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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17화 (917/963)

917화.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5)

당관은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싸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는 자신의 내부를 점검했다.

‘괜찮군.’

제왕독공을 난사하기에 아무 무리가 없는 상태였다.

중요한 것은 융해삼생공이었다. 위험한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펼쳐야만 할 텐데, 융해삼생공의 살벌한 위력을 생각하면 묵비나 옥청은 말할 것도 없고 연호정까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설령 목숨을 위협하진 않더라도, 독기 때문에 내상을 입거나 완벽한 무공 구현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차라리 내가 감당하는 게 낫다.’

연호정은 이쪽 최강의 전력이었다.

설령 불리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활로를 만들 수 있는 놈이다. 사적인 친분을 떠나, 연호정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지켜봐야 한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각.

당관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무공이 한계를 뛰어넘을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연위의 심검(心劍)을 보지 못했다면, 연위와의 논검으로 만천화우공을 만들어 보지 못했다면.

나아가 당가의 전설적인 고수, 아버지 당형에게 또 다른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십 년은 더 걸렸을 그 한계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운이 좋았다.’

당관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자신의 운이 좋았음을.

운 또한 실력이라고 하지만, 실력 이전에 이렇게나 자신을 위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 자체가 복이었다.

물론 그 운을 끌어내기 위해 치열한 고민을 했고, 가문과 전면전까지 벌여야 했지만.

‘이런 운은 언제까지 지속될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금 나는 충분한 고점에 도달해 있어. 서둘러 비상하지 않는다면, 이 고점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무인으로서의 본능이 그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당관의 시선이 연호정의 등을 향했다.

거대한 흑색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당당하게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나아가는 천재의 모습.

‘너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

연호정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무리(武理)를 느낀 그였다.

그렇다면, 연호정이 도달한 길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기도 했다.

지금은 선배와 후배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당관의 눈앞에는 최고의 교보재가 있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그 교보재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제대로 직시해야만 했다.

그는 반드시 그러리라 다짐했다.

그때, 연호정이 외쳤다.

“옥청!”

당관과 묵비 뒤 삼 장 거리에 뒤처져 있던 옥청이 대답했다.

“예!”

“앞으로!”

옥청은 난감함을 느꼈다. 지금도 최선을 다해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이보다 더 속도를 올릴 수는 없었다.

그때, 연호정이 등 뒤로 왼손을 뻗었다.

우우우우우웅!!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경력이 소용돌이치며 옥청의 두 다리와 등에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번쩍!

순간 옥청의 신형이 연호정의 앞에 도달했다. 제운종의 속도가 일순 세 배 이상 빨라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무시무시하군.’

힘을 부여한 게 아니다.

옥청의 하반신과 등에 알 수 없는 힘으로 회전을 걸었다. 그 회전의 힘이 옥청의 신법과 정확하게 맞물려 폭발적인 속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저런 것이 가능하다니!’

놀란 것은 옥청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옥청은 당관보다 더 놀랐다.

‘태극발경(太極發勁)!!’

기운은 다르지만 이 역동적인 전사(轉絲)의 힘은 분명 무당 무공의 극의와 닿아 있었다.

‘이런 식으로도 운용할 수 있다니!’

연호정이 말했다.

“탐지해라.”

“예?”

달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연호정이 끊임없이 자신의 신법에 힘을 부여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집중해. 혼원기는 천고의 신공이다. 파마(破魔)의 힘으로는 소림의 무상대능력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이야.”

“……!”

“집중해라. 마기의 흐름을 읽어 내. 무시무불대진이 다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적진이 어딘지는 알아도 적의 병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나조차 알 수 없다.”

“제,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할 거 같았으면 시키지도 않았어. 시간 없다! 빨리!”

“예!”

옥청은 혼원기를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우우우웅!

전신에서 어두운 청록빛 진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한순간 모든 내공을 개방하는 것은 신체에 큰 부담이 된다. 심지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와중이었다. 옥청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어?!’

치이이이익!

넘실거리는 청록빛 진기 위로 아지랑이가 타오르고 있었다.

완벽하게 통제되던 혼원기가, 한순간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힘을 불리기 시작했다.

옥청은 당황했다.

‘뭐, 뭐야?’

파아아아아아!!

적진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기의 밀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검선 탁무자가 무당 무공의 정수를 모아 만든 혼원결, 그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힘이 급속도로 증폭되기 시작했다.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크다!’

뒤에서도 뚜렷이 보이던 옥청의 혼원기가 거대한 반구형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 범위가 십여 장을 넘어갈 정도로 커졌다.

한순간의 출력이라고는 하나 증폭된 양만 보면 무극수의 그것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겠다. 내공의 질은 비교도 할 수 없지만, 뿜어져 나오는 공력의 절대량만큼은 연호정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어떤 조화로?!’

연호정이 외쳤다.

“힘에 취하지 마라!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예, 예?!”

“눈으로 보려 하지 마라! 그 기(氣)로, 마음으로 놈들을 보는 거다!”

순간 옥청은 사부 탁무자의 말을 떠올렸다.

‘눈으로 사물을 보면 하나를 본다. 오감을 동원해 주변을 보면 열 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으로 세상을 읽기 시작하면 천지에 보지 못할 것이 없다.’

옥청이 눈을 감았다.

한도 끝도 없이 불타오르던 혼원기가 삽시간에 그의 체내로 빨려 들어갔다.

우둑.

이상한 소리가 들렸지만, 옥청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으로.’

천지를 다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한순간 깨달음을 얻었지만, 아직은 사부처럼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魔)의 흐름이라면.

그 단 한 가지를 보려 한다면, 못 볼 것도 없으리라.

옥청이 다시 눈을 떴다.

초점이 사라진 눈에서 청록빛 안광이 번뜩였다.

“저기가 어딥니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짚는다.

“동쪽이다.”

“거대한 힘의 흐름이 동쪽 어딘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거대하다면 어느 정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소부주님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는 고수 같습니다.”

“한 명이냐?”

“힘이 너무 커서…… 아니, 아니군요. 한 명이 맞습니다. 그 뒤를 백여 명의 마인들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좋아.”

당관과 묵비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에 어린 경악을 읽을 수 있었다.

우두둑! 우둑!

결코 크지 않았다. 오히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듣지도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옥청은 제 몸에서 울리는 그 소리를, 불타오르는 변화를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무극수 하나에 마인 백 명. 그 정도면 막원 형님과 철기단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잘했다, 옥청.”

“아, 아닙니다.”

“그리고 축하한다.”

“예?”

스르르르르.

갈무리한 혼원기가 빛을 발하며 전신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충만하기 이를 데 없는 신체. 청해까지 오며 얻었던 피로와 자잘한 부상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불타 사라지고 있었다.

옥청의 눈이 흔들렸다.

주먹을 쥐니, 일순 엄청난 힘이 모여들었다.

“무종을 넘었어. 축하한다.”

“제, 제가 말입니까?”

“너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어. 이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놀라움으로 가득하던 옥청의 얼굴이 서서히 편안함으로 물들었다.

“그렇군요. 제가 무종의 벽을 부쉈군요.”

연호정이나 강량처럼 화려하고 폭발적인 변화는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신체와 진기가 변화한 옥청.

도가 무공을 익힌 자들의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경지 상승이었다.

당관이 씨익 웃었다.

“축하하네.”

묵비의 얼굴에도 대견함이 깃들었다.

“축하해.”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축하는 하지만 아직 멀었어. 거기서 만족하지 마라. 마(魔)와 싸우는 한, 너의 경지는 끝도 없이 상승할 수 있다.”

“예!”

“내가 너의 몸에 걸어 둔 이 발경의 흐름을 기억해. 이것은 승현진인께서 내게 주신 깨달음을 녹인 것이다. 어느새 그 깨달음은 내 무공의 기둥이 되었다.”

“역시, 그렇군요.”

“태극이다. 이 힘을 제대로 연마해. 그동안 멈춰 있었던 너의 경지가 누구보다 빨리 상승할 것이다.”

“한계를 두지 않겠습니다.”

“좋아.”

그때였다.

위이이이이잉!

신마림의 본진, 수많은 궁전과 건물들의 모습이 산 곳곳에 걸쳐 드리워졌다.

그것이 보이는 순간 주변 경물이 마구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부서지지 않은 무시무불대진, 그 핵(核)이 발동한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황금빛 신비로운 기운으로 물들었다.

콰아아아앙!

돌풍을 일으키는 금빛 권풍 일발에 대진의 핵이 허무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파삭!

투명한 초자로 이뤄진 세상이 산산이 부서지며 날아갔다.

마침내, 신마림의 본진이 드러났다.

“간다!”

* * *

쿠웅!

멀리서 들려오는 충격파.

막원의 눈이 깊어졌다.

“진입했군.”

거리가 너무 떨어져서 성천의 힘으로도 상황을 제대로 읽기가 어려웠다.

다만,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는 충격파의 흐름으로 비로소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천 공자를 지키라고?’

그가 천효락을 힐끔 바라보았다.

‘천 공자를 지키는 데에 많은 병력은 필요치 않다. 차라리 나 하나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그런데도 굳이 부대 하나를 남겼다는 것은…….’

그때, 황석태가 말했다.

“철기단 전원 용아삼백진(龍牙三百陣)으로.”

쿠르르릉.

말발굽 소리와 함께 철기단원들이 좌우로 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막원이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황석태가 담담하게 말했다.

“적이 올 겁니다. 슬슬 준비하셔야 합니다.”

“짐작은 하고 있었네만…… 얼마나 오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다만 소부주님의 예측이라면 어렵더라도 능히 감당할 만한 전력이 올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패율이 눈이 반짝였다.

“적이 온단 말이지?”

천효락을 지키라고 남겨진 것이 살짝 불만이었는데, 적이 온다고 하니 손에 간질간질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투사였다.

연지평이 물었다.

“적이 온다면 형님께서는 왜 굳이 병력을 나누었을까요?”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우문일세. 적을 맞이하고자 병력을 나눈 것이 아니라, 적이 병력을 나누도록 유도하신 것이야.”

“예?!”

그때, 막원의 눈이 저 멀리 우측 평야를 향했다.

“오는군.”

적의 기세를 느끼는 순간 이미 그들은 시야에 들어와 있었다.

놀랍도록 빠른 속도였다. 특히 전방에서 달려오는 자의 기세는 너무나도 솔직하고 광포하여, 이렇게 거리가 떨어진 상황에서도 피부가 저릿할 정도였다.

황석태가 말했다.

“놈들은 천 공자를 사로잡기 위해 오고 있는 것. 천 공자와 호위, 그리고 부선 공녀께서는 용아진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천효락의 눈이 깊어졌다.

“저들은 광혈일 겁니다. 만만치 않아요.”

“그럼 더더욱 잘됐군.”

패율이 씨익 웃으며 단창을 빙빙 돌렸다.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잖아?”

황석태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종남산 때처럼 활약해 주면 되네.”

“거 좋지. 생각해 보니 오랜만이네? 같이 손발 맞추는 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때처럼만 하자고.”

“좋아.”

막원이 외쳤다.

“온다! 준비해라!”

파아아아악!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다 싶은 순간.

선두에 선 거대한 체구의 누군가가 짐승처럼 돌진해 왔다.

막원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파아아아앙!

먼저 달려 나간 막원이 힘차게 철봉을 뻗었다.

콰르릉!

무극수들의 화려한 부딪침을 신호탄으로,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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