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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18화 (918/963)

918화.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6)

신마림의 장로 명도강이 바쁘게 계단을 내려가며 외쳤다.

“죄인들을 전부 죽여라! 독방만 남기고 싹 목을 날려 버려!”

“존명!”

곳곳에서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참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신마림의 뇌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 간수들의 손에 목숨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마림의 세력이 이토록 커질 수 있었던 건 청해를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인구수는 적어도 신마림을 한번 건드려 보겠답시고 침입한 사람이나 죄를 짓고 옥에 갇힌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그 많은 죄수가 일제히 죽어 나가고 있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어차피 신마림은 멸망했다. 이들 모두를 두고 가도 상관없을 테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신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는 몽땅 죽이는 게 좋았다.

이윽고 명도강이 독방 앞에 도달했다.

“후우.”

목계담을 따라 반란을 획책한 장로는 총 셋이었다.

그중 하나인 명도강은 별다른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가 보기에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고, 그럴 바에야 목숨이나 부지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 목계담을 따랐다.

그랬기 때문에 달리 실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 바쁜 순간에 뇌옥까지 와서 같잖은 일을 처리하고 있는 이유였다.

‘떨리는군.’

그가 받은 명령은 전대 림주를 목계담 앞으로 데리고 가는 것.

정말 별것 아닌 임무인데도 마음이 떨리는 것은, 신마림주 혁련휘의 무시무시한 과거를 알기 때문이었다.

‘괜찮다. 이빨 빠진 늙은이일 뿐이야.’

기감을 열어 보니,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 하나가 있었다.

명도강은 씁쓸함을 느끼며 독방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순간 명도강의 눈이 흔들렸다.

‘……?!’

쇠사슬에 팔다리가 묶여 있어야 할 노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훅!

기괴한 한기가 느껴졌다.

명도강이 본능적으로 몸을 빼려 할 때였다.

쾅! 퍼어억!

“커어억!”

철문을 뚫고 나온 손 하나가 그의 목을 잡았다.

명도강은 양손으로 빼빼 마른 손목을 움켜쥐었다.

치이이이이익!

순간 명도강은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어인 일인지, 뼈만 남은 손목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고통은 점점 커져만 갔고 잡힌 목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짐승처럼 길쭉한 손톱에 살이 찢긴 것이다.

“이 기운은…….”

붉게 달아올랐던 명도강의 얼굴이 일순 사색이 되었다.

철문 뒤에서 흘러나온 묵직한 목소리.

그것은 거의 평생 동안 공포로 기억된 절대자의 목소리였다.

“삼음귀마공(三陰鬼魔功)…… 명도강이로구나.”

“컥! 크윽!”

손바닥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조여 오는 숨통에 머리가 띵했다.

명도강은 본능적으로 마공을 운용, 발로 철문을 걷어찼다.

쾅!

명도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본래 그의 힘이라면 철문이 뚫려야 정상이었다. 한데 철문은 멀쩡하고 발끝만 아파 왔다.

그제야 명도강은 깨달았다. 내공 운용이 제대로 안 되고 있음을.

아니, 자신의 내공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무공과 외가 무공은 하나야. 내공의 힘에 심취하여 육체 단련을 소홀히 하지 말라 일렀거늘…… 그 방만하기 짝이 없는 성정에는 아까운 재능이었다.”

“커헉! 리, 림……!”

울컥! 울컥!

얇은 손목 위, 굵은 혈관이 연신 꿈틀거렸다.

명도강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내공이…… 이, 이건 설마 흡정마공?!’

치이이이익!

무서운 속도로 내공이 빨려 들어간다.

처음 물꼬를 트기가 어렵지, 한번 트이는 순간 대량의 마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양과 속도가 엄청나서 순식간에 아랫배가 허전해지며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명도강이 입을 쩍 벌렸다.

어느새 삼음귀마공으로 쌓은 마기가 모조리 빨려 나가 버렸다. 텅 빈 단전이 쪼그라들며 오장육부가 흔들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엄청난 고통과 상실감을 느낄 새도 없이, 온몸이 바싹 말라 가기 시작했다.

우둑! 우두두둑!

내공 강탈, 마기 흡수에서 끝나지 않는다.

명도강의 눈이 썩은 생선 눈알처럼 탁하게 변했다.

‘이런 젠장…….’

푸스스스스.

물기 하나 없는 목내이가 되어 버린 명도강의 시신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쿵.

철문이 떨어지고.

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인, 전대 신마림주 혁련휘가 천천히 목을 돌렸다.

우두두둑!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그야말로 살벌했다.

거죽 한 장만 남았던 혁련휘의 몸엔 어느새 적당한 근육이 붙어 있었다. 강탈한 내공은 삽시간에 단전으로 끌어와 불순물만 제거해 마력(魔力)을 상승시키고, 이어 빨아들인 생명력으로는 그릇인 육체의 힘을 되살렸다.

‘몸은 이 정도면 충분하군.’

어차피 오래 써먹지도 못할 몸뚱이였다.

목계담의 성마진기(成魔眞氣)로 본연의 힘을 깨웠고, 명도강의 부족한 마기에서 불순물을 제거해 순수한 마핵만 뽑아 증폭력을 올렸다.

쿠르르르릉!

전신으로 퍼진 마기가 단전으로 돌아오고, 단전으로 돌아온 마기가 재차 전신으로 퍼져 나가며 끊임없이 힘을 불렸다.

“뭐, 뭐야?!”

“장로님!”

저 멀리서 간수들이 달려왔다. 심상치 않은 힘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혁련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뾰족하게 날이 선 손톱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매의 발톱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혁련휘의 얼굴에 잠시지간 씁쓸한 기색이 흘렀다.

‘마에서 벗어나 나만의 무도로 끝을 보려 했건만.’

그 생각과는 달리 몸은 완전한 마(魔)로 물들고 있었다.

“허억!”

“누, 누구냐!”

간수들이 혁련휘를 향해 만도를 휘둘렀다.

혁련휘의 마안(魔眼)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토해 냈다.

“누구냐고 물었느냐.”

치리리링!

벽에 걸린 길쭉한 쇠사슬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혁련휘의 팔에 감겼다.

간수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화아아아아악!

혁련휘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온 막강한 기파가 십여 명의 간수들을 그대로 쓰러트려 버렸다.

“네놈들 정도로는 부족해. 먹잇감을 더 가져오너라.”

퍼버버버벅!

아홉 간수의 단전을 뚫은 쇠사슬.

그 쇠사슬을 통해, 간수들의 마기가 순식간에 혁력휘의 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쩌저저저정!!

연달아 후려치는 철봉과 손가락이 무지막지한 공명음을 터트렸다.

막원의 눈이 깊어졌다.

‘강하군.’

작정하고 후려친 것도 아니요, 웃으며 휘두르는 조법(爪法)임에도 강한 압력이 전해진다.

“네놈이 백병신군이냐!”

막원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상대의 목소리가 바늘처럼 귓가를 쑤시고 들어왔다. 목소리 자체는 바위라도 얹어 놓은 것처럼 무겁고 낮은데, 고막에 전해지는 느낌은 몹시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시끄럽다!”

막원이 철봉을 종횡으로 휘둘렀다.

쩌정!

빠르고 짧은 단타 이격.

별것 없어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그 봉술을 막은 야혁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깃들었다.

“이놈! 강하구나!”

“그럼 약하겠냐, 내가!”

쿠웅!

진각과 함께 철봉을 내치니, 회전이 걸린 철봉 끝에서 엄청난 돌풍이 뿜어져 나온다.

야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좋다! 아주 좋아!”

그의 양손에 시커먼 마기가 어리는 순간.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반경 십여 장 너비의 땅이 기괴한 압력에 짓눌려 살짝 꺼졌다.

중원 정점에 오른 초고수들의 격전이었다. 당연히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간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막원이 힐끔 일행을 바라보았다.

만반의 태세를 갖춘 일행들. 긴장한 사람도 있었지만, 저 무리의 좌장이라 할 수 있는 황석태의 얼굴에는 엄격함만이 가득했다.

‘아우 말로는, 다대다의 전장에 한해서는 성천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재라고 하였다.’

연호정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이 야수 같은 고수 뒤에서 우회해 들어오는 백여 명의 검객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막강해 보이는 전력으로, 개중에는 무종의 벽을 뚫은 검사도 열 명은 넘는 듯했다.

저 정도면 철저하게 압축시킨 대문파급 전력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실제 황석태나 패율, 부선과 대등한 경지에 오른 검객은 서넛에 불과했지만, 나머지 검사들의 기세도 무척 첨예하여 결코 만만치 않았다.

‘걱정하지 말자. 일단은 믿는다.’

그때, 야혁이 질풍처럼 치고 들어왔다.

“어딜 보고 있나!”

콰아앙!

막원의 몸이 오 장이나 밀려 나갔다.

‘무식하기 짝이 없군.’

이 한 수로 깨달았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완력 하나만큼은 연호정, 혹은 그 이상을 넘볼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고수였다.

그러나 싸움은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닌 법.

쿠웅!

자세를 바로잡은 막원이 천무신병기(天武神兵氣)를 완전히 개방했다.

파아아아악!

은백색 찬연한 진기는 마치 장인이 주조한 병장기의 날을 보는 듯했다.

쭉 찢어진 야혁의 눈에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법 놀아 줄 만한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진신진력을 뽑아내자 쉽게 무너트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놈!”

쿠르르릉!

야혁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광혈교 십대호교마공(十大護敎魔功) 중 하나인 야수마공(野獸魔功)이 완전하게 개방되었다.

막원이 씨익 웃었다.

증폭되는 힘의 밀도가 엄청났다.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목숨을 걸고 부딪칠 만한 난적의 존재를 긍정하는 무인 특유의 호승심 때문일 것이다.

“와라!”

파아아아아앙!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굵고 기다란 두 팔로 바닥을 찍으며 달려든다. 엄청난 근육으로 가득한 등도 살짝 말려 있는 것이, 정말로 거대한 야수를 보는 것 같았다.

야혁의 손이 막원의 머리를 노렸다.

콰앙!

대지를 훑지도 않았는데 지상에 다섯 줄기의 고랑이 파였다.

측방 사선으로 치고 들어간 막원이 철봉의 중앙을 잡고 휘둘렀다.

퍼버버버벅!

봉의 양 끝으로 연타를 때린다. 그 빠른 단타가 야혁의 몸에 모조리 적중했다.

콰앙!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휘두르는 팔꿈치를 철봉으로 막으니, 어느새 막원의 몸이 재차 삼 장이나 밀려 나갔다.

번쩍!

곧장 몸을 회전하며 달려드는데, 그 움직임이 상리를 벗어나 있었다. 인체의 관절 구조로는 보일 수 없는 움직임, 귀신 들린 호랑이가 달려드는 것 같다.

우우우우우웅!

막원의 철봉이 은백색 찬연한 빛으로 물들었다.

청해의 건조한 공기를 빨아들이며 회전하는 천무신병기가 점차 뾰족하게 집중되었다.

부우우웅!

야혁의 주먹이 막원의 좌측 안면을 노리고 들어왔다.

막원의 몸이 전방 하단으로 기울어지며 철봉이 날아들었다.

‘통천일룡(通天一龍).’

콰아아앙!

야혁의 몸이 회전하며 십여 장이나 뒤로 밀려났다.

한 점에 집중된 막강한 일격이었다. 봉술이 아니라 창술에 가까운 찌르기였다.

주르륵.

야혁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다. 조금이지만 살점이 뜯겨 날아가 버린 것이다.

퍽!

막원의 이마에서도 뒤늦게 상처가 터졌다. 야혁의 권압(拳壓)을 이기지 못하고 피부가 찢어진 것이다.

야혁이 으르렁거렸다.

“이놈, 제법 하는구나.”

막원이 씨익 웃었다.

“힘만 좋은 곰탱이 자식. 인간의 저력을 보여 주마.”

“미친놈!”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력을 다해 몰아치는 생사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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