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29화 (929/963)

929화. 대종사(大宗師) (4)

콰아앙!

막원의 눈이 흔들렸다.

도대체 무엇을 느낀 것인지, 야혁의 움직임이 한순간 눈에 띄게 산만해졌다.

막원에게는 다행이었다. 덕분에 야혁의 몸에 단검을 여섯 방이나 더 박아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크아아아악!”

무시무시한 마성을 터트린 야혁이 느닷없이 몸을 돌려 신마림의 본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몇 번을 베이고 몇 번을 찔렸음에도 달려 나가는 속도가 눈이 돌아갈 만큼 빨랐다.

‘도주하는 게 아니야.’

막원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도주가 아니라 무언가를 위해서 이 싸움을 포기한 것이다.’

막원이 외쳤다.

“황 단주! 나는 적을 쫓아가겠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없을 수밖에 없었다. 저쪽도 치열한 생사결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아아아악!

천무병장공이 점차 제힘을 잃어 갔다. 몸에 불필요한 피로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막원은 달렸다. 달릴 수밖에 없었다.

지켜야 할 것은, 책임져야 할 것은 막원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연제!’

* * *

묵비가 외쳤다.

“저, 저게 뭐예요?!”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두근두근!

오색지옥공이 풀려 나오며, 봉인되었던 지옥수가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혁련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황룡기가 재차 성을 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드드드득!

방원후의 육신이 변화하며,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밀도가 무섭게 깊어졌다.

그 밀도는 순식간에 무극의 영역에 진입하고도 끝도 없이 깊어졌다. 도대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엄청난 마기의 밀도 때문에, 연호정은 황룡신왕공이 강제로 개방되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억눌러야 했다.

당관이 외쳤다.

“죽여!”

화아아아악!

그의 손에 강렬한 독기가 응축되었다.

방원후가 풍기는 마기는 혁련휘의 그것과도 달랐다. 혁련휘의 마기는 잡스러웠지만, 그것이 중원 무림에서 인식하는 마기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방원후의 마기는 차원이 달랐다.

마기가 아니라 악기(惡氣)다. 존재 자체가 악이었다. 저 기운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간 온 천하가 불바다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떠오를 만큼 끔찍한 기운이었다.

당관이 삼양신장을, 묵비가 오연발의 무형탄을 쏘아 냈다. 두 초절정고수의 합공, 무극을 뚫은 고수라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쏟아진 것이다.

하지만.

훅!

두 고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삼양신장의 파괴력 넘치는 장력도, 묵비의 신들린 무형탄 다섯 발도 방원후의 기파에 닿자마자 별다른 소리도 없이 소멸되어 버렸다.

아니, 그것은 소멸이 아니었다. 그 기운을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인지 방원후의 육체 변이 속도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옥청이 외쳤다.

“공격하지 마세요! 마기가 더 빠르게 변환됩니다!”

혼원결을 익힌 그는 연호정만큼이나 확실하게 방원후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이익!”

당관과 묵비가 이를 악물었다.

혁련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건드릴 수 없다. 그리고 건드려서도 안 돼.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걸 막았다간 이름 모를 한 아이의 혼도 계속 이승을 떠돌게 될 것이다.”

“……?!”

“건드리지 말고 놔두게.”

도대체가 알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당관이 외쳤다.

“이보시오, 선배!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이오? 혼을 끌어오다니? 불사는 또 무엇이오? 선배가 하는 말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소이다!”

혁련휘가 쓰게 웃었다.

“자네들에게 설명하려고 한 말이 아닐세. 그저 저 몸 안에 깃든 귀신(鬼神)의 기억을 자극하기 위해 멋대로 떠든 것뿐이야.”

“선배!”

“자네들이 끼어들 싸움이 아니니 멀리 물러나게. 이 싸움은 나의 몫이야.”

그때, 연호정이 광룡부를 들었다.

쿵!

바닥을 찍은 광룡부에서 황금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선배님의 몫이 아닙니다.”

지이잉! 지이이이잉!

황금빛으로 명멸하는 연호정의 눈동자는 그야말로 인간의 그것 같지 않았다. 황룡신왕공을 연성한 이래, 가장 강력한 기운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천하 모두의 일이지요.”

연호정을 보던 혁련휘가 옥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옥청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혼원기는 한눈에 봐도 위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기를 마주하고 힘을 불리는 항마의 신공이지만, 방원후와 혁련휘가 발산하는 상식을 초월하는 기운은 상극의 힘마저도 무위로 만들어 버렸다.

아니, 단순히 힘을 못 쓰는 것을 넘어 위험했다. 혼원기가 폭발하면 그 자신의 육신도 멀쩡할 수가 없을 테니까.

“저 젊은 도사를 데리고 백 장 밖으로 물러나게. 자칫 잘못하다간 도사의 몸이 폭발할 것이네. 자네들 역시 살아남기 힘들겠지.”

연호정이 당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관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결국 그는 옥청을 이끌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묵비는 물러나기 전에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단호하고도 신비로운, 그리고 위태로운 눈으로 방원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술을 깨문 묵비가 당관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

쿠르르르릉!!

모든 마기를 개방한 방원후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흐으으읍! 후우.”

깊게 들이쉬는 숨이 온몸의 신경을 일깨우는 듯하다.

“오랜만이구나, 속세의 공기는.”

연호정은 그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키는 연호정만큼 커졌고, 골격은 일국의 장군처럼 떡 벌어졌다. 기골이 장대하다는 말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축골공!’

그렇다. 저것은 묵로의 축골공과 같은 무공이었다.

하지만 같으면서도 몹시 달랐다. 아무리 몸의 골격을 줄이고 늘릴지언정, 피부의 노화까지 손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방원후는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했다. 얼핏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중후해진 목소리에 조금 전 사부를 부르짖던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것이 듣는 섬찟하게 만들었다.

혁련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네놈은……?”

이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익숙함을 느낀다.

그 익숙함은 기운이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방원후의 얼굴, 그 생김새와 골격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설마 천씨인가?”

“으음?”

그제야 혁련휘를 발견한 것처럼, 방원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래, 그럴 수밖에 없지.”

방원후가 미소를 지었다.

끔찍한 마기를 온몸에 두른 사람답지 않은, 너무나도 자애로운 미소였다.

“저 대륙의 천한 짐승들이 아닌, 성스러운 마의 피를 이은 존재가 아니면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나를 끌어내기는 불가능하겠지.”

기분 탓일까?

말을 하면 할수록, 방원후의 목소리에서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특유의 음성이 점차 사라지는 듯했다.

“신마림이 초토화되었구나. 이 정도 광경은 능히 예상했다만, 이 상황에 내가 깨어날 줄은 몰랐는데.”

“…….”

“아무래도 반쪽의 성공 같군. 그나마 다행인가?”

혁련휘의 눈이 번뜩였다.

“네놈은 누구냐?”

“음? 허허, 그래. 아직 내 이름도 밝히지 않았군.”

방원후였던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천교홍(天橋鴻)이라 한다.”

역시 그랬군.

혁련휘는 광혈의 미친 작태에 치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천씨 성을 지닌 자들의 광기 어린 목적의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나는 천교홍이다. 천교홍일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 나를 정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후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영면에 든 천씨 일가의 한 사람일 뿐이다.”

후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냥 넘기기 힘든 말이었다. 혁련휘에게도, 연호정에게도.

그 순간 혁련휘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광혈의 전대 교주…….”

연호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천교홍이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뭐?”

“광혈교의 교주는 언제나 하나다. 전대, 전전대의 의미가 없어. 그저 그 자리를 잠시나마 맡았던 여러 마리의 짐승 중 하나였을 따름이다.”

기묘한 어조였다. 스스로를 짐승이라 칭하면서도 조금의 씁쓸함도, 자조도 보이지 않았다.

“광혈교주는 언제나 하나. 최초의 일 대(一代)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

“무슨 개소리를…….”

“네가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천교홍의 미소가 짙어졌다.

“내 먼 조카여.”

천교홍은 조카라고 하였다.

혁련휘의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를 조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비현실적인 일을, 광혈교는 해내었다.

‘육사제장!’

연호정은 당가에서 싸웠던 광혈의 육사제장을 떠올렸다.

제대로 된 무극의 힘을 내보이지 못했던 반쪽짜리 고수. 초절정고수를 압도할 수는 있으나 진정한 무극수라 불리기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던 자.

그러나, 그것은 육사제장이 깃든 몸이 이전의 자신이 다루던 몸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혼과 백의 불일치다. 그래서 그 육신도 썩어 가지 않았던가.

“말 같지도 않은 호칭은 집어치워라. 역겹다.”

“허허, 보통 성질머리가 아니로고. 좋다. 원한다면 신마림주라 불러 주마.”

천교홍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이승에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괜한 일로 기분 잡치는 일은 없어야지.”

죽는다는 소리였다.

혁련휘가 아니라 그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점의 절망도, 다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삶과 죽음을 초월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네놈의 기분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쿠르르르릉!!

혁련휘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파천월도의 시커먼 마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오색지옥공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이미 몸 안에 수십 명의 마기를 담고 있는데도, 거기에 성마의 힘까지 흡수한다. 강호 무림 최강에 가장 가깝다는 마선의 깨달음이 아니라면, 언감생심 뉘라서 이런 능력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천교홍의 눈이 번뜩였다.

“심상치 않은 힘이군. 과연 대단하다. 흡정마공을 새로운 영역으로 끌어올렸어.”

쿠르릉! 쿠르르릉!

“그토록 비참한 꼬락서니가 아니었다면 현역 때의 나라 해도 승리를 장담키 어려웠겠다. 천재의 피를 이은 육 대(六代)라…… 네 자식들도 너 못지않은 괴물이겠구나.”

“닥쳐라.”

크허어엉!

혁련휘의 등 뒤로 거대한 짐승의 형상이 떠올랐다.

천교홍의 안색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이 마공은 설마?!”

“이승에 있을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 어차피 떠날 몸, 너희를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갈 것이다.”

“네놈, 오색지옥공을 익혔단 말이냐?!”

혁련휘가 마성을 터트렸다.

“이승에 있어선 안 될 놈들끼리 손잡고 저승으로 가자꾸나!”

그가 파천월도를 휘두르려던 찰나였다.

“시끄럽군.”

황금빛 찬연한 폭풍이 천교홍을 향해 들이닥쳤다.

번쩍! 콰르르릉!

광풍구룡살에 맞은 천교홍의 육신이 무너진 대전의 잔해를 완전히 파괴하고 절벽에 박혔다.

혁련휘의 오색마안(五色魔眼)이 흔들렸다.

“이놈! 이 싸움에 끼어들지 마라!”

“혓바닥만 긴 노친네는 말할 기운이 있으면 내 싸움이나 도우시오!”

“뭐, 뭐라고?!”

황금빛 살기로 가득한 두 눈을 매섭게 치켜뜬 연호정.

“저 개새끼가 광혈교주였다면, 이 싸움은 더 이상 당신 것이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