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화. 천적(天敵) (5)
화아아아악!
금룡진악권, 금룡번천장을 연이어 구사하는 연호정의 공격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퍼퍼펑!
공간이 비틀어질 정도로 마기를 집약시켜 내친 무형마환공의 공력이 속수무책으로 부서졌다.
번쩍! 번쩍!
두 사람의 안광이 동시에 불을 뿜는다.
묵로가 무무마안을 구사하려는 순간, 연호정의 사신귀안이 저절로 발동되며 흘러나오는 상단신기를 차단했다.
전혀 다른 효과를 내는 상단의 무공이었지만, 상단전이 지닌 초월적인 힘은 같다.
묵로의 의지는 강했고, 연호정의 의지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는 것 또한 서로가 똑같았다. 상대의 섬멸을 위해 모든 것을 건 두 사람, 초고수들의 집중력이 첨예하게 솟구치고 있었다.
퍼어어어엉!
묵로의 손끝이 연호정의 얼굴을 스쳤다.
연호정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는 곧장 자세를 낮춰 코앞에서 번천장력을 터트렸다.
콰앙!
삼 장이나 뒤로 날아간 묵로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유령보로 일순간 접근하여 기습과도 같은 공격을 감행했다. 육신을 보호하는 마기의 밀도가 낮아지니, 상대의 장력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괜찮다. 속이 쓰렸지만,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
그때, 연호정이 그의 좌측방에서 나타났다.
‘기가 막히는군.’
내치는 주먹에 활화산 같은 힘이 서려 있다.
이제는 어느 정도의 힘으로 공격을 막아야 하는지 감이 온다. 똑같은 힘으로는 무조건 뚫린다. 최소한 반 배의 공력을 더해야 연호정의 무공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이다.
퍼어어엉!
연호정의 주먹을 막아 낸 묵로는 곧장 더 강한 공력을 집어넣어 공격을 감행했다.
쾅!
처음으로 연호정의 몸이 뒤로 밀려 나갔다.
한 수의 차이란 단순히 내공의 질이 더 높다거나 상단전 운용을 더 잘한다는 수준이 아니다. 내공의 질과 양은 물론 무공을 구현하는 방식, 보는 눈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이다.
비로소 묵로는 깨닫는다. 연호정은 그야말로 천적(天敵)이라 할 만했지만, 그것은 서로가 익힌 무공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얘기다.
무공과 하나가 된 것을 넘어 무공이라는 개념마저도 초월하기 시작한 고수라면 상극이라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 법.
훅!
연호정의 품으로 파고든 묵로의 몸이 확 낮아졌다.
안 그래도 빨랐던 몸놀림이 더 빨라졌다. 연호정의 무릎이 포탄에서 쏘아 낸 화탄처럼 날아가 묵로의 얼굴을 노렸다.
콰앙!
무릎과 손바닥, 진기와 진기가 부딪치며 막강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반경 오 장 너비의 땅이 푹 꺼지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신형도 흔들렸다.
그때, 묵로의 눈이 반짝였다.
훅!
자세를 바로 세우려던 연호정은 순간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이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마기가 서리지 않은 압력이었다. 황룡기로 가득 찬 육신이라면 손쉽게 찢고 벗어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예상외의 일격이라는 점이었다.
‘이건?!’
콰아아앙!
빈틈을 놓치지 않은 묵로의 무형마환장이 연호정의 가슴에 그대로 적중했다.
이번 전투에서 처음으로 직격타를 성공시킨 묵로였다. 피를 토한 연호정이 땅을 갈며 오 장이나 밀려 나갔다.
‘역시!’
파악!
한번 몰아붙였으면 반격의 틈을 주지 않는다.
유령십팔보로 접근한 그가 무형정권, 무형마환장의 연환 공격을 감행했다. 연호정이 금룡이무를 펼치던 것처럼 그 역시 벼락과도 같은 진기 운용으로 권장을 몰아치는 것이다.
콰콰쾅!
연호정이 연신 뒤로 밀려 나갔다.
황룡신왕공은 무형마환공의 상극이라, 치고 들어오는 발경을 확실하게 분해하여 막아 내고 있지만 그 충격파는 고스란히 연호정이 감당해야만 했다.
‘끝이다, 이놈!’
묵로의 손끝이 단숨에 연호정의 목젖을 노리고 쏘아졌다.
그때였다.
‘……?!’
찰나의 순간, 묵로는 연호정의 눈이 너무나도 차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순간 기울어진 승부. 싸움이란 이런 것이다. 한 번의 빈틈,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생사결이다.
한데 왜 연호정의 눈빛은 저렇게 차분할까? 아무리 봐도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묵로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상단전의 신기로 운용되는 술수 따위가 아니었다. 연호정의 저 차분함이, 경험 많은 묵로의 신경이 알려 주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회수!’
파아아아아악!
온 힘을 다해 내친 공격을 회수하니, 음속의 벽을 넘은 움직임에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퍼어어엉!
두 사람이 피를 토하며 제각기 후방으로 물러났다.
극에 이른 내공 방벽은 두 사람의 육신을 안전하게 지켜 주었다. 충격파 그 자체의 힘 때문에 내부가 흔들렸지만, 이 정도로는 전투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 그래?”
입가의 피를 닦으며, 연호정이 말했다.
“내가 그렇게 두렵나?”
“……그럴 리가.”
쿠르르르릉!!
묵로의 주변 풍경이 마구 일그러졌다. 무형마환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금방 끝내 주마.”
파아아아아아앙!
더 이상 간을 보는 것은 필요 없다. 직선으로 날아간 묵로가 왼손은 하늘로, 오른손은 허리 뒤로 밀어 장전했다.
쿠구궁!
순간 연호정의 몸이 다시 한번 덜컥거렸다.
무형마환공의 마기로 운용되는 압력이 아니었다. 무형마환공의 압마중벽(壓魔重壁), 그 기공술의 구결만 따와서 상대가 선 땅 주변을 강력한 압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었다.
마기로 운용되지 않으니 이전처럼 제한 없이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한순간 비틀리는 연호정의 신형, 묵로는 이번에야말로 상대의 목숨을 끊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끝이다!’
그가 무형정권 최강의 살초를 내치려는 순간이었다.
‘……!!’
속도가 느려졌다.
세상이 느려진 건지, 내 몸과 인식만 느려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의도한 속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왜?!’
순간 묵로는 연호정의 얼굴에 드리워진 묘한 표정을 보았다.
웃음에 가까운 표정. 스스로도 신기한 것인지 아니면 감탄한 것인지 모를, 어떤 의미인지 정의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이내 묵로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연호정의 왼손에 황금빛 막강한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돌풍을 일으키는 금빛 기운은 지금껏 본 적 없는 밀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건 설마?!’
연호정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엄청난 진각인데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묵로는 무형정권을 회수하고 마환장으로 변환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전신 혈도를 벼락과도 같은 속도로 오가던 진기가 툭툭 끊어지고 있었다. 마환공의 공력이 장심에 머물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진기 운행의 흐름 자체가 유지되지 않았다. 상대의 공격에 직격타를 당한 것도 아닌데, 온몸이 무겁고 행동은 굼떠졌다.
‘압마중벽!!’
금룡번천장이 서둘러 가슴을 막으려는 묵로의 오른손을 부러트리고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날아간 묵로가 십여 장 밖의 건물을 뚫었다.
번쩍!
연호정의 신형이 어느새 건물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신기(神技)의 경공술이었다. 황룡신왕공으로 진화하기 전, 주작공의 혈익휘천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기실 연호정에게는 더 빠른 속도가 필요치 않았다. 속도를 올리지 않아도 넘쳐흐르는 황룡기가 상대의 두 발을 대지에 묶어 놓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어지간해선 과격한 속도를 위해 극단적인 내공 소모를 감수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 그가 이러한 속도를 낸 것은, 한순간 얻은 깨달음 덕분이었다.
건물을 부순 충격에 비틀거리던 묵로는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섬뜩한 것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적의 기도였다.
‘이럴 수가!’
언제 여기까지 도달했는가?
유령십팔보보다 빠른 속도였다. 한 수 위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빨랐다. 정녕 이것이 인간의 육신으로 구사할 수 있는 속도인가 싶을 정도였다.
묵로가 다급하게 몸을 회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쿠구구궁!
환상과도 같은 굉음이 들려온다.
일자로 궤적을 그리던 주먹이 하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속도도 느려졌다.
어느새 묵로의 측방으로 이동한 연호정이 그의 복부를 향해 무자비한 각법을 펼쳐 냈다.
쾅! 콰르르릉!!
땅에 깊은 고랑을 새기며 밀려 나간 묵로가 대량의 선혈을 토해 냈다.
오장육부가 남아나지 않는 것 같았다. 마기가 역류하여 전신 혈도를 뒤집어 놓기 시작했다.
‘이!’
묵로는 섬뜩한 고통을 참고 땅에 손을 짚었다.
허리를 펴고 다음 공격을 대비하려는 순간.
퍼어어억!
소름 돋는 파육음과 함께 그의 오른팔이 어깻죽지부터 뜯겨 날아가 버렸다.
중심을 잃은 묵로가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허억! 허억!”
묵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순간 호흡까지 흐트러졌다. 한번 망가진 호흡은 기를 써도 본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내공 운행이 점점 더 느려졌다. 툭툭 끊어지던 진기가 혈도 이곳저곳에서 순행과 역행을 반복했다.
묵로가 멍한 눈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연호정의 안색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묵로에 비하면 멀쩡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네놈……?”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기습, 한 번의 빈틈.”
“…….”
“승부의 추가 기울어지는 것은 순간이지. 아니 그런가?”
묵로가 피를 토하며 외쳤다.
“네놈! 네놈이 어떻게 압마중벽을 알고 있느냐?!”
“역시 그거였나?”
“설마…… 무형마환공을 알고 있었던 거냐?”
연호정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렸다.
“기괴한 술수를 쓰더군. 압력, 혹은 중력(重力)이라고 해야 하나? 일정한 영역을 강한 압력으로 내리눌러 움직임을 봉쇄하거나 느리게 만든다…….”
“……!”
“비슷한 술수는 써 본 적이 있지만, 무극수들에게도 통할 만큼 강력한 힘은 처음 보았다. 대단했어.”
묵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걸 이 짧은 순간에 따라 했다고?!”
그렇다.
연호정을 공격하던 묵로의 신형이 느려진 것도, 그의 공격이 느려진 것도.
나아가 연호정이 한순간 초월적인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압마중벽의 술수를 응용한 것이었다.
“말도 안 돼! 그것을 어찌……!”
“이 정도 위력은 아니겠지. 다만 상대가 너라서 훨씬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군.”
“……!”
“개선의 여지는 있지만, 위력을 더 살릴 수는 없겠어. 여기까지 한계야. 하긴, 이보다 더 강한 압력으로 내리누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진정 신(神)의 힘이라 할 수 있겠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다만, 무당의 태극발경처럼 내 무공의 핵심에 녹일 수는 있을 것 같다. 네놈이 일부러 보인 빈틈에 압력을 조작해 놓은 것과 달리 말이야.”
“이, 이놈!”
“내게는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는 듯하다. 무공은 그 자체로 완벽하지만, 내가 아직 무공의 격에 맞는 수준까지 올라서질 못했어.”
우우우우웅!
묵로의 신형이 서서히 공중에 떠올랐다.
강력한 허공섭물이었다. 온몸이 망가진 묵로는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좋은 싸움이었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어.”
묵로의 눈에 핏발이 섰다.
“너는 본교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반드시!”
연호정이 말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빠각!
머리통이 날아간 묵로의 몸뚱이가 땅에 떨어졌다.
“후우.”
연호정이 무릎을 꿇었다.
다친 곳은 많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지독한 수 싸움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태극발경의 회전력, 그 회전에 실린 압력 조절 구결을 공부해 두지 않았다면 감히 흉내도 못 냈을 것이다. 마공이 좌도방문의 극치라지만, 이렇게나 수준 높은 무공들도 있었군.’
연호정이 주먹을 쥐었다.
‘다 뽑아 먹어 주마.’
쿠구궁!
다시 일어난 그가 저 멀리 일행의 싸움터로 눈을 돌렸다.
정리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