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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22화 (922/963)

922화. 천적(天敵) (3)

퍼어엉!

대지에 공력을 퍼부어 지지대를 무너트리니, 천하의 연호정도 순간적으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무너진 자세 위, 묵로가 연호정의 목젖을 향해 양손을 휘둘렀다.

이것은 상극의 힘을 무시하는 살초다. 연호정은 어쩔 수 없이 묵로의 얼굴을 쥔 손을 놓고 물러났다.

콰앙!

물러난 즉시 진악권풍을 내질렀는데, 어느새 그곳에 묵로는 없었다. 그 신들린 보법으로 곧장 물러서 버린 것이다.

연호정의 얼굴에 신중함이 깃들었다.

상대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도발에 잘 걸려들고 있었다. 평소 적에게 내지르는 우악스러운 욕설을 생각하면 도발 같지도 않은 도발이었다.

그것은 상대의 성정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의 성정은 침착하고 음험한 쪽에 가깝다.

이제야 비로소 연호정은 확신할 수 있었다.

‘완전한 상극이다.’

황룡신왕공은 묵로의 마공과 상극이다.

다른 마공은 모르겠지만, 묵로를 상대론 그가 어떤 수법을 써도 황룡신왕공의 힘으로 찢어발길 수 있다.

물론 서로의 경지 차이가 현격하다면 그조차도 무용지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대응은 가능할 것이며, 지금 두 사람의 무공 격차를 생각하면 정면 승부에 있어서 승기는 이쪽에 있다.

‘내 목소리에도 영향을 받을 만큼 두 무공은 완벽한 대척점에 있다.’

묵로가 좀처럼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무공 때문이다.

연호정의 목소리는 단순한 육성이 아니었다. 온몸에 황룡기가 가득 찼으니, 내뱉는 소리에서조차 황룡기가 묻어 나온다.

그 황룡기가 묵로에게 엄청난 자극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무극에 올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마기로 꽉 채운 묵로에게 있어, 황룡기를 머금은 연호정은 그 존재 자체로 지독한 독과도 같았다.

‘위험해.’

그렇기 때문에 연호정은 더욱 신중했다.

그는 묵로와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승기를 잡는 순간,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이유는 몰라도 황룡은 저놈의 마공과 상극. 그러나 상극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싸움에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순간에 역전될 수도 있는 싸움이야.’

무수히 많은 실전으로 연마된 연호정의 정신과 마음은 금성철벽과도 같았다.

승기가 보이는 순간 더더욱 빈틈없이 마음을 다잡는다. 상대에게 뒤통수 맞지 않기 위해서는 흥분을 가라앉혀야 하는 것이다.

‘저놈…….’

물러난 묵로는 연호정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꼈다.

흥분하여 치고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두어 걸음 물러나 자신을 노려보는데, 그 눈빛에 신중함이 가득했다.

묵로는 기가 질리는 것을 느꼈다.

‘나이도 어린 놈이 어떻게 저런?’

어지간한 백전노장도 저럴 수는 없다. 그동안 보여 주었던 모습만 생각하면 마성(魔聲)을 터트리며 달려들 것 같은데 오히려 반격을 유의하며 차근차근 전투를 풀어내려 하고 있었다.

광혈교에도, 아니 신화교나 사음교에도 저런 무인은 없을 것이다. 신중한 자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과격한 놈은 인내심이 있을 수 없는 게 싸움이다.

저놈은 신중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순간적으로 인내심을 발휘할 만한 경험이 풍부하고, 치고 들어가야 할 때는 누구보다도 과격해질 수 있는 놈이었다.

묵로는 완전(完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적어도 싸움, 생사결, 전투의 영역에 있어서 저 어린놈의 심신은 완전에 가깝다.

가만히 연호정을 마주 노려보던 묵로가 살짝 자세를 풀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묵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싸우다 말고?”

“그래. 싸우다 말고.”

“지랄하고 있네. 입으로 싸우자고?”

묵로는 울컥했지만,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다스렸다.

“주먹질하면서도 간간이 혓바닥으로 공격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네놈 말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나?”

말을 하면서도 연호정의 신경은 묵로의 빈틈을 파헤치고 있었다. 틈이 드러나는 순간 한 방 먹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더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 기괴한 압력을 사방에 두르지 않고 모든 힘을 갈무리한 묵로에게 사각은 없었다.

그냥 입 닫고 한 방 날릴 수도 있었지만,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섣불리 공격을 시도할 수가 없었다.

묵로가 말했다.

“경공술은 내가 더 빠르더군.”

“통탄할 만한 일이지.”

“대화가 싫다면 나는 네놈과의 싸움을 포기하겠다. 대신 네가 그렇게나 아끼는 저 중원의 고수들에게로 달려가겠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상대보다 빠른 속도를 거머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전술이었다. 연호정도 간간이 써먹었던 전술이기에 묵로의 저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제대로 통하지는 않겠지만.’

연호정이 자세를 풀었다.

묵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고맙고 자시고 할 거 있겠나. 어차피 서로 죽이자고 만난 사이인데.”

“그것도 그렇지.”

“시간 없어. 짧게 말해.”

“혈신(血神)을 아나?”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 광신도 새끼들이 모시는 악신더러 혈신이라고 하는 거 아니냐?”

묵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날아갈 뻔한 것을 참기 위해 심호흡까지 해야 했다.

“우리가 모시는 신이자 삼공가(三公家)를 다스렸던 전설적인 마신(魔神)을 뜻함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가만히 연호정을 노려보던 묵로가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사색의 광인은 아나?”

순간 연호정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색(四色), 그리고 광인(狂人).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광혈교의 마인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한 명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애써 억눌러 왔던 과거의 역사를 묵로가 들춰내고 있는 것이다.

“사방무제(四方武帝).”

“그래, 너희 대륙 놈들은 사방무제라 부른다는 걸 잊었군.”

연호정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사방무제가 뭐?”

잠시 입을 닫은 묵로는 말없이 연호정의 표정을 살폈다.

연호정이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말을 해, 인마.”

“이놈이……!”

묵로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무형마환공의 모든 마기가 전신으로 뿜어져 나올 뻔했을 정도였다.

또 한 번 스스로를 다스린 묵로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백 년 전, 우리는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벌였다.”

“알아.”

“그때 대륙의 연합군은 강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어. 우리의 사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그런데?”

“하지만 단 한 명의 존재가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다.”

“그게 사방무제인가?”

“그렇다.”

묵로의 눈이 깊어졌다.

“그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남아 있진 않다. 뼈아픈 역사이기에 그런 거라고 유추할 뿐, 우리라고 삼백 년 전의 사정을 알 수는 없다.”

“…….”

“다만 그의 무공이 네 가지 색깔에 비유되며 공방과 후퇴, 반격 등 전투에 있어 완전에 이른 무공을 사용한다고 알려졌다.”

사부님.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릴 뻔했다.

묵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적의 입으로 듣는 사부님의 과거는 뜻밖의 아련함을 선사했다.

“그리고 백여 년 전, 또 한 번의 대륙 진출을 위해 정보를 취합하던 와중 사색광인에 대한 소문을 다량 취했다고 들었다. 물론 나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말이야.”

“…….”

“사색광인은 삼백 년 전의 전쟁을 끝마친 뒤 대륙 어딘가에 은거했다고 한다.”

“하고 싶은 얘기가 삼백 년 전 전쟁을 종식시킨 영웅에 대한 일대기였나?”

“그렇다.”

“과거에 끗발 날렸던 사람 얘기를 왜 꺼내나? 시간 아깝게.”

“과거?”

묵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과거의 사람이지. 그러나 그가 과거 어느 때에 죽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

연호정의 얼굴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미묘하게 헝클어지고 있었다.

“뭔 소릴 하는 거야?”

“사색의 광인, 너희가 사방무제라 부르는 그 난적은 본교의 신물(信物) 중 하나를 훔쳐 갔다.”

“……!”

“그 신물을 손에 넣은 이상 그자의 생존 가능성은 무(無)가 아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언제, 어떤 순간이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황룡기를 꽉 채워 두었기에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강해진 심동(心動)을 묵로에게 들켰을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는 끝났나?”

“아직 더 남았다. 나중에 알았어. 대륙에 은거한 사색광인이, 어느 순간부터 너희 벌레 같은 놈들에게 황룡제(黃龍帝)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을.”

묵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네놈의 무공은 내 마공과 상극이야. 나의 마공은 광혈교 십대호교마공 중 하나로서, 과거 혈교(血敎)라 불리던 시절의 원본을 유지한 몇 안 되는 마공 중 하나다.”

“…….”

“그리고 그런 최고급 마공이 너의 무공 앞에 속수무책이로구나.”

“대화가 아니라 그냥 혼자 주절거리고 싶었던 거로구만.”

“차라리 네놈의 무공이 불가나 도가의 신공이었다면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너의 무공은 정공(正功)이지만, 파마(破魔)의 공능을 안고 있는 것 같지는 않거든.”

우우우웅!

묵로가 마기를 끌어올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네놈의 그 무공…… 아니, 네놈은 사색광인이 후예인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제 슬슬 시작하면 되냐?”

묵로는 연호정의 반응에서 진실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두 눈이 뿌연 안개로 휩싸인 것만 같다. 놈의 눈빛과 태도, 목소리만 들어 보면 혈교는커녕 사방무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고도의 기만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자신을 속일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사색광인의 무공이 혈교 무공과 상극이라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당시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혈신(血神)의 마공이야말로 만마(萬魔)를 다스리는 절대마공이라, 모든 마인은 혈신의 권능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엔 연호정의 무공이 혈신의 무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이 현상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한데 가만 보니, 놈의 무공은 분명 정공인 데다가 오히려 대륙 놈들이 황룡제라 불렀던 사색광인의 별호를 연상케 했다.

게다가.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벽산호장의 무공이 실전 공방에 능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삼교는 하나이자 경쟁자로서, 서로를 돕는 와중에 견제하는 미묘한 관계였다.

당연히 교단마다 성격이 확연하게 달랐고, 그중 광혈교는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대륙의 정보를 제대로 접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걸 신화와 사음이 일부러 알려 줄 정도의 의리는 없었다. 큰 줄기의 정보는 교환하지만, 자잘한 부분이나 상대에게 지나친 이득이 되는 정보는 철저하게 통제하곤 했다.

‘모르겠군.’

상대를 떠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연호정에게서 뭔가를 얻어 내기는 힘들 듯했다.

‘만약 놈이 사색광인의 제자가 맞다면…… 이놈의 무공이 진정 사색광인의 그것이라면.’

묵로의 눈이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좋다.”

쿵!

강한 진각으로 투지를 끌어올린 묵로가 손을 까딱였다.

“전력을 다해 너라는 존재를…….”

콰아앙!

묵로의 몸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 나갔다.

연호정이 빠른 속도로 주먹을 휘둘렀다.

“나보다 말 많은 새끼는 다 마음에 안 들어.”

금룡이무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연환식으로 묵로를 몰아쳤다.

콰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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