새끼가 감히!”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마.”

연지평의 눈이 검극사기로 새파랗게 물들었다.

“내가 살기 위해, 당신을 죽이겠다.”

쩌저저저저정!

두 검객의 화려한 충돌.

그들을 뒤로한 채 폭풍처럼 기마를 몬 황석태는 온 힘을 다해 적룡창을 휘둘렀다.

쩌저저정! 퍼어엉! 퍼엉!

신들린 듯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적룡창은 그 이명처럼 한 마리 용과 같았다.

힘으로 찍어야 할 때와 단순히 위협해야 할 때, 경풍으로 밀어 내야 할 때와 허초를 섞어 공격해야 할 때를 한순간에 판단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룬다.

황석태의 중앙 돌파에 혈마검들이 좌우로 찢어졌고, 찢어진 혈마검들은 패율과 부선, 그리고 거대한 방벽이 되어 버린 철기단원들의 공격에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죽어 갔다.

“이놈!”

쩌어어어엉!

혈마대 최고의 고수, 대주 혈천검의 공력은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와도 같았다. 기마의 무게까지 합쳐 달려든 황석태마저도 주춤할 정도였다.

파아아악!

기마를 타고 상대할 만한 고수가 아니었다. 안장을 박차고 허공을 난 황석태가 혈천검을 향해 창대를 휘둘렀다.

까아아아앙!

적룡창 못지않은 마병이 분명했다. 굵은 창대로 후려쳤는데, 얇은 검날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황석태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바쁘다. 빨리빨리 죽어라!”

“닥치거라!”

두 고수의 창검이 미친 듯이 얽히며 강력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푸화아악!

혈마대의 조장들을 골라 죽인 패율과 부선은 단숨에 혈마검들을 뚫고 혈천검의 뒤를 잡았다.

혈천검의 눈이 흔들렸다.

황석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일 대 일을 바란 건 아니겠지?”

쩌어어엉! 퍽! 푸화악!

혈천검의 몸에 적룡창과 단창이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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