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화. 대종사(大宗師) (5)
후우우우.
나직이 쏟아 내는 한숨에 희뿌연 연기가 춤을 추었다.
거대한 도끼를 손에 쥐었지만,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초토화가 된 대지를 밟고 있지만, 흙의 감촉을 느낄 수 없었다.
바람도, 기온도, 시원하면서도 텁텁한 청해의 공기도 인식할 수 없었다.
연호정의 황금빛 신안(神眼)은 오직 천교홍을 주시하고 있었다.
크르르릉!!
몸을 크게 부풀리는 황룡의 아가리에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혁련휘를 향한 울음이 아니었다. 주인의 의지에 반할 정도로 마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황룡은, 지금 이 순간 연호정의 의지하에 완벽하게 통제되어 천교홍을 주시했다.
‘광혈교주.’
광신삼교의 하나.
비록 죽어 버린 혼(魂)을 끌어온 반쪽짜리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삼교 중 하나의 주인이었던 자를 대하는 연호정의 심경은 그야말로 복잡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심경 속에서도 유독 도드라지는 감정 하나는 분노일 수밖에 없었다.
광기와 살기로 얼룩진 과거의 나를 버렸음에도, 하늘이 내린 운명의 적들 중 하나를 목도하니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차가운 분노였다.
들끓는 감정 속에서도, 연호정의 이성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간을 보는 건 의미가 없어. 상대의 습관을 파악하거나 빈틈을 노리는 것 따위, 저놈을 상대로는 아무 소용 없는 짓이다.’
연호정은 천교홍의 힘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나보다 위다.’
확실하게 위다.
반쪽짜리 힘을 발산하던 육사제장과는 또 달랐다. 모르긴 몰라도, 저자는 육사제장보다 훨씬 더 현역에 가까운 힘을 구사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오직 공격만이 있을 뿐!’
옆에서 혁련휘가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연호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의 정보도, 자극도 필요치 않았다.
해야 할 것은 오로지 하나.
쿠르르르릉!!
극한까지 밀도를 높인 황금빛 진기가 그의 두 다리를 지나 발바닥에 모였다.
연호정의 자세가 낮아졌다.
그리고.
쾅!
대지를 밀어 내며 날아가듯 돌진한 연호정이 힘찬 일장(一掌)을 내질렀다.
황룡신왕공을 이룬 이후 최초로 만든 무공인 금룡이무의 번천장이었다. 하지만 이번 번천장은 지금까지 펼쳤던 것과는 뭔가가 달랐다.
후우우우웅!
더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데도 더 단단했고, 더 폭발적이었다.
콰아아아앙!
대전의 잔해가 또 한 번 부서지고, 절벽에 박힌 천교홍의 육신이 더욱 움푹 파묻혔다.
콰릉! 콰르릉!
절벽에서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손바닥 모양으로 파인 절벽 속, 천교홍의 팔 하나만이 외부에 드러났다. 나머지 몸뚱이는 절벽에 그대로 파묻힌 것이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쳐들었다.
어쩔 수 없다며 공격을 시도하려던 혁련휘는, 순간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은 역장에 놀라서 물러났다.
콰르릉! 콰르르르릉!!
대지가 진동했다.
산봉우리 하나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초토화된 대지 곳곳을 누비는 황금빛 힘은 마치 싯누런 벼락 줄기를 보는 것 같았다.
증폭되는 황룡기.
상단전의 힘을 극한까지 뽑아 올린 연호정의 무공은 파멸의 위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위력을 살리기 위해 황룡기가 증폭되니, 그것은 연호정의 내공력이 한 단계 영구적 상승을 불러일으킨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광풍구룡살.’
광룡부를 쥔 양팔에 굵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무참.’
부우우웅!
춤추듯 사선으로 휘둘러지는 광룡부.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빛의 초승달이 절벽에 새겨진 거대한 손바닥 자국 한가운데로 쏟아져 들어갔다.
콰아아아앙!
파괴력, 절삭력, 전파력 모든 것이 궁극에 달한 일참이었다.
혁련휘는 그 공격을 보며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강하다!’
본인의 역량 이상의 힘을 내고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막강한 일격이었다. 오색지옥공을 불러낸 지금의 몸으로도 쉽사리 막기 힘들 듯했다.
그때였다.
연호정이 광풍구룡살의 이격, 승공세를 준비하는 순간.
퍼어어어엉!
절벽 한가운데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나더니, 헤아릴 수 없는 돌의 파편들이 흩날렸다.
연호정이 하단에서 상단으로 광룡부를 휘둘렀다. 승공세였다.
번쩍! 콰르르르릉!!
그 많은 파편이 저희끼리 부딪치더니, 이내 장대하게 회전하며 하늘 높이 치솟았다.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무공이었다.
사람들은 성천의 고수들에게 무신(武神)이라는 이명을 붙여 주었지만, 그들이 진정 신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호정과 천교홍의 무공을 본 이들은 무릎을 꿇고 신의 재림이라 외칠 것이다. 재해와도 같은 위력, 신화 속 괴력난신(怪力亂神)이 아니라면 보여 줄 수 없는 초인의 힘이었다.
“대단하구나!”
쿵!
그처럼 막강한 무공을 받아 냈음에도 천교홍은 죽지 않았다.
왼팔은 부러져 덜렁거리고 몸에도 길고 굵직한 자상이 새겨졌지만, 흘러나오는 마기의 밀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상처의 회복 속도였다.
우두둑! 우둑!
부러진 왼팔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본래대로 복원되었다. 벌어진 상처는 저절로 입을 닫더니 이내 멀쩡해졌다.
상식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 역천의 끝, 불사(不死)를 지향하는 마기가 궁극에 이르면 어떤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지를 천교홍이 증명하고 있었다.
파아아앙!
연호정은 천교홍의 회복에 놀라지 않았다.
그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높이 뛰어올라 양손으로 쥔 광룡부를 일도양단의 기세로 휘둘렀다.
광풍구룡살 삼초, 붕산세(崩山勢)였다.
천교홍의 눈빛이 돌변했다.
위이잉! 위이이이잉!
꿈틀거리는 대자연의 기운이 무서운 속도로 몰려들며 거대한 힘을 압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압축된 힘은 끊임없이 광룡부로 유입되고 있었다.
자연기와의 동조였다. 그 자신이 지닌 신공의 힘과 대자연의 기를, 육체를 매개로 하여 한데 묶어 내치는 가공할 일격이었다.
천교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탈마(脫魔)?!’
아니다. 저것은 진정한 탈마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연기와의 동조는 탈마로 향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탈마의 초입을 건드리는 무공이었다.
‘이럴 수가. 산의 중턱을 거니는 자가 어찌 정상의 힘을 끌어와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천교홍은 연호정의 눈을 보았다.
찬연한 황금빛으로 물든 두 눈.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황룡의 몸뚱이.
천교홍의 양손이 마제신장(魔帝神掌)의 공력을 뿜어냈다.
번쩍!
폭음은 없었다. 두 사람의 무지막지한 힘이 부딪치며 소리조차 잡아먹었다.
고요한 세상 속, 모든 것이 가루가 되었다. 대전의 잔해도, 멀리 떨어진 궁전의 외벽도, 나아가 무너지고 갈라진 절벽의 표면도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쾅! 쾅!
무소음의 세상 속에서 홀로 폭음을 터트리는 것은 혁련휘였다. 흡정마공으로도 충격파를 상쇄할 수가 없어서 파천월도와 장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훅!
터져 나가던 충격파가 이내 섬뜩한 소리와 함께 재차 응축되었다.
한 점으로 모여들어 응축된 힘이 폭발한 것은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콰드드드드득!
소름 끼치는 광풍과 함께 바닥으로 깔린 힘이 산봉우리 전체에 실금을 만들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정 봉우리 하나를 부술 수도 있는 힘이었다. 말 그대로 신의 힘이다.
“쿨럭!”
이십여 장을 뒤로 튕겨 나간 연호정이 무릎을 꿇고 피를 토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내상은 심하지 않았다. 그의 무의식이 퍼져 나오는 충격파를 상쇄하길 원했고, 황룡기는 또 한 번 극한까지 치고 올라와 주인의 의지를 충실하게 이행했기 때문이었다.
쿵!
다시 한번 광룡부를 짚고 일어난 연호정.
화아아아악!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초월적인 공격을 구사했음에도 힘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격렬함으로는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황룡신왕공은 기이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쿠르릉! 쿠르르릉!
지금껏 상단전이 발달한 고수들은 연호정의 기세를 읽고 거대한 황룡을 떠올렸다.
그것은 환상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용이라는 게 신화 속에 존재하는 신수일 뿐이다. 사색의 기운을 방출하는 사신기와는 달리, 황룡신왕공은 깨달음이기 때문에 그처럼 장엄한 기파로 형태를 갖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황룡공은 마치 사신기처럼 자신이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라는 걸 과시했다.
연호정의 등 뒤에서 똬리를 튼 거대한 황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
혁련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호정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아니 천하의 어떤 무신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힘이 모여들며 신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또한 진기의 어우러짐으로 탄생한 기의 형태였다. 그래서 더 놀랍다. 사상 최악의 마공이라는 오색지옥공으로도 저처럼 거대한 지옥수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응?’
그리고 혁련휘는 깨달았다.
‘고금천지에 지옥공처럼 현현환상(顯現幻像)이 가능한 무공이 또 있을 수 있는가?’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현현환상은 구결과 깨달음의 일치로 구현된다. 구결대로 진기를 운용해도 깨달음이 그에 이르지 않으면 지옥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것은 무엇인가.
저 황금빛 거대한 용을, 환상이 아닌 실제로 불러낸 연호정의 무공은 무엇인가.
저 무공을 보며, 왜 이빨을 드러내었던 지옥수가 환희로 울부짖는가.
“설마!!”
콰앙!
폭발의 여파로 땅에 묻혔던 천교홍이 마제공(魔帝功)을 터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성치 않은 상태다. 놀랍게도 마제진기로도 회복이 더뎠다. 일대의 자연기마저 장악한 황룡기로 인해 회복에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랬군.”
경악으로 물든 천교홍의 얼굴.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온 천하에 마제진기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은 없어. 설령 오색지옥공으로도 상대는 가능할지언정 파훼는 불가능하지.”
쿵!
어긋난 무릎뼈를 최우선으로 맞춘 그가 자세를 바로 세웠다.
“단 하나의 무공을 제외하면 마제공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천교홍이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제정신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시커먼 동공을 넘어 흰자위까지 금빛으로 물든 연호정의 모습은 무공의, 아니 황룡의 화신(化神)과도 같았다.
“네놈이었구나.”
쿵!
앞으로 한 발 내디딘 천교홍.
얼마 남지 않은 수명까지 깎아 먹으며 마제공을 독려하니, 황룡기의 방해에서 벗어난 마제공이 그의 몸을 빠르게 정상화시켰다.
천교홍이 버럭 소리쳤다.
“네놈이었어! 수백 년을 숨어 살던 사색광인이 이제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구나!”
우우웅! 우우우웅!
천교홍의 목소리는 연호정의 귀를 마구 울리고 있었다.
“본교, 아니 혈교 최악의 배신자! 천년 혈교의 발자취를 지워 버린 악마! 역사를 뒤바꾼 도둑놈이자 파멸의 씨앗!”
고막 깊숙이 파고드는 목소리.
천교홍을 죽이는 것 이외에 아무 자극도, 정보도 받지 않았던 연호정은 사색광인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부터 오감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배신자라고?’
푸스스스스.
천교홍이 또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단 두 걸음으로 몸과 마공을 완전하게 회복한 그가 시커먼 어둠을 휘장처럼 둘렀다.
“혈옥(血玉)을 훔쳐 달아난 것만으로도 만고의 역적이라 할 만하거늘, 죽지도 못한 반쪽짜리 마귀가 되어 이리 나타나다니!”
“혈옥……?”
“부끄럽지도 않느냐, 이놈!”
번쩍!
천교홍의 두 눈도 연호정의 눈처럼 흰자위까지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네놈의 혈관에 피다운 피가 흐르고 있다면, 당장 혈옥부터 내놓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